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 여객기의 계보(51) Airbus A310

제트 여객기의 계보(51)
Airbus A310



글/ 이장호

같은 제트여객기라고 해도 미국과 유럽의 여객기는 근본적인 개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국토가 넓은 미국은 국내선이라고 해도 장거리 노선의 경우 6~7시간이나 비행하며 대서양 횡단 노선에 버금가는 먼 거리를 운항한다. 반면 많은 국가들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의 경우 국제선이라고 해도 미국 국내선보다 짧은 거리를 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운항노선의 여건 차이로 유럽의 에어버스(Airbus)는 미국의 보잉(Boeing)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을뿐더러 미국 항공사를 대상으로 판매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에 비해 항공여행이 활발하지 않던 1970년대, 미국 국내선의 경우 대도시를 잇는 황금 노선을 제외한 지방 노선 탑승률은 높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 국내선에 취항하는 항공사는 승객이 적게 탑승하더라도 멀리 비행할 수 있는 기종이 필요했다. 반면 유럽에 취항하는 항공사는 많은 승객이 탑승하지만 비행거리는 짧은 노선이 많았다. 유럽의 국제선이라고 해도 2~3시간이면 도착하는 노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제트여객기의 태동
1960년대 말 어려운 과정을 거쳐 에어버스가 설립되기 전까지 유럽 제트여객기 시장을 이끌던 국가는 영국이었다. 지금은 에어버스 사업에서 물러나있지만 50년 전 영국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다. 세계 각지에 걸쳐 해외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은 1930년대 항공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자 식민지를 연결하는 항공노선을 선구적으로 개척했다. 

항공노선을 이용하면 종전의 해상 노선에 비해 획기적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으며 긴밀한 연락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해외 식민지까지 운항이 가능한 여객기를 개발한 기술력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4발 대형 폭격기를 개발하는 데 유용했다. 반면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4발 대형 폭격기를 개발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공군의 전력은 알려진 바와 달리 전술공군 수준에 머물렀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전시 내각 산하에 "브라바존 위원회(Brabazon Committee)"를 설치하고 전쟁이 끝날 때를 대비해 미래 여객기 개념을 다각도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9년에 세계 최초로 제트 엔진을 탑재한 D.H. 코메트(Comet) 여객기가 등장했다. 취항한 지 2년 만에 발생한 비극적인 추락 사고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제트여객기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D.H.106>

에어버스 A300 사업에 참여하기 전까지 영국은 트라이던트(Trident, 1962년), V.C.10(1962년), BAC 1-11(1963년) 등 다양한 제트여객기를 꾸준하게 개발했다. 이처럼 글로벌 네트워크가 필요했던 영국은 분명 프랑스, 독일 등보다는 국제선 여객기 개발에 적극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지리적인 여건 상 유럽 대륙으로 갈 때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항공편이 훨씬 더 편리하고 시간 절약이 가능한 면도 있었다.


200인승 시장 호조, A310 개발로
이러한 유럽 특유의 항공 여객수요를 감안해 개발된 제트여객기가 바로 에어버스 A300 기종이다. 최초의 양산형인 A300B2 기종은 나중에 등장한 보잉 767-200 여객기와 비교할 때 항속성능이 75%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미국의 주요 항공사는 당연히 A300을 도입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300은 복합재료를 사용하는 등 앞서가는 기술이 적용된 기종이었다. 특히 쌍발 엔진의 경제성이 더해지면서 1973년 석유위기 이후 연료비 상승을 걱정하던 미국 주요 항공사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78년 이스턴항공(Eastern Air Lines)에서 채택하면서 A300은 마침내 미국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이스턴항공의 A300 도입은 보잉에 큰 충격이었고 이후 767의 시초가 되는 7X7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A300 판매가 점차 증가했지만 에어버스 내부적으로는 고민 거리가 하나 있었다. 에어버스는 회사를 설립할 당시 A300이라는 명칭 그대로 300인승 여객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항공시장 여건 상 300인승 여객기가 너무 크다는 항공사들의 의견에 따라 250인승으로 크기를 줄여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A250으로 명칭을 바꿔야 했지만 혼동을 피하고자 A300을 유지하되 A300B2라는 다소 변칙적인 명칭으로 프로젝트를 게속 진행했다.

에어버스의 영업팀은 1974년부터 A300B2의 취항과 함께 본격적으로 판매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창립 초기였던 1960년대의 낙관적인 전망과 달리 1970년대 석유위기로 인한 항공여객의 급격한 수요 감소에 직면했다. 에어버스는 시장조사 결과 1980년대에 들어서면 1960년대 초반에 취항하기 시작한 보잉 727, 더글러스(Douglas) DC-9와 같은 구형 기종이 점차 퇴역하면서 교체 수요를 전망했다.

이에 따라 A300B2를 기반으로 동체 길이를 줄여 200인승으로 개조한 A300B10 기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 적자 폭이 컸던 에어버스는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면서 동체 길이만 줄이고 주익, 미익, 세부계통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비용을 최대한 줄일 계획이었다. A300B10이라는 명칭은 기존 동체에서 10개의 프레임을 줄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에어버스 A310 여객기는 독일 루프트한자항공(Lufthansa) 50대, 스위스항공(Swiss Air) 20대 주문을 받으며 1978년 7월 개발이 시작됐다.


<A300B2>

영국 재참여, 혁신 불러와
에어버스가 출범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영국 정부는 사업이 구체화되면서 프랑스, 독일과 의견 대립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 공동개발 여객기를 실현하고자 했던 영국 정부는 자국 항공업체를 주도적으로 참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구성품인 엔진이 영국제 롤스로이스(Rolls-Royce)가 아닌 미국제로 결정되자 영국 정부는 에어버스 공동조합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다만 주익이라는 매력적인 생산 품목을 담당한 영국의 호커 시들리(Hawker-Siddeley)는 영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쉽게 탈퇴하기 힘들었다. 그 결과 호커 시들리는 영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체 부담으로 에어버스 조합에 계속 남았다.

초기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A300 판매가 증가하면서 에어버스 사업이 호조를 보이자 영국 정부는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1970년대 석유위기를 겪으며 중화학 공업이 완전히 무너졌다. 

특히 유럽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기술력이 높다고 자신했던 항공산업 역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유명 업체가 하나씩 문을 닫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1977년 4월, 남아있던 4개의 항공업체를 BAe(British Aerospace)라는 국영기업으로 통합했다.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한 BAe는 1979년 1월 에어버스 조합에 다시 참여했다.

원래 A310 여객기는 동체 길이만 단축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체 길이를 줄이고 주익을 그대로 두면 상대적으로 필요 이상의 양력이 발생하는 주익이 저항을 더 받게 된다. 이 경우 불필요하게 연료가 낭비되기 때문에 주익도 다시 개발할 필요성이 높았다.



때마침 주익을 담당했던 영국이 에어버스에 다시 참여하면서 주익과 수평미익을 다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세부적인 설계가 진행되면서 동체에서 13개의 프레임이 제거돼 길이가 5.9m 단축됐다. 동체 단축으로 상대적으로 후방동체가 길어지면서 A310 개발팀은 후방동체 길이도 줄였다. 이에 따라 A300과 비교했을 때 꼬리 부분이 가파르게 위쪽으로 올라가는 독특한 형태가 완성됐다.

결국 A300의 동체만 단축하려던 당초 구상과 달리 동체의 단면(지름)을 제외하면 A310은 전혀 새로운 기종으로 탄생됐다. 경쟁기종인 보잉 767 여객기를 의식해 2인승 전자식 조종실, 플라이 바이 와이어 조종 장치를 채택하는 등 쌍발 엔진과 더불어 경제적인 최첨단 기종이라는 평가를 받고자 노력했다. 특히 1970년에 등장한 첨단 소재인 탄소섬유 복합소재(CFRP)를 적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성적 아쉬우나 광범위로 활용
A310 시제 1호기는 1982년 4월 3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대서양 횡단비행이 가능한 7,000km의 항속거리를 확보한 A310 여객기는 경제성이 높은 기종이었다. 1983년 4월 10일, 독일 루프트한자항공은 프랑크푸르트~슈트트가르트, 프랑크푸르트~런던을 잇는 2개 노선에서 A310-200 여객기의 상업운항을 개시했다. 한편 1985년 2월 미 연방항공청(FAA)의 형식인증을 받고 같은 해 5월 팬암항공(Pan American World Airways)은 노후 보잉 727 기종을 대신해 미국 최초로 A310-200의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쌍발 엔진을 탑재한 A310은 초창기 60분 이내 비상착륙이 가능한 비행장이 있는 구간에서만 운항이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에어버스는 항속거리를 8,300km로 연장한 A310-300 기종을 개발했다. A310-300 기종은 엔진 신뢰성 향상에 힘입어 ETOPS 180분까지 가능해지면서 대서양 횡단 노선에 취항할 수 있게 됐다.

A310 여객기는 1980년대 연간 20대 정도씩 판매됐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판매량이 급속히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에어버스에서 내놓은 200인승 여객기 A321 기종이 1994년부터 취항하면서 상대적으로 던치가 큰 A310의 인기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A310은 경쟁기종인 767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55대의 판매량으로 종료됐다. A318 기종이나 보잉 737-600 기종의 경우와 같이 기존 여객기 동체를 줄여서 만든 기종은 항공사들의 인기를 얻기 힘든 경향이 있다.

비록 A300 여객기에 비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A310 개발에서 얻은 디지털 조종실, 디지털 조종 장치, 신형 주익 등의 기술적 성과는 이후 에어버스 A300-600 기종이 등장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에어버스가 심기일전해 새롭게 내놓은 A300-600 여객기는 767 기종보다 한 단계 높은 기종으로 A330 여객기가 등장할 때까지 에어버스 여객기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A300 여객기 대비 탑재량과 항속 성능이 높았던 A310 기종은 민간 여객기뿐만 아니라 화물기로도 인기가 높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특송업체 페덱스(FedEx)는 최근까지 대규모의 A310-200F 화물기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 독일 공군은 6대의 A310 MRTT(Multi Role Tanker Transport) 공중급유기를 2004년부터 현재까지 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