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군용 헬기, 패러다임 바뀐다

군용 헬기의 패러다임이 조만간 변화할 조짐이다. 최근 전 세계에서 개발 중인 차기 군용 헬기들이 80여 년간을 이어온 전통적인 헬기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 개발되는 헬기들이 복합형과 전환형 방식으로 개발되면서 속도와 항속거리 성능이 기존 헬기를 크게 뛰어넘고 있다. 1942년 세계 최초의 양산형 헬기인 R-4가 등장한 이후 세계 헬기 개발의 주류가 일대 변혁을 앞둔 셈이다.
 
변혁의 시작, 미국의 미래수직이착륙기 사업
지난해 12월 5일, 미 육군이 추진해 오던 ‘미래수직이착륙기(Future Vertical Lift, FLV)’ 사업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 FLV 사업을 구성하는 2개 사업 중 하나인 ‘미래장거리강습헬기(FLRAA)’ 사업에서 벨 텍스트론의 V-280 밸러(Valor)가 시코르스키의 디파이언트 X(Defiant X)를 제치고 최종 기종으로 선정된 것이다. 

특히 선정된 V-280은 향후 미 육군의 UH-60 블랙호크를 대체할 계획으로, 생산 대수만 3천여 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40년 이상 기동헬기의 왕좌를 유지해 온 블랙호크의 시대가 저무는 것과 동시에 군용 헬기의 주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데이터 분석기관인 시리움(Cirium)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전투용 헬기 전력은 총 2만여 대로, 이 중 UH-60 계열이 가장 많은 3,900여 대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전투용 헬기 5대 중 1대가 UH-60 계열 헬기인 셈이다. 전 세계 항공산업을 이끄는 미국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이번 V-280 선정이 세계 군용 헬기 시장에 미칠 영향력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Photo : Bell Textron

특히 V-280이 향후 군용 헬기의 패러다임을 바꿀 가장 큰 요소는 속도다. 실제로 미 육군이 FLRAA 사업을 추진하면서 목표로 설정한 속도는 최대 520km/h. 이에 대해 V-280은 시험비행에서 565km/h를 기록해 미 육군의 요구성능을 넘어섰다. 최대속도가 294km/h인 블랙호크와 비교하면 2배에 가까운 빠른 속도다.

이러한 빠른 속도는 고정익기와 회전익기 모드 사이를 전환할 수 있는 틸트로터 방식을 적용한 덕분이다. V-22와 같은 방식의 V-280에는 고정익기와 같은 주날개와 주날개 끝에 2개의 큰 프로펠러를 갖추고 있다. 이 프로펠러의 방향을 이착륙과 제자리비행에서는 헬기처럼 위로 향하게 하고, 빠른 속도로 비행할 때는 터보프롭 항공기처럼 앞으로 향하도록 한다. 헬기의 수직이착륙 능력과 고정익기의 빠른 속도 모두 잡았다.

전투반경도 기존 군용 헬기를 월등히 앞선다. 미 육군이 목표로 설정한 전투반경은 560km. 이에 대해서도 V-280은 설정 목표를 뛰어넘은 930~1,480km의 전투반경을 자랑한다. 전투반경이 590km인 블랙호크와 비교하면 최대 2배가 넘는 거리다. 이 외에도 최대이륙중량도 블랙호크가 9,979kg인 데 비해 V-280은 약 4,000kg이 더 많은 14,000kg이다.

미 육군은 이러한 FLRAA에 대해 “미래 전장을 지배하기 위해 혁신적 속도와 항속거리를 갖추기 위한 미 육군 항공대의 전략적 전환점을 상징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기존 기동헬기에 비해 더 빨라진 속도와 더 길어진 전투반경 등 기존 블랙호크의 성능을 압도적으로 앞서는 V-280의 성능은 향후 전 세계 군용 헬기의 패러다임 변화는 물론 군용 헬기 시장의 판도까지 바꿀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 차세대 중형 다목적 헬기 개발에 착수
유럽도 미래 전장 환경에 대비한 차세대 중형 다목적 헬기 개발에 착수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NATO)에 따르면 2035년부터 2040년은 NH90, AW101 등 유럽에서 운용하는 중형헬기의 수명주기가 끝나는 시기로, 이들 중형헬기를 교체하려면 최소 1,000여 대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에서 중형 다목적 헬기는 화물 및 병력 수송, 의무후송, 탐색구조, 대잠전 등 광범위한 전술적 작전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유럽 국가들이 추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차세대 회전익 능력(Next Generation Rotorcraft Capacity, NGRC)’이라는 다국적 프로그램이다.

지난 2020년,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와 영국 등 5개 국가의 의향서 서명으로 시작된 NGRC 프로그램은 지난해 6월 네덜란드의 합류와 함께 공식 출범했다. 지난 1월 참관국으로 참여한 캐나다는 오는 3월 NGRC 프로그램에 본격적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특히 이들 국가 모두 나토 회원국으로, 협력체 구성을 통해 미국의 차세대 헬기 시장 선점에 대응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아울러 공동 설계한 헬기를 배치해 동맹국 간 상호운용성도 높인다는 계획이다.


Image : Airbus

관건은 속도다. 에어버스 헬리콥터스(이하 에어버스)의 마티유 루보 수석부사장은 “NGRC의 최우선 목표는 속도”라며 “기존 헬기 설계를 배제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업계에서는 NGRC가 에어버스의 레이서(Racer) 고속헬기를 기반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실제로 에어버스가 지난해 6월 NGRC의 설계 담당 업체로 선정됐으며, 비슷한 시기 유럽 국가에 레이서 실증기의 군용 사양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올해 첫 비행이 예정된 레이서는 유럽연합(EU)의 ‘클린 스카이(Clean Sky 2)’ 프로그램에 따라 고속, 저소음 성능 등을 갖춘 친환경 헬기 중인 기종이다. 에어버스가 앞서 개발한 기술 시연기인 X3를 기반으로 공기역학적 구성을 개선하고,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도록 개발될 예정이다.
 
러시아, 차세대 고속공격헬기 구상
세계 2위 규모의 공격헬기를 보유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차세대 고속헬기 시장에서 서방에 도전하기 위한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201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군사기술포럼인 ‘아미 2017(Army 2017)’에서 러시아 헬리콥터스와 미래 공격헬기를 개발하는 ‘고속 전투헬기 구상(Perspective High-speed Combat Helicopter)’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새로운 메인로터를 장착한 고속 전투헬기의 외관을 결정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최대 시속 500km 이상으로 비행할 고속헬기 개발 프로그램에는 밀과 카모프가 경쟁했으며, 밀이 제안한 메인로터-푸셔 프로펠러 방식이 채택됐다. 특히 당시 카모프가 제안한 설계가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최고 700km/h를 목표로 개발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 2018년 유출된 고속헬기 설계에 따르면, 새로운 헬기에는 적외선 방출억제 시스템과 내부무장창을 갖춘 스텔스 설계가 적용돼 있었다.


Photo : Russian Helicopters
 
중국, 10년 내 고속헬기 공개 목표
중국은 “10년 내 고속은 세계 헬기의 표준이 될 것”이라며 헬기 최고속도인 시속 300km를 뛰어넘는 데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의 주력 공격헬기 Z-10의 수석 설계자인 우 시밍(Wu Ximing)은 최근 중국 헬기 제작사들이 동축반전 헬기와 ‘혁신적 디자인’을 갖춘 헬기의 시험비행을 수행하는 데 대해 “10년 내 중국인민해방군이 새로운 고속헬기 설계를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도 지난 2021년 중국이 고속헬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디파이언트 X와 유사한 형태의 동축반전로터, 스텔스 기능을 갖추고 400km/h로 비행할 수 있는 헬기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중국 정부는 조기경보, 정찰, 통신, 전자전 등 임무에 투입할 동축반전 헬기 설계를 승인했다.
 
정부, 한국형 차세대 기동헬기 개발 추진
이처럼 차세대 헬기 개발이 세계적인 추세인 가운데 우리나라는 차세대 기동헬기 도입을 이미 공식화했다. 지난 2020년 12월 15일, 방위사업청은 제132회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열고 UH-60 기본기의 수명이 다하면 차세대 기동헬기로 전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중형기동헬기 전력 중장기 발전 방향(안)’을 심의·의결했다. 이와 함께 차세대 기동헬기 개발을 위한 핵심기술을 미리 확보할 수 있도록 <항공산업발전 기본계획 2021~2030>에도 반영하고, 지난해 12월에는 방위사업청 및 출연기관을 중심으로 차세대 기동헬기 개발과 관련한 국방핵심기술 연구개발과제도 협약해 개발을 진행 중이다.

현재 협약에 따른 연구개발과제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주관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세부 연구과제는 고속 복합 회전익기용 기체형상 최적설계 기술과 플라이-바이-와이어(FBW) 방식의 자동비행조종시스템 설계 기술, 주로터 시스템 설계·제작 기술, 그리고 가변피치 푸셔 설계 기술 등 총 4건이다. 이 중 자동비행조종시스템 설계기술과 가변피치 푸셔 설계기술은 2025년 6월까지, 나머지 기술은 2026년까지 개발을 모두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사실 KAI는 지난 2021년에 이미 차세대 기동헬기 형상을 공개한 바 있다. 10월에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 2021’에서 회전익 사업 비전을 발표하던 중 차세대 기동헬기 형상을 공개했다. 당시 공개한 형상은 동축반전 로터시스템과 푸셔 프로펠러를 갖춘 복합형 헬기였다. 아울러 군·민수용 형상을 함께 공개해 향후 군수용뿐만 아니라 민수용으로도 활용할 구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구개발과제와 KAI가 공개한 형상이 같은 복합형 헬기인 것을 보면, 향후 차세대 기동헬기는 복합형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방위사업청이 주관해 열린 “헬기 유·무인복합체계 및 헬기전력 발전방안” 세미나에서 지정토론에 참석한 군, 연구기관, 업체 관계자들도 “미 육군이 향후 운용할 기동헬기로 틸트로터기를 선정했지만,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과 우리 군의 작전개념, 비용효율성, 호환성, 수출 가능성 등을 고려해 형상을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육군뿐만 아니라 공군·해군·해병대와 정부 및 민간 기관 등이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형상이 더 경제적”이라면서 “향후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때도 미국과 같은 틸트로터 형상으로는 경쟁이 어렵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Image : KAI
 
국가전략사업으로 육성 필요
무엇보다 이러한 차세대 헬기 개발 추세는 국내 항공업계에 큰 과제로 보인다. 향후 세계 헬기 시장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전망인 만큼 항공산업 육성과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 중인 국내 항공업계로서는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부도 오는 2027년까지 세계 4대 방산 수출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방산 수출을 전략화한다고 한 만큼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에 국내 항공산업이 편승할 수 있도록 차세대 헬기 개발을 국가전략사업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에 대해 항공업계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특히 정부의 일관된 정책 추진과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실제로 T-50의 파생형 수출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폴란드가 48대의 FA-50을 도입하는 약 3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다. 이를 통해 T-50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파생형으로 개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KAI 관계자는 “차세대 기동헬기도 정부의 지속적인 정책적·재정적 지원이 이뤄진다면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초석을 다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한 업계에서는 빠른 의사 결정도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기존 획득사업 중 정치적·경제적 논쟁으로 의사 결정이 늦어지면서 개발 일정이 촉박하게 진행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논란으로 의사 결정이 늦어졌던 KF-X 사업도 2002년 장기소요가 결정된 이후 첫 시제기가 출고되기까지 꼬박 20년이 걸렸다. 개발 완료 시점인 2026년을 기준으로 따지면 소요 결정에서 개발 완료까지 26년이 걸리는 셈이다.

핵심기술 개발을 위해서도 빠른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 특히 핵심기술은 개발 난이도가 높아 국내 개발을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의사 결정이 늦어지면서 국내 개발 기회를 놓치고 결국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곧 해외 의존도를 줄이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KAI 관계자는 “차세대 기동헬기 사업은 사업 특성과 규모를 볼 때 제2의 KF-X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그런 만큼 정부 부처와 산학연 관련 기관의 정책적 합의와 선제적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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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퍼투혼 2023-10-13 16:50:14 0

엄청나다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