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7) Lockheed L-1011 TriStar (Pt. 1)

제트 여객기의 계보 (37)
Lockheed L-1011 TriStar (Pt. 1)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여객기 제작 전문 업체라면 단연코 보잉(Boe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지금과 사정이 달랐다. 당시 미국의 여객기 제작 시장을 선도하는 전문 업체는 더글러스(Douglas)였다. DC(Douglas Commercial) 시리즈로 유명한 더글러스의 민간 여객기 라인업은 당시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막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더글러스를 여객기 제작 전문업체로 자리를 잡게 한 일등 공신이 바로 DC-3이다. 1936년에 처음 등장한 DC-3 여객기는 등장하자마자 2차 대전이 일어나 여객기보다는 군용 수송기로 더 많이 생산됐다. C-47 수송기로 생산된 10,174대를 제외하더라도 DC-3은 여객기도 607대나 생산됐다. 단거리 기종인 DC-3에 이어 중거리 여객기로 등장한 DC-4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1942년에서야 등장한 관계로 여객기를 건너뛰고 C-54 군용 수송기로 생산이 시작됐다. 따라서 군용 수송기로 생산된 1,163대를 제외하면 순수한 DC-4 여객기는 불과 80대만 생산됐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대량으로 생산된 C-47, C-54 수송기는 민간 항공사에 싼 가격으로 매각됐고, DC-3, DC-4 여객기는 전후 경제회복기와 맞물려 민간 항공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DC-3>

이처럼 1940년대 후반기에 미국의 민간 여객기 시장을 주도하던 더글러스는 영국에서 개발한 D.H.106 코메트(Comet) 제트 여객기가 1952년에 등장할 때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시 더글러스는 DC-4 여객기를 개량한 DC-6, DC-7 여객기를 차례로 내놓으면서 미국의 국내선 노선과 대서양 노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술적으로 불완전하고 많은 개발비가 필요한 신형 제트 여객기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1940년대에 개발된 DC-4에서 개량된 DC-6/DC-7 여객기는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고 엔진과 탑재장비를 바꿔 조금 개량한 수준에 불과했다.
 

콘스텔레이션 시리즈, 터보프롭으로 초기 성공 거둬
이에 비해서 록히드(Lockheed)에서 근무하는 유명한 엔지니어 켈리 존슨(Clarence "Kelly" Johnson)이 설계한 L-049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걸작 기종이었다. 더글러스 DC-4 기종과 비교할 때 록히드 L-049 콘스텔레이션은 탑승인원은 비슷했지만 기내 공간이 넓었고 특히 엔진의 출력이 50% 이상 높아서 비행성능이 우수했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엔진 출력의 덕분에 웬만한 기상조건에서도 안전한 비행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L-049 콘스텔레이션의 주익은 P-38 라이트닝(Lightning) 전투기의 주익과 같은 형태로 설계돼 고속비행 성능이 우수한 장점이 있었다. 초기 생산형인 L-049 콘스텔레이션은 군용기를 포함해 모두 88대가 생산됐다. 항공사와 승객에게 모두 호평을 받은 콘스텔레이션 시리즈는 이후에도 L-649 콘스텔레이션(22대), L-749 콘스텔레이션(119대), L-1049 슈퍼 콘스텔레이션(579대), L-1649 스타라이너(44대)로 개량되면서 1958년까지 계속 생산됐다. 록히드는 콘스텔레이션 시리즈로 고급 여객기 전문업체로 자리를 잡았으며, 특히 제트 여객기가 아직 주력기종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1950년대에 장거리 노선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L-049>

이처럼 성공적으로 여객기 사업을 진행하던 록히드는 D.H.106 코메트가 등장하였지만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당시 초창기의 터보제트 엔진(turbojet engine)은 신뢰성도 부족했고 연비가 좋지 않아 연료를 많이 소모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제트 여객기는 아직 무리이며 상대적으로 연비가 우수한 터보프롭 엔진(turboprop engine) 여객기가 중단거리 노선에서 당분간 활약할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당시 왕복엔진 여객기의 조종사가 기종 전환을 감안하더라도 제트 여객기 보다는 터보프롭 여객기가 더 유리했다. 더구나 영국에서 등장한 D.H.106 코메트 제트여객기의 연속적인 추락사고가 일어나면서 운항이 중단되자 이러한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록히드는 이러한 판단을 배경으로 1950년대 초에 큰 성공을 거둔 C-130 허큘리즈(Hercules) 수송기의 개발기술을 활용해 최대 100명이 탑승할 수 있는 터보프롭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57년에 등장한 기종이 바로 L-188 엘렉트라(Electra) 여객기이다. 록히드는 원래 C-130 수송기와 비슷하게 주익을 높게 설치한 여객기를 제안했으나, 항공사의 요구에 따라 주익의 위치를 변경했다. 엔진과 주익의 형태가 C-130 수송기와 비슷한 엘렉트라 여객기는 순조롭게 개발됐고 1959년부터 운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9년 9월 28일에 미국 텍사스 상공에서 비행 중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17일에도 인디아나 상공에서 다시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원인을 조사한 결과 대형 프로펠러에서 발생하는 소용돌이가 날개 표면과 부딪히면서 진동이 발생하였고, 금속의 피로를 증가시켜 주익 구조물이 파괴됐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러한 현상은 높은 엔진 출력을 감당하기에 충분하게 주익을 튼튼하게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충분하게 비행시험을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취항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엘렉트라 여객기는 연속적인 사고로 고객을 잃게 되었고 불과 4년 만에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록히드는 엘렉트라 여객기를 기반으로 미 해군의 P-3 오라이언(Orion) 해상초계기를 개발하면서 주익의 구조물을 다시 설계했다. 그러나 이미 여객기 사업은 크게 실패했고 다시 회복하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여객기 시장은 제트 여객기로 전환을 한 상태였고 터보프롭 여객기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L-188>


수송기 개발기술 활용, 제트 여객기 사업 재개
엘렉트라 여객기 사업의 실패 이후 록히드는 냉전시기에 수요가 많았던 군용기 사업에 주력했다. 특히 C-130 허큘리즈, C-141 스타리프터(StarLifter), C-5 갤럭시(Galaxy)로 이어지는 미 공군 수송기 사업에서 연속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밖에도 F-104 스타파이터(Starfighter) 전투기, AH-56 샤이엔(Cheyenne) 공격헬기, P-3 오라이언 해상초계기 등 록히드의 군용기 사업은 호조를 보였다.

<C-141>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록히드의 군용기 사업은 점차 매출이 줄어들었다. F-104 전투기는 미 공군에 채택되지 못한 채 해외수출에만 의존하고 있었고, AH-56 공격헬기는 육군과 공군의 힘겨루기로 인해 사업자체가 중단되고 말았다. 황금의 라인업을 자랑하던 수송기 사업도 C-5 수송기의 가격 상승으로 인해 주문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록히드는 줄어드는 일감을 보충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으로 신형 여객기 개발을 고민하게 됐다. L-188 엘렉트라 여객기의 실패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지만 록히드는 제트 수송기 개발을 연속적으로 성공시킨 실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시장의 수요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항공기 제작업체는 군용기와 여객기 사업을 완전히 분리해 진행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군용기와 여객기 사이의 장벽은 높지 않았다.

록히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으로 제트 여객기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중단 기간을 만회하고 여객기 시장에 성공적으로 복귀하려면 당시 제트 여객기 시장을 석권하던 경쟁기종인 보잉 707, 더글러스 DC-8 기종을 뛰어넘을 수 있는 차별화가 필요했다. 록히드는 이전에 크고 호화로운 콘스텔레이션으로 경쟁상대인 더글러스 DC-4를 압도했던 경험을 살려 고급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3발 여객기 L-1011 트라이스타 개발 착수
이렇게 록히드가 새로운 제트 여객기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던 시기에 미국의 대표적인 항공사인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은 국내선용 신형 여객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아메리칸항공이 요구한 대형 쌍발 여객기는 250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1층 구조의 여객기로 1966년 3월 25일에 정식으로 제안요구서를 공고했다. 이때 요구한 주요 성능은 다음과 같다.
 
1) 추력 40,000lb급 하이 바이패스 터보제트 엔진(high by-pass turbofan engine) 탑재
2) 일반석(economy class) 기준으로 250명의 승객이 탑승(좌석의 간격은 36인치)
3) 승객 1인당 수하물 250파운드(약 113kg), 별도 위탁화물 5,000파운드(약 2,268kg) 적재
4) 1,850해리(nautical mile, 약 3,426km)를 비행할 수 있는 항속거리
5) 기체의 크기는 전폭 155피트(약 47m), 전장 180피트(약 55m) 이내
 
록히드는 아메리칸항공의 요구사항을 다른 대형 항공운항사에도 문의했다. 그 결과 아메리칸항공이 요구하는 250석급 여객기의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쌍발 여객기로 시작했으나 록키산맥을 통과하는 노선과 대양 횡단노선의 비행안전을 감안해 보잉 727 기종처럼 3발 엔진으로 결정했다. 항속거리는 당시 국내선 노선의 평균 비행거리인 400마일(약 644km)을 2번 왕복할 수 있는 1,400마일(약 2,253km)이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형 여객기는 미국 국내선은 물론이고 유럽 대륙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에서도 큰 수요가 예상됐다.

면밀한 검토를 마치고 록히드는 1967년 9월에 L-1011 트라이스타(TriStar)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고객은 아메리칸항공을 비롯해 유나이티드항공, 이스턴항공, 트랜스월드항공(TWA), 내셔널항공 등 미국 국내선 노선에 취항하던 주요 항공사가 대상이었다. 록히드는 자사가 개발한 항공기의 이름에 별(star)을 포함시키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회사의 로고에도 별이 그려져 있었다. L-1011 트라이스타라는 명칭도 3개의 엔진을 가진 여객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L-1011>
 
록히드는 신형 여객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여유 인력을 투입해 기본설계를 이미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L-1011 트라이스타 계획을 발표하던 시점에는 상당한 설계를 완성한 상태였다. 이러한 진척도는 경쟁상대인 더글러스 DC-10 기종보다 확실히 앞서 있었다. 더구나 더글러스는 생각지도 않게 록히드에서 신형 여객기 개발을 발표하는 바람에 선수를 빼앗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사실 미 공군의 C-5 갤럭시 대형 수송기에 탑재하려고 개발 중이던 TF39 엔진의 잠재력을 알아본 아메리칸항공과 먼저 접촉한 더글러스로서는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록히드가 9월에 발표한 지 2달이 지난 11월에 더글러스도 DC-10 여객기의 개발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더글러스 DC-10 여객기는 기본설계가 아직 끝나지 않아 경쟁상대인 록히드보다 훨씬 뒤처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의 입장에서는 신형 여객기의 구매를 결정한 아메리칸항공과 초기부터 긴밀하게 업무를 협조한 실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개발을 마치는 대로 바로 구입할 고객이 있다는 것과 새로운 여객기의 설계안을 긴밀하게 토의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점에서 록히드와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록히드의 경우에는 먼저 설계를 시작했지만 내부적으로만 설계를 검토해야 하고, 개발이 끝난다고 해도 구입할 고객을 찾아야 하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글/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