[2024년 6월호] 한국 공군 팬텀, 도입에서 퇴역까지

우리 영공을 호령해 왔던 한국 공군의 팬텀(Phantom) 전투기가 6월 7일부로 일선에서 모두 물러난다. 1969년 8월 29일 처음 도입된 F-4D 전투기를 시작으로 추가로 도입된 RF-4C 정찰용 사양과 성능이 개선된 F-4E 전투기가 추가로 도입돼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서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1960년대 북한 공군력에 열세였던 우리 공군력을 한순간에 북한을 압도하고, 강력한 영공 수호 역량을 갖추게 해준 팬텀의 지난 55년간의 자취를 되돌아봤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남북 간 전쟁이 언제 다시 발발할지 모를 정도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다. 실제로 육군본부가 발행한 <대침투작전사 1961~1970년>에 따르면 휴전 이후 2020년까지 북한의 침투 및 국지도발 횟수는 총 3,119회. 이 중 1960년대가 1,336회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특히 팬텀이 도입되기 한 해 전인 1968년은 북한의 침투와 도발이 그 어느 해보다 많은 322회까지 달해 남북 간 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1월 21일 발생한 북한 특수부대원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일명 1·21 사태)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한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함 납치 사건 등은 규모와 강도 측면에서 이전 침투·도발보다 크고 강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건이 31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급습하려다 실패한 1·21 사태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지휘부에 대한 응징보복을 구상하고, 미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에 불만을 품었다.


사진 : 공군역사기록단

“팬탐기를 안 주겠다고 하면 회담을 깨고 나오라”
1·21 사태를 겪은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보복을 구상했지만, 당시 우리 군이 갖춘 전력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장지량 당시 공군참모총장의 회고(한국형 경제건설 제5권)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육군이나 해군 전력으로서는 북한에 보복할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그나마 공군의 전투기를 이용한 보복이 가능성 있는 방안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당시 공군이 보유한 기종은 F-5 전투기였다. 
당시 장 총장은 박 대통령에게 “F-5는 단도인데 비해 MiG-21은 피스톨 격입니다. MiG-21을 제압하려면 F-4 팬텀기가 필요합니다”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이후 미 정부에 F-4를 요청했지만, 요청을 받은 브라운 미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한국 공군 조종사는 F-4 팬텀기를 조종할 능력이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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