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하늘을 지켰던 영웅들을 기억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나라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린 많은 영웅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순간에도 이 나라의 하늘과 땅, 바다에서 묵묵히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지금까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을 기리며, 특히 영공방위를 위해 몸 받쳤던 공군, 해군, 육군의 영웅들을 소개한다. 육군과 해군은 항공대에 한정해 각 군의 추천을 받았으며, 공군은 여러 인물들 중 가장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영웅으로 선정했다.


[공군] 故 김영환 준장(1921~1954)


김영환 장군 (사진: 공군)


빨간 마후라의 효시
매년 고등비행교육 수료식에는 공군참모총장이 새내기 조종사들 한 명 한 명에게 빨간 마후라를 직접 목에 걸어준다. 실습 및 기본비행교육 과정을 포함해 약 1년 8개월에 걸친 길고도 강도 높은 비행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예조종사로 다시 태어난 ‘보라매’들을 공군의 수장이 직접 챙기는 의식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바로 빨간 마후라다. 오늘날 공군조종사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빨간 마후라의 효시가 바로 6·25 전쟁에서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을 이끌었던 김영환 장군이다.

형과 함께 키운 조종사의 꿈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환 장군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은 다름 아닌 공군 초대 총참모장(현 참모총장 격 직책) 김정렬 장군이다. 특히 청년시절 일본 육군 항공대 조종사로 있었던 김정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조종사의 꿈을 동경하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일본 쓰다누마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조종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에는 일제 식민치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비행학교에서 조종교율을 받을 수 있었을 만큼 유복한 집안이었다. 쓰다누마 비행학교 졸업 후 김영환은 일본 관서대학 항공과에 진학해 비행공부를 계속했고 1944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유복한 환경에서 모자랄 것 없이 자랐지만 일본에 침탈당한 조국 안보에 기여하고자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군사영어학교는 한국에서 장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김영환은 육군 6연대(현 6사단의 전신) A중대장으로 보임돼 공군창군 주역 7인 중 가장 먼저 한국군 군복을 입었고, 곧 출중한 영어실력으로 미군정 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 대리에 보직됐다. 특히 정보국장 대리직을 수행하면서 얻은 다양한 정보를 통해 어떻게 항공부대 창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이는 후에 한국 국방경비대에 공군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육군과 해군만을 창군했던 미군정청을 설득해 공군을 창설하는 데에 밑거름이 됐다.


비행을 마치고 F-51D 머스탱 전투기 위에서 비행일지를 쓰는 김영환 장군 (사진: 공군)


공군 창설 및 성장의 중심에 서서
마침내 1948년 3월 미군정당국으로부터 조선경비대 경항공기부대 창설 승인이 떨어지자 김영환은 공군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5월 14일부 항공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1948년 육군 항공기지사령부로 전속되어 작전과장 겸 인사과장을 거쳐 1949년에는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 제5대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는데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가 이 때였다. 1951년 9월 공군이 강릉전진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그는 강릉전진기지사령부 부참모장으로 보임되어 공군의 고향과도 같은 강릉기지의 터를 닦았다. 특히 전쟁 초기 F-15D 전투기로 이루어진 공군비행단 참모장 시절에는 공군의 교육훈련 및 전투를 함께했던 미국의 바우트-원(Bout-One) 임무부대장 딘 헤스(Dean H. Hess) 소령과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담당했다.

김영환 장군이 공군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그가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직하던 1951년 9월의 일이었다. 1951년 7월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1군단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동부전선의 강릉기지(K-18)을 전진기지로 선정하고 한국 지상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을 위한 단독출격작전 준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강릉기지에서 단독출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김영환 대령은 1951년 10월 11일 08:55분 1편대를 이끌고 역사적인 공군 단독출격을 실시했다. 38일 동안 총 494소티를 출격해 많은 전과를 올린 강릉전진부대의 빛나는 성과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김영환 장군이 이끌었던 강릉전진기지에서의 단독작전은 대한민국 공군이 하나의 독립된 전투단위부대로 UN 공군의 일부 작전전역을 담당하여 최초로 실시한 작전으로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륙하는 F-51D. 미국의 원조로 근근이 항공전력을 유지하다가 불과 1년여 만인 1951년 10월 단독출격을 실시한 것은 대단한 쾌거였다. 김영환 장군은 그러한 역사적 성과의 중심에서 공군을 진두지휘했다. (사진: 공군)



김영환 장군과 빨간 마후라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서 단독출격을 이끌던 1951년 11월 김영환 대령은 공군본부로 출장을 가는 길에 당시 공군 총참모장이자 친형이었던 김정렬 소장의 자택에 잠시 들렀는데, 이때 형수인 이희재 여사가 입고 있던 붉은색 치마를 보고 평소 흠모하던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1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독일 육군항공대 에이스 리히트호펜을 떠올렸다. 그는 이희재 여사에게 빨간 치마 빛깔이 좋으니 마후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그 마후라를 목에 두르기 시작했다. 리히트호펜 스타일의 장교모와 장화를 즐겨 신던 그에게 빨간 마후라는 꽤 괜찮은 스타일링 아이템이었다.


1953년 8월 15일 휴전 직후 광복절 맞이 조종사환영대회에 참석한 김영환 장군. 제10전투비행단장 시절로 당시 그가 즐겨쓰던 리히트호펜 스타일의 장교모와 빨간 마후라가 눈에 띈다. (사진: 공군)



한편 김영환 장군은 1953년 2월 15일 전대급에서 비행단급으로 승격창설된 제10전투비행단의 초대 비행단장으로 보임됐다. 1953년은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전황이 소모전 양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던 때였다. 그만큼 항공기 및 조종사 손실이 많았는데, 특히 사고로 지상에 떨어진 조종사를 찾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영환 장군은 탐색구조 시 조종사가 눈에 잘 띄도록 하는 방안을 부단장이자 참모장이던 장지량 장군(당시 계급 대령)과 논의해 빨간 마후라를 조종사들의 목에 두르는 것으로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군 조종사들의 목에 빨간 마후라가 둘러지게 된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제1훈련비행단장 시절의 김영환 장군 (사진: 공군)



극적인 최후와 함께 전설이 되다
6·25 전쟁 기간 거둔 수많은 전공으로 김영환 장군은 충무무공훈장, 미국 비행 훈장, 대통령수장과 유엔종군기장, 미국 공로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으며 1954년 1월 28일 공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초대 10전투비행단장으로 재직하다가 휴전을 맞은 뒤 1953년 12월 15일부 사천기지의 제1훈련비행단장으로 영전한 김영환 장군은 이윽고 1954년 3월 5일 운명의 날을 맞는다. 강릉의 10전비 창설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F-51을 조종하여 사천기지를 이륙한 김영환 장군은 포항을 지나 동해안으로 비행하던 중 악천후를 만나 강릉 남쪽 묵호 동방 상공에서 실종되었다. 함께 비행하던 김두만 장군(당시 계급 대령)은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진 김영환 장군에게 계속 무전을 요청했으나 답이 없었고, 결국 김두만 장군 홀로 사천으로 회항하였다.

강릉기지에서는 1개월에 걸쳐 눈 덮인 대관령을 비롯한 그 일대의 산악지역과 해상을 세밀히 탐색했으나 그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김영환 장군은 창공에 품은 뜻을 더 이상 펴지 못한 채 아깝게도 34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죽음마저 극적이었던 김영환 장군은 불과 34세의 나이에 오늘날 세계적 수준의 항공력으로 성장한 우리 공군에 많은 유산을 남기고 전설적인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공군이 빠르게 제트화를 이룩하면서 F-51 머스탱 시대는 빠르게 막을 내렸지만 공군 발전의 초석을 다진 김영환 장군과 F-51 전투기는 불멸의 전설이 됐다. (사진: 공군)




[해군] 故 조경연 중령(1918~1991)

<3>
조경연 중령 (사진: 해군)


해군 항공대의 선각자
P-3C 오라이언 대잠초계기와 링스 대잠헬기로 대표되는 해군항공대는 여전히 전력강화에 적지 않은 숙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해군항공대 존재 자체는 한 청년장교가 없었다면 그 태동이 매우 늦어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위상에 걸 맞는 전력을 보유하는 데 더 많은 숙제를 떠안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 해군항공대의 선각자로 일컬어지는 조경연 중령이 그 주인공이다.

항공기에 대한 꿈을 키우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조경연은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특히 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한 진해 해원양성소 기관과에서 1936년 가변축전지를 고안하여 실용신안을 취득하는 등 성과를 내면서 조경연은 더욱 원대한 꿈을 꾸게 됐다. 조경연은 해원양성소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나무를 깎아 만든 동체에 오토바이 엔진과 손수 제작한 부품으로 항공기를 제작했다. 물론 이륙에는 실패했지만 당시 마을 주민들은 조경연을 ‘비행기를 만든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항공기 제작과 발명에 높은 열의를 보였던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해군 특별교육대에 자원입대했다. 중위로 임관한 그는 함정 전기사관으로 복무하면서 유엔군 항공기들을 볼 때마다 항공기 제작의 꿈을 계속 키웠다. 그러다 목포항에 추락해 방치되고 있던 미 육군의 AT-6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해군 항공대 태동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1951년 3월 13일 AT-6는 진해 해군공창으로 이송됐다.


개조 중인 해취호 (사진: 해군)


대한민국 최초의 수상항공기 해취호
우리나라 해군 항공대의 태동의 계기는 6·25 전쟁이었다. 해군은 6·25 전쟁 이전인 1948년에 이미 창설됐지만 공군에도 변변한 항공기 1대 없던 시절 해군 항공부대는 꿈도 꾸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이미 해군은 1951년에 해방 전 일본 항공창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기술문관 14명을 주축으로 항공기 제작 담당조직인 항공반을 해군공창에 설치한 바 있었다.

조경연은 항공반과 함께 불시착해 폐기처리된 미 육군의 AT-6를 개조했는데, 이 작업에는 꼬박 5개월이 소요됐다. 1951년 8월 15일 수상항공기로 개조된 AT-6의 첫 시험비행은 진해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 미 공군 제18전폭기대대의 듀피 대위가 진해 실시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열흘 후인 8월 25일 해군은 진해 해군통제부 항무과 부두에서 ‘바다 독수리’라는 이름의 해취(海鷲)호로 명명하고 전력화했다. 이 해취호가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수상항공기가 됐다.

해취호는 취역 후 해상경비, 업무연락, 인원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같은 해 11월 22일 악천후 속에서 사고로 추락해 기체는 수장되고 조종사 2명이 순직했다. 해군항공대의 유일한 항공기이자 전부인 해취호의 추락은 너무나도 뼈저린 손실이었다. 항공기가 없으니 항공반의 존재의 이유도 사라져 버렸다. 항공반은 해취호의 손실과 함께 해체되어 버렸고, 사고 충격을 극복하고 두 번째 항공기 제작에 착수하기까지는 3년이나 소요됐다.


해취호 진수식 장면 (사진: 해군:)


해군 항공대의 계보, SX-1부터 SX-5까지
조경연 대위는 포기하지 않고 신형 수상정찰기 SX-1 제작 보고서를 해군 참모총장 소원일 제독에게 제출하며 해군 항공대의 전력화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손 제독은 조경연의 뜻을 받아들여 함정국과 병기감실을 통해 예산을 지원하는 한편, 해취호 사고로 해체된 항공반을 재조직하고 조경연 대위를 항공반장에 임명했다.

조경연 대위는 공군에서 지원한 L-5 엔진과 일본에서 구입한 부속품으로 1954년 1월 SX-1 제작에 착수했다. 설계부터 제작까지 전 과정을 해군 자체 기술진 스스로 해야 했기 때문에 1954년 5월 3일 실시한 첫 비행에서 이륙에 실패하는 등 SX-1 개발은 난항을 겪었다. 다행히 5월 말에 이르러 두 번째 시험비행에서 첫 비행에 성공했다.

SX-1은 1954년 6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서해(誓海)호’로 명명식을 전력화됐다. 1951년 해취호를 잃은 지 3년여 만에 보유하게 된 해군 항공기였다. 서해호는 전력화 1년 만에 부식으로 해체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경연은 1인승 육상항공기 SX-2, 쌍발 수상정 SX-3 ‘제해(制海)호’ 등을 계속해서 개발해 가면서 해군항공대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SX-3 제해호 (사진: 해군)


해군 함대항공대의 창설
해군 자체적으로 항공반을 지원하는 별도의 예산이 전무한데다가 한국의 해군항공대에 대한 원조가 매우 소극적인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경연의 노력은 마침내 제해호의 취역을 계기로 1957년 7월 15일 해군의 첫 정식 항공부대인 해군 함대항공대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초대 함대항공대장에는 조경연 중령이 임명됐다. 이로써 해군은 항공기에 대한 설계. 연구, 제작을 담당하는 조직이 아닌 항공기를 전력으로 운용하는 조직을 확보하게 됐다.

조경연 중령은 서해호와 제해호 만으로는 늘어난 비행임무를 소화하기 어려워지자 항공기 추가확보에 나섰다. 추락으로 반파된 육군의 L-19를 인수한 뒤 부주를 장착해 개조한 수상기 SX-5 ‘통해(通海)호’를 제작했고, L-19 3대를 추가 확보 및 복원하여 육상기로 전력화했다. 1958년까지 총 5대의 항공기를 확보하며 부대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함대항공대는 해군 사관학교 비행장에서 진해 덕산 비행장으로 이전했다.

꿈의 실현 문턱에서 좌절하다
함대항공대의 창설과 항공기 추가확보 등으로 조경연 중령의 꿈은 실현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함대항공대가 보유한 5대의 항공기는 미 군사고문단의 승인이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비인가 군사자산이었다. 미 군사고문단이 부대를 방문할 때면 항공기를 숨겨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때문에 부품조달을 위한 군수지원책이라고는 비공식적 경로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비행임무 역시 제한된 작전임무에 한정되었다.

더욱이 항공기의 연료나 엔진 등 미 군사원조품을 비공식적으로 유용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미 군사고문단에 발각되면서 1962년 10월 미국은 해군항공대의 존속을 반대했다. 이와 함께 미 군사고문단은 함대항공대에 대한 음성적인 군수지원도 규제하여 함대항공대의 항공기들은 운항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1961년 2월 23일 SX-3, SX-5, L-19 3대 등 5대의 항공기 전량은 해양경찰로 이관이 결정됐다. 함대항공대 일부 인원들 역시 전역하여 해경으로 가게 됐다. 1963년 3월 1일에 이르러 함대항공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어 버렸다. 이로써 조경연 중령 역시 초대 함대항공대장이자 최후의 함대항공대장으로 기록됐다. 부대 해체 후 그는 전역했고, 1991년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7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렇게 해체된 함대항공대 이후 우리 해군은 1970년대가 될 때까지 단 1대의 항공기도 보유하지 못했다.


조경연 중령은 육군의 L-19 3대를 육상기로 개조해 전력화했다. (사진: 해군)


불멸의 개척자 정신으로 남다
해군은 조경연 중령이 처음으로 항공반을 창설했던 1951년 4월 1일을 해군 항공의 태동일로 제정했다. 함대항공대의 후신인 해군 제6항공전단은 2004년 4월 1일 새로 건립한 교육관에 해군 항공의 태동일을 기념하고 조경연 중령의 정신을 기리며 교육관의 이름을 ‘경연관’으로 명명하고 그의 가족들과 부대장병들과 함께 준공식을 갖기도 했다.

오늘날 조경연 중령은 해군항공대의 개척자로 기억된다. 조 중령의 개척정신가 도전정신, 당시 하늘을 찔렀던 수상항공기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자부심은 오늘날 해군 항공대 모든 지휘관 및 장병들의 귀감이 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육군의 L-19에 부주를 장착해 개조한 SX-5 통해호 (사진: 해군)



[육군] 故 김문길 소령(1931~1956)


김문길 소령 (사진: 육군항공작전사령부)


육군항공 장병 최고의 영예 ‘김문길 상’

“멸하지 않는 그 정신의 호흡앞에 여기에 조국을 지키던 거룩한 하나의 넋이 잠들었다.
육군항공의 산 증인이며 불사조인 멸공 투사 故 김문길 소령이 여기 잠드셨도다.“


육군 항공학교 영내에 자리한 김문길 소령의 추념비 서문이다. 추념비는 1956년 11월 DMZ 관측임무 수행 후 복귀 중 탑승자의 월북 강요를 죽음으로 저지한 김문길 소령을 기리고 있다. 이와 함께 육군 항공작전사령부는 김문길 소령의 위국헌신과 희생정신을 계승 및 선양하기 위해 2008년 ‘김문길 상’을 제정해 매년 충성, 책임, 용기 등 3개 부문에서 탁월한 공적이 있는 육군항공 장병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육군 항공대에서 김문길 소령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표상과 같은 존재다.

바다에서 못 이룬 꿈을 하늘에 펴다
김문길 소령은 1931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9살 때였다. 학생신분이었지만 그는 즉각 해군사관학교에 지원 입교했으나 생도 3학년 때 신경통으로 퇴교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귀가조치 된 후 그는 요양을 하면서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는 국가에 기여하고자 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6·25 전쟁이 막바지던 1953년 육군 장교과정을 다시 밟게 되었다. 그가 갑종 제52기 육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후 처음 맞은 광복절인 1953년 8월 15일 이었다.

제25보병사단 70연대 1대대 본부중대에서 탄약소대장으로 보임된 김문길은 여전히 못다 이룬 바다의 꿈처럼 더 넓고 더 높은 이상을 간직하고 군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육군항공 조종사 과정을 지원해 합격했고, 마침내 1954년 3월 22일 고정익 조종사반 제11기로 육군 항공교육대(현 육군 항공학교의 전신)에 입교했다. 고도의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조종교육을 마친 그는 1955년 9월 25일 항공조종장교로서 25사단 항공대에서 조종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당시 사단항공대는 창설 초기로 많은 어려움이 산적되어 있었고 높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지형도 비행을 하기에 험했다.

월북기도자의 총구 앞에 맞서
그러던 1956년 11월 19일 김문길 중위(당시 계급)는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전방관측임무를 부여받았다. 전방 비무장지대를 따라 관측임무를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항공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김문길은 기지로 귀환 중 관제탑을 통해 제2보병사단사단 보급소장 최창용 중위를 탑승시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지시대로 2사단 비행장에 내려 최중위를 탑승시켜 모기지인 관대리 비행장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지만 최 중위는 치밀하게 업무수행을 위장한 월북기도자였다. 비행 중 뒷자리에 있던 최 중위는 갑자기 김문길에게 총을 겨누며 비행기를 돌려 월북을 강요했다.

“김 중위, 선택의 여지는 없소. 기수를 북으로 돌리시오. 만약 불응하면 오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뜻밖의 상황에 김문길 중위는 당황했으나 곧바로 최 중위의 마음을 바꾸도록 권고했다. 그는 심지어 월북 강요를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최 중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월북을 결심한 최 중위는 계속해서 김문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협박했다.

“쏜다니까! 이번엔 당신 머리를 쏠 거야. 어서 기수를 돌려!!”

항로를 바꾸지 않자 조급해진 최 중위는 권총 2발을 발사하며 협박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김문길은 기지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항로를 유지하고 있던 찰나,

“탕!!”

좌측 팔에서 피가 쏟아졌다. 순간 김문길은 최 중위가 정말 머리를 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2사단 공병대 연병장이 보였다. 김문길 중위는 불시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기수를 연병장으로 내리 꽂았다. 엄청난 충격음 사이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요란한 충격음에 대대 장병들이 연병장으로 뛰쳐나왔는데 불시착 직후 최 중위가 기체에서 빠져나와 야산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부대에서는 최 중위가 도망친 야산에서 차단작전을 펼쳐 최 중위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이 불시착한 기체로 달려갔을 때에 김문길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렇게 스물여섯의 꽃다운 청춘의 김문길 중위는 창공에서 더 넓고 높은 이상을 미쳐 다 펴지 못한 채 산화하고 말았다.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내의 김문길 소령 추념비  (사진: 육군)

정부는 월북 기도자의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려 2계급 추서와 함께 금성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육군 항공인들은 김문길 소령의 위훈을 기려 항공학교에 추념비를 건립했다. 또한 김문길 소령이 나고 자란 통영에 소재한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내에도 그를 기리는 추념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그의 숭고한 군인정신을 기리고 있다.



글/ 조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