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 여객기의 계보(52) Boeing 737 Classic(Pt.1)

제트 여객기의 계보(52)
Boeing 737 Classic(Pt.1)




글/이장호

이름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D.H.코메트(Comet) 여객기는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인불명의 추락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판매에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코메트 여객기의 사고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대책을 세우는 동안 보잉은 제트여객기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보잉을 이끌던 윌리엄 M. 앨런(Willan Allen)은 과감한 결단력으로 제트여객기인 보잉 707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너무 위험한 프로젝트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저할 때 그는 회사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367-80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마침내 성공한 보잉 707 시리즈는 1,000여 대가 판매되면서 큰 성공을 거뒀고 민간 여객기 전문업체로서 입지를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Boeing 707>

연이은 성공
보잉은 1930년대 더글러스(Douglas) DC-2 여객기가 등장한 이후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더글러스를 민간 여객기 시장에서 추월하면서 제트여객기 시대의 선두주자로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넓은 국토와 많은 여객 수요를 기반으로 보잉 707 제트여객기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그동안 더글러스 DC 시리즈에 눌려 상실한 시장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707 여객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후속 기종으로 선보인 보잉 720 여객기는 기대와 달리 참담한 실패를 보였다. 707 여객기를 중단거리 기종으로 개조한 720 여객기는 연료 소비량이 너무 많아서 경제적이지 못했다. 연료 소비량으로만 본다면 더글러스 DC-4, 록히드(Lockheed)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 같은 기종의 4발 왕복엔진 여객기가 훨씬 경제적이었다.

보잉은 무조건 여객기에 제트엔진을 적용하는 것이 해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엔진을 3기로 줄여 경제성을 높이고 지방공항에서도 운항이 가능한 보잉 727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승객 150명이 탑승할 수 있는 727 여객기는 미국 국내선에서 큰 환영을 받으며 무려 1,800대가 판매됐다. 이로써 707과 727이라고 하는 명작을 내세워 보잉은 한동안 제트여객기 시장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Boeing 727>

소형기 개발의 필요성
이처럼 중단거리 노선에서 구형 여객기를 대신해 신형 제트여객기가 보급되고 있지만 지방 노선에서 운항됐던 모든 구형 기종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미국의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 노선에는 아직 구형 기종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객기 시장의 잠재 수요를 빠르게 파악하고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BAC 1-11, 더글러스 DC-9 여객기는 727 기종이 장악하기 힘든 단거리 소형 여객기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말하자면 전성기를 누리던 보잉이 간과한 90~100인승 소형 여객기 시장을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DC-9 여객기 판매가 증가하고 영국제 BAC 1-11 여객기까지 미국의 안방 시장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잉은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사실 보잉은 이러한 시장의 움직임을 파악했지만 시장의 수요가 크지 않았고 이미 707, 727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금융 부담이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DC-9 여객기의 판매가 해를 거듭하면서 급증하자 보잉으로서도 상황을 간과할 수 없었다.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 노선은 비행시간이 짧고 이착륙이 빈번하다. 지방공항 역시 활주로가 짧고 여객터미널도 규모가 작으며 지원시설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처럼 열악한 조건을 감안해 DC-9 여객기는 쌍발 엔진, 대형 주익, 플랩을 갖추고 있어 지방공항에 취항하기에 적합한 기종이었고 가격도 727보다 저렴했다.


<Douglas DC-9>

그러한 가운데 미국의 4대 주요 항공사인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 델타항공(Delta Air Lines), 유나이티드항공(United Airlines), 이스턴항공(Eastern Air Lines)이 모두 DC-9, BAC 1-11 여객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보잉은 위기에 몰리게 됐다. 보잉으로서는 이러한 틈새시장을 기존 727 기종으로 공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론적으로 새로운 기종 개발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뒤늦게 보잉은 DC-9 여객기와 직접적으로 결쟁할 새로운 기종을 1964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잉으로서는 주요 고객인 미국의 대형 항공사가 모두 경쟁 기종을 선택한 다음이었고 한 때 보잉과 같은 회사였던 유나이티드항공도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새로운 기종을 판매할 고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렵게 결정한 신형 여객기 개발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보잉의 영업팀은 단거리 노선의 수요가 많은 서유럽으로 건너가 열심히 영업활동을 전개했다. 때마침 독일의 루프트한자항공(Lufthansa)에서는 단거리 노선에 투입할 신형 여객기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루프트한자항공의 경우에도 많은 수량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겨우 21대만 주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고객을 잡은 보잉은 프로젝트를 살리기 위해 다소 무모한 제안을 항공사에 제시했다. 이 제안은 신형 여객기를 구매할 경우 납품할 때까지 운항할 대체 기종으로 727 여객기를 무료로 임대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화답한 항공사가 바로 유나이티드항공이다. 유나이티드항공은 경쟁 기종인 DC-9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지만 아직 계약을 체결하기 이전이었다. 더구나 대체 기종까지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제안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보잉은 미국의 대형 항공사인 유나이티드항공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확정 40대, 옵션 30대라는 대형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앞서 등장한 707, 727 기종과 대조적으로 737 여객기는 미국 주요 항공사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어렵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상황은 중단거리 기종으로 내놓은 720 여객기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점을 깊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07, 727 기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보잉은 720 사업의 손실을 충분하게 만회할 수 있었고 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Douglas DC-9>

개발의 시작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64년부터 시작된 보잉 737 여객기 사업은 상세설계를 마치고 순조롭게 개발이 진행됐다. 처음 제작된 1호기는 1967년 4월 초도비행에 성공했고 1968년부터 루프트한자항공에 납품이 시작됐다. 737 여객기는 단거리 노선에서 경제적인 운항이 가능하도록 개발된 기종으로 운항승무원을 2명으로 줄인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100인승 단거리 쌍발 엔진 기종인 737 여객기는 기존의 150인승 중 단거리 3발 엔진인 727 여객기를 2/3 크기로 축소해 개발한 기종이다. 두 기종은 동일한 프랫 앤 휘트니(P&W) JT8D 터보팬 엔진을 탑재하며 707 여객기로부터 이어지는 3+3 좌석 배치 방식을 그대로 채택해 동체의 단면도 같다. 727 여객기를 축소한 737 여객기는 개발비용이 많이 절약됐다. 그러나 동체 단면 지름에 비해 길이는 짧은 편이어서 균형이 잡힌 외형은 아니었다.

서둘러 개발된 737 여객기는 경쟁 기종인 DC-9 여객기와 비교할 때 항공사의 평가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1971년 보잉은 이착륙 성능을 높이고 기내 인테리어 디자인을 고급화한 737-200 개량형(Advanced)을 내놓았다. 이후부터 판매가 늘기 시작했고 뒤늦게 인기를 얻어 1988년까지 생산이 계속됐다.


<First Boeing 737>

727 여객기 크기를 줄여 서둘러 개발한 737 여객기는 경쟁 기종과 달리 인기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707, 727 기종과 공통점이 많았고 승무원과 정비사의 교육, 정비유지 측면에서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개량형으로 등장한 737-200 기종은 해외국가의 항공사에 많은 수량이 납품됐고 1988년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총 1,114대가 판매됐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737-200 여객기는 비경제적인 기종으로 인식돼 날로 증가하는 항공 여행객의 수요에 대처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1970년에 단 39대의 주문만 확보한 737 여객기는 앞날이 불투명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보잉에서 유나이티드항공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초대형 계약에 성공하면서 737 프로젝트가 정상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Boeing 737-100>

CFM56 엔진의 시작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737 여객기 사업에 큰 치명상을 줬다. 1973년에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의 보복으로 중동 산유국은 원유 생산량을 감축했고 그 여파로 인해 연료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문제는 737 여객기에 탑재된 JT8D 터보팬 엔진에 있었다. 이 엔진은 원래 여객기에 탑재하기 위해 개발된 엔진이 아니며 미 해군의 A-4 스카이호크(Skyhawk), A-6 인트루더(Intruder) 공격기에 탑재된 J52 터보제트 엔진을 개조한 엔진이다. 따라서 경제성보다는 추력 성능에 중점을 둔 엔진으로 여객기에 사용하기에는 연료효율이 낮은 제품이었다.


<P&W JT8D>

물론 여객기에 탑재하기 위한 터보팬 엔진으로 개조하기는 했으나 바이패스(bypass) 비율이 매우 낮아 사실상 터보제트 엔진에 가깝고 소음도 매우 컸다. 더구나 연료 소모가 많았기 때문에 석유 파동이 발생하자 곧바로 항공사들의 불만이 발생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보잉은 급하게 개발한 737-200 기종의 한계를 절감했고 고객의 요구에 맞춘 성능개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가장 큰 개량은 탑재 엔진에 있었다. 우선 연비가 낮은 JT8D 엔진을 대신할 신형 엔진이 필요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100인승 여객기에 쌍발 형식으로 탑재할 10톤급 터보팬 엔진이 없었다. 사실 보잉에서 JT8D 엔진의 한계를 알면서도 737-200 기종에 적용한 것도 마땅히 대체할 만한 고성능 엔진이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1970년대 후반 보잉은 제트엔진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연료효율 문제가 향후 민간 여객기 시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이패스 비율을 높인 신형 터보팬 엔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적절하게 등장한 엔진이 바로 CFM56 제품이다. 1960년대 말부터 개발이 시작된 CFM56 터보팬 엔진은 프랑스 스네크마(SNECMA)에서 여객기 엔진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야심차게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민간 여객기에 탑재된 엔진은 주로 군용기 엔진을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707 여객기에 탑재한 JT3D 엔진은 F-100 전투기와 B-52 폭격기에 탑재하는 J57 엔진을 개조한 엔진이다. 그리고 후속으로 등장한 JT8D 엔진도 A-4, A-6 공격기에 탑재하는 J52 엔진을 개조한 것이다. 이처럼 군용기 엔진을 개조한 민간 여객기 엔진은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소음과 연료효율 측면에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한 프랑스 스네크마는 처음부터 민간 여객기에 탑재할 고성능 터보팬 엔진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간 여객기에 탑재할 대형 엔진을 개발한다는 것은 엔진 전문업체로서는 큰 도박이었고 위험 또한 매우 크다. 따라서 공동으로 개발할 파트너를 물색했다.

당시 P&W는 JT8D 엔진의 한계를 스스로 알고 있었다. 다만 707 이후 민간 여객기 엔진 시장을 독점했던 터라 신형 엔진 개발을 서두르지 않았고 개발을 하더라도 파트너가 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할 생각이었다. 제트엔진 분야의 경쟁 업체인 영국의 롤스로이스(Rolls-Royce)는 영국 경제의 몰락으로 경영위기가 발생했고 미국의 록히드에서 야심차게 개발한 L-1011 트라이스타(TriStar)에 탑재할 RB.211 엔진을 제때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스네크마는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을 사실상 유일한 공동개발 파트너로 염두에 두고 협상을 시작했다.

P&W와 더불어 미국의 양대 대형 엔진 업체인 GE는 1950년대 이후 냉전 시대에 주로 군용기 엔진사업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는 민간 여객기에 비해 군용기 사업의 규모가 크고 엔진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빨리 회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GE는 미 공군의 C-5 초대형 수송기 사업에 필요한 TF39 엔진을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민간 여객기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미 공군의 C-5 사업에서 탈락한 보잉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보잉 747 점보 여객기를 개발했고 여기에 TF39 엔진을 개량한 CF6 엔진을 GE에서 개발했다.

이를 계기로 GE는 점차 성장하는 민간 여객기 엔진 사업에 눈을 뜨게 됐고 시장에서 요구하는 10톤급 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에 프랑스의 스네크마에서 협력을 제안하면서 두 회사는 몇 차례의 협상을 거쳐 1971년 파리에어쇼에서 만나 CFM56 엔진의 공동개발을 결정했다.


 
<GE CF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