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20) Douglas DC-8 (Pt.2)

제트 여객기의 계보 (20)
Douglas DC-8 (Pt.2)

 
더글러스, 보잉에 공중급유기사업 뺏겨
미 공군이 1954년 5월에 신형 공중급유기를 구매한다고 공고한지 불과 두 달이 지난 같은 해 7월에 보잉 367-80 시제기가 초도비행에 성공했고, 이어서 9월에 전격적으로 보잉 KC-135 공중급유기 구매 계약을 체결한 것은 더글러스 항공사의 창업주인 도날드 윌리스 더글러스 사장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실 1930년대 이후 보잉은 전투기와 폭격기와 같은 군수사업에 주력했고 특히 2차대전 기간 중에 B-17 폭격기와 B-29 폭격기를 대량 생산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형태의 여객기로 1933년에 선보인 보잉 247 여객기는 기대와 달리 불과 75대만 판매되는 저조한 실적을 남겼다. 그리고 보잉 B-17 폭격기를 개조하여 개발한 보잉 307 여객기는 여압식 캐빈을 갖춘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겨우 10대만 판매될 정도로 당시 보잉의 민간 여객기 사업은 매우 저조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반면에 더글러스는 당시 미국 최고의 여객기 제작사로서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DC-3 시리즈는 군용 수송기를 포함하여 약 1만 대 이상이 생산됐고 대형 여객기인 DC-4 시리즈 역시 1,200대 이상 생산됐다. 그 이후에도 DC-4 여객기를 개량한 DC-6 여객기가 700대 이상이 판매되는 등 더글러스 여객기 시리즈는 미국 여객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매실적을 감안할 때 여객기를 개조하여 개발하는 공중급유기 경쟁에서 보잉에게 패배한 사실 그 자체는 도날드 더글러스 회장에게 충격이었고 인정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되돌아보면 미 공군 공중급유기사업에서 승리한 보잉은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면서 노력한 결실을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잉이 비록 전쟁 기간 중에 폭격기와 같은 군용기 사업에 노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여객기 사업이 다시 회복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꾸준히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잉 B-29 폭격기의 우수한 비행성능을 기반한 보잉 367 수송기를 개발했는데 왕복엔진을 사용하면서도 성층권 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는 비행성능은 당시로서 매우 획기적인 성능이었다. 2차 대전 기간에 어려운 과정을 거쳐 완성한 B-29 폭격기는 왕복엔진 항공기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기종으로 개발을 맡은 보잉의 설계팀은 엄청난 고생을 겪었지만 한편으로 보잉의 항공기 기술능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

성층권 고도에서 안정적으로 장거리 비행을 할 수 있는 항공기 설계기술은 장차 등장할 제트 여객기 개발에 꼭 필요한 핵심기술로서 영하 50도의 매서운 조건에서 항공기의 각종 기계장치가 얼어붙지 않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객실 내부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성능은 당시 기술수준으로 볼 때 첨단에 속했다.

보잉은 B-29 폭격기 개발과정에서 이러한 기술을 완성했고 이를 활용하여 2차대전 기간 중인 1944년 11월에 성층권에서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C-97 수송기(모델 367)를 개발하여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면서 기대했던 대량 생산이 취소되고 불과 77대만 완성하고 생산을 중지했지만 10톤 이상의 화물을 싣고 7천km를 비행할 수 있는 비행성능에 주목한 미 공군은 이후 B-47 제트 폭격기를 개발하여 실전에 배치하면서 항속성능이 부족한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공중급유기로 C-97 수송기를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등장한 보잉 KC-97 공중급유기는 5년 만에 무려 800대 이상을 생산하여 납품하는데 이때 확보한 자금으로 보잉의 윌리엄 맥퍼슨 알렌 사장은 제트 여객기 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이러한 결정은 매우 시기적절하고 과감한 결단이었으며 나중에 보잉과 더글러스의 사운을 가르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기도 했다.
 

DC-7의 개량형인 DC-8 개발 돌입
보잉은 C-97 수송기와 KC-97 공중급유기 사업에 집중하는 시기에도 여객기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으며 군용 C-97 수송기를 민간 여객기로 개조하여 내놓은 보잉 377 여객기는 호화스러운 인테리어 장식을 갖춘 장거리 여객기로 주목을 받았지만 기대와 달리 불과 56대만 팔리는 저조한 실적을 기록했다.

1950년대 초에 보잉에서 과감하게 개발을 시작한 모델 367-80 시제기는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모델 367 (C-97 수송기)의 연장선에서 연구를 거듭하여 탄생한 기종으로 민간 여객기인 동시에 미 공군 공중급유기 사업을 강하게 의식하고 개발한 기종이었다.

보잉의 입장에서는 비록 민간 여객기 사업에서는 더글러스와 비교할 때 100분의 1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강점인 군용기 사업을 기반으로 민간 여객기사업 분야로 확대할 수 있는 제트 수송기/공중급유기를 개발했고 KC-97 공중급유기를 납품하면서 설계기술을 완전하게 확보했기에 1954년에 미 공군 공중급유기 사업에서 승리한 것은 우연이 아닌 당연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숨은 노력을 잘 알지 못했던 더글러스의 입장에서 무려 800대 규모의 공중급유기 사업을 놓친 것이 큰 충격이었다. 도날드 더글러스 사장은 공중급유기 기종 결정에 대해 워싱턴 당국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1950년대 초반에 더글러스에서 생산하던 주력 기종은 더글러스 DC-7 여객기였다. 제트엔진이 아닌 왕복엔진을 탑재하고 있었지만 고도 28,000피트에서 650km/h 속도로 비행이 가능한 DC-7 여객기는 최대 95명의 승객을 태우고 대서양 무착륙 횡단이 가능한 성능을 가지고 있어 당시 인기를 모았는데 D.H. 코메트 제트 여객기가 출현하는 시점에서도 계속하여 인기가 있었으며 1958년까지 343대가 판매되는 실적을 기록했다. 더글러스 기술팀은 구식이 되어버린 왕복엔진을 대신하여 새로운 엔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D.H. 코메트의 추락사고가 발생하자 경쟁사인 록히드와 콘베어의 경우 연료효율이 높고 보다 안전한 터보프롭 엔진 여객기를 개발하는 방향을 모색했다.

1952년 중반에 더글러스 기술팀은 비밀리에 제트 여객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연구를 거듭한 결과 1953년 중반에 프랫 앤 휘트니의 JT3C 터보제트 엔진과 30도 후퇴각을 가진 주익을 결합한 DC-8 기종의 기본설계를 완성했다. 새로운 제트 여객기는 기본적으로 DC-7 여객기를 제트엔진으로 개량한다는 개념으로 개발했는데 2+3열 좌석에 80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3~4 천 마일을 비행하도록 설계했다.

비록 미 공군 공중급유기 경쟁에서 실패했지만 일종의 오기가 발동한 도날드 더글러스 사장은 그대로 포기하는 대신 계속 DC-8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결심했고 항공사와 공동으로 컨설팅을 진행하면서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됐다. 항공사는 일단 11 피트(3.35m) 직경을 가진 동체를 넓혀 줄 것을 요구하여 15 인치(0.38m)를 확장하고 3+3열 좌석 배열이 가능하도록 변경했다. 그리고 동체를 확장하면서 주익과 미익도 크기가 증가했다. 더글러스 DC-8 여객기는 1955년 7월에 일반에 공개됐으며 1957년 12월에 초도비행을 실시하고 1959년부터 상업운항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경쟁사인 보잉보다 약간 늦게 제트 여객기를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보잉 707 여객기가 판매에 호조를 보이면서 납품대기가 길어졌고 항공사는 새로 개발하는 더글러스 DC-8 기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보잉 707과 치열한 경쟁
1950년대 후반에 민간 여객기 시장은 그야말로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했는데 왕복엔진을 대신하여 등장한 터보프롭 엔진을 채택한 40~60인승 빅커스 바이카운트(Vickers Viscount) 여객기는 왕복엔진 대비 조용하고 빠르면서도 안락한 성능을 내세워 인기를 끌었다. 한편 90인승 브리스톨 브리타니아(Bristol Britannia) 여객기는 더글러스 DC-7급 시장의 직접적인 경쟁자로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록히드 역시 80~100인승 엘렉트라(Electra) 터보프롭 여객기를 중단거리 노선용을 내놓았다.

한편 D.H. 코메트 제트 여객기의 운항이 잠시 중단된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90인승 슈드 카라벨 제트 여객기가 등장하면서 여객기 시장은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이러한 와중에 당시 선두를 달리던 보잉 707 여객기는 개발을 마무리하고 1958년부터 항공사에 납품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항공사의 입장에서는 당장에 사용할 제트 여객기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더글러스 역시 DC-8 제트 여객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55년 10월에 팬암항공은 20대의 보잉 707 여객기와 더불어 25대의 더글러스 DC-8 여객기를 주문했는데 후안 트립 회장은 처음부터 보잉 707 여객기의 개발을 적극 지지했지만 생산수량이 부족했고 플랜B 역시 필요했기 때문에 경쟁기종인 DC-8 여객기를 같이 주문했다. 팬암에서 보잉 707 및 더글러스 DC-8 여객기를 주문하자 다른 항공사들도 앞을 다투어 제트 여객기를 주문했는데 에어프랑스, 아메리칸항공, 브라니프항공, 콘티넨탈항공과 사베나 항공은 보잉 707 기종을 선택했고, 유나이티드항공, 내셔널항공, KLM, 이스턴항공, 일본항공과 SAS항공은 DC-8 기종을 선택했다.



1956년에는 에어인디아, BOAC, 루프트한자항공, 콴타스항공, TWA항공이 보잉 707 기종을 선택했고 델타항공, 스위스항공, TAI, 트랜스캐나다, UAT항공은 DC-8 기종을 선택했는데, 보잉과 더글러스는 1958년까지 각각 150대의 보잉 707 여객기와 133대의 DC-8 여객기를 판매해 보잉이 약간 앞서는 상황이었다.

더글러스 DC-8-10 여객기의 1호기는 1958년 4월 9일에 롱비치 공장에서 출고된 지 불과 한 달이 지난 5월 30일에 2시간 7분 동안 초도비행에 성공했고 비행시험을 거쳐 1959년 8월에 FAA 인증을 취득했다. 이미 1958년 8월부터 보잉 707 여객기의 납품이 시작된 상황에서 더글러스 기술팀은 몇 가지 개량을 시도했는데 효과가 낮은 동체의 에어 브레이크 대신 엔진에 역추진 장치를 추가했고 저속에서 양력특성을 개선하고자 주익 앞전에 슬롯을 추가했다. 이러한 개량작업으로 공기저항이 줄어들어 최대속도가 거의 음속에 접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61년 8월 21에 DC-8 여객기는 고도 41,000 피트 상공에서 하강하면서 16초간 마하 1.012라는 초음속 비행에 성공했다.
 
 
더글라스, 맥도넬과 합병
DC-8 여객기는 1959년 9월 18일부터 델타항공과 유나이티드항공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했으며, 더글러스 역시 안정적인 생산체제를 갖추고 1960년 3월부터는 매월 8대씩 생산하기 시작했다. 경쟁기종인 보잉 707 여객기가 다양한 크기의 동체를 가지고 있는 점과 달리 더글러스 DC-8 여객기는 하나의 모델만 보유하고 있었는데 중단거리 노선에 필요한 기종을 찾던 델타항공은 콘베어 880 여객기를 주문했고 유나이티드항공은 보잉 720 기종을 선택했다. 더구나 다른 항공사도 DC-8 여객기를 추가로 주문하지 않으면서 더글러스 DC-8 기종은 1962년에 26대를 판매하던 실적이 계속 감소하여 1964년에는 절반 수준인 14대까지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장거리 노선의 수요가 예상과 달리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고 항공사 입장에서는 장거리 노선에 투입할 대형 제트 여객기와 더불어 중단거리 노선에 투입할 중형 제트여객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간과한 더글러스 DC-8 여객기는 큰 사이즈만을 고집한 나머지 우수한 비행성능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다. 이러한 실책은 결국 급격한 판매 감소로 이어졌고 DC-8 여객기를 개발하면서 투입한 막대한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회사의 재무상황이 악화되면서 결국 1967년에 더글러스항공회사(Douglas Aircraft Company)는 맥도넬항공기(McDonnell Aircraft Corporation)에 인수되어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가 됐다.

더글러스 DC-8 여객기는 처음 등장한 DC-8-10 이후 DC-10-50 까지 동체의 길이가 150피트 6인치로 모두 같았으며, 한 번도 동체를 단축한 중단거리 모델을 개발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채, 엔진의 파워를 높여 더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고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도록 비행성능을 높이는 방향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슈퍼 60 시리즈’로 불리는 DC-8-60 여객기는 동체를 440인치 연장하여 260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초대형 여객기로 보잉 757 여객기에 버금가는 앞서가는 기종이었고, 보잉 747 여객기가 등장할 때까지 가장 큰 여객기로 1968년에 102대가 판매되는 실적을 기록했으며, 나중에는 화물기로 개조되어 장기간 운항을 계속했다.

DC-8-70 시리즈는 DC-8-61/-62/-63 기종이 노후화 되면서 연료효율이 낮은 구형 엔진을 대신하여 신형 CFM56-2 터보팬 엔진으로 교체한 기종으로 연비향상과 함께 소음도 감소해 화물기로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경쟁기종인 보잉 707 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등장했지만 발군의 비행성능과 함께 대형 기체로 주목을 받은 더글러스 DC-8 여객기는 시장의 요구사항을 외면한 나머지 결국 회사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보잉 707 여객기가 1,000대 이상 판매된 실적과 대조적으로 절반 수준인 556대가 판매됐으며 1972년에 생산이 종료됐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