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17) Boeing 707(Part.2)

제트여객기의 계보 (17)
Boeing 707(Part.2)
 

 
호화여객기 377 흥행 실패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세계 최초로 등장한 D.H. 코메트 제트여객기가 기술적인 결함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추락 사고를 일으키자 제트여객기 자체가 승객의 불신을 얻게 되었다. 승객들이 제트여객기에 탑승하기를 꺼려하자 항공사 역시 기존의 여객기를 개량하여 계속 사용하는 방향으로 기종을 운영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글러스 DC-7 이나 록히드 슈퍼 콘스텔레이션 같은 대형 왕복엔진여객기가 오랫동안 장거리 노선에서 활약했다.

여객기 시장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보잉의 입장에서는 왕복엔진여객기이든 제트여객기이든 기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진입해야만 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 보잉은 많은 자금이 필요한 새로운 기종을 개발하는 대신 기존의 대형 폭격기를 개조하여 여객기로 개발하고자 했다. 이러한 방침은 이전부터 보잉이 선호하는 방법으로 보잉 XB-15 대형 폭격기의 주익을 활용하여 개발한 보잉 314 클리퍼, 보잉 B-17 폭격기를 개조하여 개발한 보잉 307 스트라토 라이너, 보잉 B-29 폭격기를 개조한 보잉 377 스트라토 크루저와 같은 대형 여객기를 연이어 개발한 실적이 있었다.

여객기 시장에 경험이 많지 않았던 보잉의 경영진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대형 기종이니 만큼 욕심을 내어 개인 침실을 갖춘 매우 호화로운 보잉 377 여객기를 내놓아 미국 국내의 여객철도와 경쟁하고자 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한 1940년대 말에 미국의 여행객들은 요금이 비싼 국내 항공노선을 선호하지 않았고 대서양 횡단노선의 경우에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고급 여객선을 주로 이용했던 시절이었기에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갖춘 보잉 377 여객기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의 왕복엔진 여객기는 비행 중에 진동이 심했기 때문에 승객들은 장시간 동안 소음과 진동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보잉 377 여객기는 겨우 56대 판매실적에 그치면서 실패작으로 끝났다. 이에 따라 보잉의 경영진은 당분간 군수 사업에 집중하면서 프로젝트 367 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여객기 개발을 다각도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707 개발 성공
냉전 중 미 공군 B-47 제트폭격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독일에서 입수한 후퇴익 기술은 당시에 비밀로 취급할 정도의 최신기술로 항공기 개발기술에 혁신을 불러왔다. 이는 B-47 제트 폭격기가 비행시험을 할 때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뒤에서 제트 전투기가 따라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군수업체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던 시기에 보잉을 이끌던 빌 알렌 사장은 회사가 발전하려면 일단 폭격기 사업과 같은 군수사업을 진행하면서 기반은 유지하고 이어서 민간 여객기 사업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빌 알렌 사장은 실제로 제트여객기에 탑승하는 승객의 반응이 궁금했고 이를 체험하고자 자신이 직접 B-47 제트 폭격기에 탑승했다. 비록 폭격기이긴 하나, 실제로 제트기에 탑승한 빌 알렌 사장은 이전에 탑승한 시끄러운 왕복엔진 여객기와 비교할 때 너무나 조용한 소음 수준에 놀랐으며 특히 진동이 거의 없이 빠르게 내달리는 속도 성능에 크게 만족했다.

빌 알렌 사장은 착륙한 다음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제트여객기의 개발을 시작하도록 했다. 다만 보잉 307 이나 377 기종처럼 폭격기를 간단하게 개조한 여객기로는 승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1,600만 달러라는 거액을 투자하여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는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보잉은 군수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여객기를 개발하는 방안을 연구했고 다양한 모델에 풍동시험을 실시해 검증한 결과 보잉 367-80 시제기를 거쳐 전혀 새로운 형태를 가진 보잉 707 기종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빌 알렌 사장은 제트여객기 사업을 앞에 놓고 큰 도박을 결정했고 과감하게 추진한 결과 707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보잉 여객기가 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 또 다른 인물로는 초대 미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칼 스파츠 대장과 후안 트립 팬아메리칸항공(이하 팬암) 사장을 들 수 있다. 칼 스파츠 참모총장은 2차 대전 당시 유럽지역 공군 지휘관을 역임한 인물로 전략폭격작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냉전이 시작되자 B-47 제트폭격기 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보잉 707 여객기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심이 가득한 인물이었던 팬암의 후안 트립 회장은 다른 항공사가 제트여객기 선택을 주저할 때 과감하게 보잉 707 여객기를 최초로 주문하여 판로를 열어주는데 기여했다.

제트 폭격기 기술을 집약하여 개발한 보잉 707 여객기는 35도 후퇴각을 가진 주익을 채택하여 고속으로 비행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주익에 후퇴각을 적용하면 고속비행이 가능하지만 공기가 뒤쪽 방향이 아닌 바깥쪽으로 흘러가면서 날개 표면에서 분리되어 소용돌이가 생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주익의 끝부분에서 진동이 발생하면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거나 날개가 휘어지는 경우가 생겼다. 이러한 현상은 제트 전투기의 경우에도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주익 끝부분에 외부 연료탱크를 설치하여 진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대형 폭격기나 여객기의 경우에는 외부 연료탱크를 설치하는 방법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보잉 기술진은 B-47 폭격기를 개발하면서 공기의 흐름이 불규칙하여 진동이 발생할 경우 자동으로 비행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장치도 함께 개발했고 이러한 설계기술 덕분에 보잉 707 여객기는 비행성능이 뛰어난 기종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707 여객기에는 제트 엔진의 충분한 파워를 활용하는 공기압축기가 설치되어 엔진에서 발생하는 높은 압력의 공기로 영하 50도의 높은 고도에서도 따뜻한 실내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트엔진을 사용하면서 비행속도가 높아진 만큼 착륙거리가 길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보잉 707은 여객기 세계 최초로 역추진 장치를 설치하여 착륙 안전성능을 높였다.

보잉 707 여객기에 탑재한 프랫 앤 휘트니의 JT3C 엔진은 제트 전투기에 적용하여 성능이 입증된 J57 터보제트엔진을 민간 여객기 탑재용으로 개량한 엔진으로 불규칙한 진동현상이나 시동 꺼짐이 없는 우수한 엔진이며 이러한 안정적인 성능은 보잉 707 기종이 추락사고로 신뢰성이 떨어진 제트여객기 시장을 다시 회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지니고 등장한 보잉 707 여객기는 1958년 10월부터 팬암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의 항공사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하면서 크게 성공했고 1979년에 생산을 마무리할 때까지 무려 1,010대라는 놀라운 판매실적을 거두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항공사는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할 수 있는 기종을 강력하게 희망했는데 최초로 등장한 보잉 707-120 기종은 항속거리가 짧아 한 번에 대서양을 횡단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했다. 보잉 707-120 기종은 이착륙할 때 물을 엔진에 분사하여 잠시 동안 추력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하여도 기온이 높고 해발고도가 높은 일부 공항에서는 이착륙하기 어렵다는 항공사 의견을 반영하여 엔진 성능을 높인 P&W JT4A-3 엔진으로 개량한 보잉 707-220 기종을 내놓았으나 기대와 달리 브라니프 항공에 불과 4대를 판매하는데 그쳤다.


 
성능 높인 개량형 계속 출시
보잉 707 시리즈의 기반을 구축한 보잉 707-320 인터콘티넨탈 기종은 보잉 707-220 기체를 기본으로 개량형 엔진을 탑재하고 연료탑재량을 확대하여 항속거리를 30% 높인 개량형이다. 보잉 707-320 인터콘티넨탈 기종의 최초 고객은 팬암으로 1959년 8월부터 상업운항을 시작했는데 긴 항속거리를 활용하여 대서양 무착륙 횡단노선을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알래스카 앵커리지 또는 하와이를 경유한다면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추고 있어 장거리 국제선의 표준 기종으로 큰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1979년까지 계속 생산되었다. 나중에 등장한 보잉 707-320B 기종은 기존 보잉 707-320 기종에 신형 JT3D 터보팬 엔진을 탑재한 기종으로 연비가 향상되어 같은 연료량으로 더 먼 거리까지 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보잉 707-320C 기종은 기체를 화물기로 개조한 기종이다.

보잉 707-420 기종은 보잉 707-320 기체에 영국제 롤스로이스 콘웨이 엔진을 탑재한 파생형으로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에서 처음 주문한 기종인데 D.H. 코메트 여객기를 먼저 개발하고도 미국 보잉에게 제트여객기의 선두 자리를 내준 영국의 국적 항공사인 BOAC 항공사가 자존심 차원에서 영국제 엔진을 탑재한 보잉 707-420 기종을 구입하여 대서양 횡단노선에 투입했다.

보잉 707 여객기의 독특한 파생형이라고 할 수 있는 보잉 720 기종은 유나이티드 항공의 주문을 받아 개발을 시작한 기종이다. 1950년대 당시에 미국의 국제선 노선을 독점하고 있던 팬암에 대항하고자 유나이티드 항공은 국내선에 투입할 수 있는 제트여객기 개발을 보잉에 요구했다. 보잉은 보잉 707 개발에 착수하면서 시제기 성격으로 제작한 보잉 707-020 기체를 활용하여 국내선 요구조건에 맞추어 동체의 길이와 연료탑재량을 줄인 보잉 720 여객기를 개발하여 1959년 11월에 초도비행에 성공했으며 1960년 7월부터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보잉은 국제선 노선으로 인기가 높은 보잉 707-320 기종과 더불어 국내선 용도로 개발한 보잉 720 기종을 내세워 큰 성공을 거두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4대의 엔진을 탑재한 보잉 720 기종은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으며 불과 154대가 판매됐다. 보잉 720B 기종은 보잉 707-320B 기종처럼 탑재엔진을 신형 JT3D 터보팬 엔진으로 개량한 모델이다. 국내선 용도로 보잉 720 기종을 개발했으나 판매에 실패한 보잉은 엔진을 4대에서 3대로 줄인 보잉 727 기종을 새롭게 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제기 성격이 강한 보잉 367-80 기종으로 시작한 보잉 707 시리즈는 민항기이면서도 군용기의 역사를 공유하는 독특한 기종이었다. 미 공군은 보잉 367-80 시제기를 개량하여 곧바로 KC-135 공중급유기로 803대를 도입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보잉 707 보다 기체의 크기가 작고 동체 내부가 좁아 보잉 707 기종과는 다르기에 보잉 내부에서는 보잉 717 이라는 명칭으로 구분하고 있다.



40톤의 화물을 싣고 장거리 고속 비행이 가능한 보잉 KC-135 기종에 만족한 미 공군은 보잉 707 여객기를 별도로 구입하여 대통령 전용기인 VC-137 "에어포스 원"으로 사용했으며 이밖에도 보잉 707 여객기를 기반으로 E-3 AWACS 항공통제기, E-6 통신중계기, E-8 JSTARS 지상작전통제기를 개발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보잉 707 기종의 생산이 종료된 이후에도 계속 필요하자 민간 항공사에서 사용하던 중고 기체를 C-18 이라는 명칭으로 구입하여 현재까지 특수한 임무에 투입하고 있다.



캐나다, 이탈리아, 브라질, 이란 공군은 민항기 버전인 707 여객기를 구입하여 공중급유기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공군의 경우에는 E-3 AWACS 기종을 구입할 때 KC-135 공중급유기를 함께 구입하려고 했으나 이미 생산이 끝난 관계로 E-3 기체를 기본으로 공중급유기로 개조하여 생산한 KE-3 기종을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