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28) Boeing 737

제트 여객기의 계보 (28)
Boeing 737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는 영국에서 먼저 등장한 D.H. 106 코메트 (Comet) 여객기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경제부흥기에 화려하게 등장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의문의 추락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판매에 큰 타격을 입었다. 코메트 여객기의 사고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대책을 세우는 동안 경쟁업체는 제트여객기를 개발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1950년대 중반에 미국 최초의 제트여객기인 보잉 707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결정하여 제트여객기 시대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 윌리엄 M. 앨런 (William Allen)이다. 당시 많은 항공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엔지니어이었던 것과 달리 사내 변호사 출신인 윌리엄 M. 앨런은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없지만 회사로 크게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순간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너무 큰 위험을 안고 있는 프로젝트라고 많은 사람이 주저할 때 성공을 확신하고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결단을 내리고 완성한 보잉 367-80 항공기는 첫 번째 비행시험에서 멋진 비행을 보여주었다. 여객기와 군용기를 합쳐서 1,000대가 넘게 판매된 보잉 707 시리즈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서 보잉은 1930년대 더글러스 (Douglas) DC-2 여객기가 등장한 이래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민간여객기 시장에서 더글러스를 큰 격차로 추월하게 되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앞서 제트 여객기 시대의 선두주자로서 유리한 위치를 먼저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민간 여객기 시장은 넓은 국토와 많은 여객 수요와 결합하여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데 보잉 707 제트여객기가 성공적인 출발을 하면서 그동안 더글러스 DC 시리즈에 눌려 상실한 시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보잉과 더글러스의 경쟁관계는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민간항공시장은 여행객의 증가와 항공기의 발달에 힘입어 성장하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더글러스 DC-3 여객기는 여행객에게 큰 환영을 받았으며 따듯한 객실에서 기내식 서비스를 받으면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환상적인 기종이었다. 그리고 기체를 확대하여 개발한 DC-4 여객기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여 미국 국내선은 물론이고 중간 기착으로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추었다.



DC-3, DC-4 기종은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여객기로 생산되지 못하고 군용 수송기로 계속 생산되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합쳐 약 12,000대가 생산되었다. 보잉은 2차 대전 중에 B-17 및 B-29 폭격기 생산업체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객기 시장에서는 경쟁사와 대조적인 초라한 판매실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보잉 B-29 폭격기를 개조한 C-97 대형 수송기는 KC-97 공중급유기를 포함하여 약 900대나 생산되었다. 그러나 C-97 수송기를 민간 여객기로 바꾼 보잉 377 여객기는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불과 56대만 판매하고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장에서의 실패하는 상황에서 보잉 707 여객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것은 윌리엄 M. 앨런에게 큰 도박이었지만 결국 멋지게 성공하였고 회사의 성장에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처음 개발한 보잉 707 제트여객기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4발 대형 여객기로 국제선 노선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보잉 707 여객기를 기본으로 중단거리 노선용으로 개조한 보잉 720 여객기는 기대와 달리 참담한 실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보잉은 보잉 720 기종의 실패를 인정하고 엔진을 3기로 줄여 경제성을 높이고 활주로가 짧은 지방공항에서 운항이 가능한 보잉 727 여객기를 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흔히 보잉 707 여객기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2세대 여객기로 불리는 보잉 727 여객기는 미국 국내 노선에서 큰 환영을 받으며 무려 1,800여대가 판매되었다.




보잉이 2가지 기종으로 제트여객기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던 당시 경쟁업체인 더글러스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한 DC-8 기종을 선보였다. 그리고 유럽의 프랑스 역시 슈드 카라벨 (Sud Caravelle)을 개발하여 중단거리 노선에 도전하였고 영국은 D.H. 코메트의 실패를 극복하고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Hawker Siddley Trident)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보잉과 한판승부를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잉 707과 보잉 727이라고 하는 명작의 아성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보잉은 한동안 제트여객기 시장에서 호황을 누렸다.

당시 미국의 중단거리 노선에서 구형 프로펠러 여객기가 점차 사라지고 신형 제트여객기로 대체되고는 있었지만 지방노선에서 운항되던 모든 프로펠러 여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까지도 미국의 단거리 노선에서는 아직도 완전하게 제트여객기가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도 여객의 수요가 적은 단거리 지방노선의 경우 터보프롭 여객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제트여객기가 처음 등장하던 1960년대 초반에는 보잉 727 여객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방노선에서 프로펠러 여객기가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에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더글러스 DC-3, DC-4 여객기는 전쟁이 끝나고 많은 수량이 민간항공회사에 싼 값으로 매각되었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한 프로펠러 여객기는 단거리 지방노선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였다. 일부 구형 기종을 대체하고자 콘베어 CV-440, 록히드 (Lockheed) L-188 Electra 같은 터보프롭 기종이 등장하였으나 가격과 성능 면에서 중고 DC-3, DC-4 기종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1960년대 미국의 국내선 중에서 대도시를 이어주는 중노선은 보잉 727 기종이 주력으로 자리를 잡아갔지만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 노선의 경우에는 아직 프로펠러 여객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고 여객기가 노후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체 기종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시장의 수요를 빠르게 파악하고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BAC 1-11, 더글러스 DC-9 여객기는 보잉 727 기종이 장악하기 힘든 단거리 소형 여객기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의외로 더글러스 DC-9 여객기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더구나 영국에서 생산하는 BAC 1-11 여객기까지 미국의 안방시장을 점령하였지만 초기에는 보잉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더글러스 DC-9 여객기가 1966년 69대, 1967년 153대, 1968년 202대를 판매하는 등 해를 거듭하면서 판매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뒤늦게 시장의 상황을 파악한 보잉은 기존의 보잉 727 기종보다 작은 국내선 전용 기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 노선은 비행시간이 짧기 때문에 이착륙이 빈번하고 충분하게 비행고도를 높이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다시 하강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또한 지방공항은 활주로가 짧고 탑승객이 많지 않아 여객터미널도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공항에 보잉 727 여객기가 취항하려고 하여도 활주로의 길이가 부족하고 순항고도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가 여객의 수요가 많지 않아 탑승률이 낮다는 열악한 조건으로 인하여 쉽지 않았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을 감안하여 등장한 더글러스 90인승 DC-9-15 기종은 쌍발 엔진과 더불어 넓은 주익과 플랩을 갖추고 있어 지방공항에 취항하기에 적당한 기종이었으며 가격도 보잉 727 보다 저렴하였다. 이러한 시장의 요구를 파악한 보잉은 더글러스 DC-9 여객기와 직접적으로 경쟁할 새로운 기종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1964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였다. 뒤늦게 개발을 시작한 보잉으로서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사활이 걸린 영업활동에서 이미 경쟁기종에 한참 뒤지는 상황이었다.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과 델타항공(Delta Air Lines)은 이미 더글러스 DC-9, BAC 1-11 여객기를 구입하였고 아직 구입하지 않은 유나이티드항공 (United Airlines)과 이스턴 항공(Eastern Air Lines) 역시 더글러스 DC-9 여객기를 구입하기로 이미 결정하기 때문에 보잉으로서는 미국의 4대 대형 항공사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잉의 입장에서는 앞뒤로 포위된 상황인지라 어렵게 결정한 신형 100인승 제트여객기의 개발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중단거리 노선의 수요가 많은 서유럽으로 가서 새로운 여객기가 필요한 항공사를 찾아 열심히 영업활동을 하였다. 때마침 독일의 루프트한자 (Lufthansa) 항공에서 프랑스제 슈드 카라벨이나 영국제 BAC 1-11 기종이 아닌 새로운 100인승 기종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루프트한자 항공의 경우에도 단거리 노선용 기종이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겨우 21대만 주문을 하였다. 보잉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100대 정도는 주문량을 확보하여야 안정적인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최대의 수요처인 미국의 4대 항공사가 이미 경쟁기종을 선택한 상황인지라 그나마 선뜻 주문을 하는 고객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렇듯이 우여곡절을 거쳐 겨우 사업을 시작한 보잉은 유나이티드항공에 대하여 만약 보잉 737 기종을 구매한다면 납품할 때까지 운항할 대체 기종으로 보잉 727 기종을 무상으로 임대해준다는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유나이티드항공의 입장에서는 원래 경쟁기종인 DC-9 여객기를 구입할 예정이었지만 아직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고 대체 기종까지 무상임대를 제공한다는 제안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보잉은 결국 미국의 주요 항공사인 유나이티드항공에서 확정 40대, 옵션 30대의 계약을 성공시켰고 옵션을 포함하여 91대의 물량을 확보하여 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미국 최고의 여객기 전문업체인 보잉에서 미국의 항공사로부터 외면을 받고 독일의 항공사에게 처음 주문을 받아 겨우 사업을 시작한 것 자체가 보잉 707 사업을 시작할 때와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이다. 이렇게 1964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보잉 737 여객기는 설계를 마치고 1967년 4월에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1968년부터 루프트한자 항공에 납품을 시작하였다.




보잉 737 여객기는 단거리 노선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운항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개념을 도입하여 개발된 기종이다. 우선 기장, 부기장, 기관사 등 3명의 승무원이 필요한 보잉 727 기종과 달리 기체의 상태를 자동으로 체크하도록 하고 기장, 부기장 2명으로도 운항이 가능하도록 보잉에서 개발한 최초의 기종이다. 이는 경쟁기종인 DC-9 여객기와 경쟁을 위해서이지만 보잉 707 기종에서 개발된 4인 승무 조종실의 레이아웃을 보잉 720, 보잉 727까지 계속 이어온 점을 고려한다면 보잉의 입장에서는 매우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승객이 적은 단거리 노선에 적합하게 보잉 727 기종과 같은 JT8D 터보팬을 쌍발 엔진으로 채택하여 기체의 레이아웃을 단순하게 배치하여 생산비용을 절감하였다. 보잉 727 기종의 경우 후방동체에 3기의 엔진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기계적으로 복잡하고 특히 가운데 엔진을 정비하려면 작업이 매우 복잡하였다. 그러나 보잉 707 기종과 같이 엔진을 주익 아랫부분에 매다는 방식으로 환원한 결과 엔진의 정비가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체는 보잉 707 기종에서 이어져온 3+3 배치 방식을 그대로 채택하여 개발비를 절감하였는데 다만 100인승에 맞추어 동체의 길이를 보잉 727 보다 축소하였다. 보잉 727 동체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경쟁기종인 DC-9 기종과 같은 100인승 여객기를 개발하였기 때문에 기체가 굵고 짧은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다.




한편 비행성능을 좌우하는 주익의 설계는 보잉 737 기종의 가장 큰 특징인데 시설이 빈약하여 활주로가 짧은 지방공항에서 이착륙하기 위해서 주익의 앞쪽과 뒤쪽에 폭이 넓은 플랩이 설치되었다. 물론 보잉 727 여객기에도 대형 플랩이 설치되었지만 보잉 737 기종에 폭이 더 넓은 플랩이 적용되었다. 대형 플랩이 발휘하는 양력의 증가 덕분에 보잉 737 기종은 짧은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빠른 시간 내에 순항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다. 물론 단거리 노선의 경우에는 국제선과 달리 3~4만 피트 정도까지 상승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비행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잉 737 기종의 경우 소형 엔진을 주익 가까운 부분에 밀착해서 장착하여 랜딩기어의 길이를 매우 짧게 설계하여 비용을 최대한 줄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랜딩기어의 바퀴를 덮개가 없이 그대로 밖으로 노출시켜 브레이크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냉각이 되도록 하였고 높이 상승하지 않으므로 랜딩기어의 기계장치가 추운 기온에 얼어붙는 일도 발생할 확률도 낮았다.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과감한 설계를 시도하였으나 나중에 보잉 737 기종이 점차 3세대, 4세대로 개량되는 과정에서 대형 터보팬 엔진이 등장하면서 엔진을 설치할 공간이 부족하게 되어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