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15) 휴즈 H-4(HK-1) 허큘리스

휴즈 H-4(HK-1) 허큘리스
(Hughes H-4 Hercules)

 
항공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주익을 가진 항공기인 H-4 허큘리스는 전나무로 만든 거위(Spruce Goose)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항공기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의 보잉 747과 같은 대형기의 개발에 밑바탕이 되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해군의 U-보트의 위협에서 안전한 수송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비행정으로 개발된 H-4 허큘리스는 비행기라기 보다는 비행이 가능한 배에 가까운 형태로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수송 능력인 2대의 전차 또는 보병 1개 대대병력을 미국에서 영국까지 한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성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발작업의 지연과 미국정부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유일하게 1대만이 제작되어 단 한번만 비행한 진기한 기록의 항공기이다.
 

1941년 12월 7일에 일본해군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독일의 침공위협을 받고있는 영국에 대하여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석유, 보급물자를 본격적으로 공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에 미국의 전쟁성(현재의 육군성)은 이러한 많은 전쟁물자와 인원을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수송할 수 있는 적절한 수송수단을 구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대서양을 횡단하는 연합국의 수송선단은 미국을 떠나서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독일해군의 U-보트 함대에 공격에 의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었으며, 안전한 해상수송로의 확보가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 당시의 수송선단의 피해정도는 미국의 조선능력을 상회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해상보급이 아닌 다른 수단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30년대 후반에 막 시작된 민간항공업계의 대서양횡단노선 개척에 주목하고 당시의 팬암을 비롯한 장거리 취항 항공사의 더글러스 DC-4, 록히드 콘스텔레이션과 같은 장거리 여객기를 징발하여 대서양 횡단보급 임무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항공기는 장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성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탑재량과 항속거리 측면에서 볼 때 수송선박을 대체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며, 특히 전차, 장갑차 등의 중장비는 탑재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보조적인 수송수단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새로운 수송기의 개발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전쟁성은 중장비를 수송할 수 있는 새로운 초대형 장거리 수송기의 개발이 필요하였으며, 이에 따라 리버티 수송선 계획을 총괄하고 있었던 헨리 J. 카이저(Henry J. Kaiser)가 정부자금으로 새로운 수송기의 개발을 의뢰받아 항공기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카이저는 항공기를 당시 보잉이나 더글러스와 같은 항공기 개발업체의 설계팀을 만나 대형 수송기 개발을 협의하였으나, 당시 전쟁특수로 인하여 장거리 여객기를 군용 수송기로 전환하여 생산하기에도 벅찬 메이커의 입장에서 신형 수송기의 개발을 무리라는 답변을 들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카이저는 기존의 업체를 배제하고 신예 메이커인 휴즈 항공사를 찾게 되었으며, 젊은 비행기 조종사이자 개발자인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를 개발 파트너로 맞이하여,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는 초대형 항공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들이 머리 속에 구상하고 있었던 수송기는 두 대의 M-4 셔먼 전차 또는 완전 무장한 750명의 보병을 태울 수 있는 초대형 수송기로서, 미국의 뉴욕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영국의 리버풀까지 논스톱으로 수송하여 U-보트의 공격을 피하고 안전하게 수송하는 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휴즈(Hughes)와 카이저(Kaiser)가 합작하였다고 하여 HK-1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신형 항공기는 기본적으로 엔진의 고장에 대비하여 해상에서 비행할 때에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비행정의 형태로 개발하며, 나무를 사용하여 무게 181톤, 날개 폭 97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비행정이었다. 지금도 이 항공기는 보잉 747이나 록히드 C-5 갤럭시보다도 큰 날개를 가지고 있다.
1942년 미국의 전쟁성과 하워드 휴즈는 1대당 1,800만 달러의 가격에 3대의 대형 수송기를 개발한다는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미국의 전쟁성은 카이저와 휴즈에게 대형 수송기의 개발을 의뢰하면서 알루미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당시 미국은 진주만 기습 이후 전시산업체제로 전환하면서 철강, 석유, 알루미늄, 고무와 같은 전략물자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당장에 급한 전투기와 폭격기와 같은 전투용 항공기보다 우선순위가 낮은 수송기의 제작에 전략 물자인 알루미늄을 사용하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카이저와 휴즈가 개발하는 신형 수송기는 알루미늄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재료로 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알루미늄을 사용하면 가볍고도 튼튼한 수송기를 제작할 수 있었으나, 알루미늄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무게가 무거운 철골을 사용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1차대전 때의 항공기처럼 나무로 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면 알루미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복합재료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 당시에는 나무로 제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당시에 무모하게 여겨졌던 나무를 사용한 대형항공기의 제작 소식은 사람들에게서 ‘하늘을 나는 목재소’, ‘전나무 거위(Spruce Goos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휴즈는 이러한 비꼬는 듯한 별명을 매우 싫어하였으며 HK-1이라고 불리는 신형 대형수송기에 천하장사라는 뜻으로 ‘헤라클레스(Hercules)’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HK-1의 구조
HK-1 허큘리스는 비행정의 표준 구조인 단일 선체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1개 보병대대 또는 2대의 셔먼 전차를 탑재할 수 있도록 대형 화물실을 마련하였다. 또한 거대한 몸집으로 활주로에서 이착륙하기에는 랜딩기어의 설계나 기체의 구조에 무리가 있었으며, 대서양 횡단을 하면서 엔진이 고장 날 경우를 대비하여 랜딩기어가 필요 없는 완전한 비행정으로 개발되었다.

무겁고 거대한 동체를 움직이도록 97미터가 넘은 큰 날개를 가진 HK-1은 3,000마력을 낼 수 있는 8대의 강력 프래트 & 휘트니 R-4360 래디얼 엔진을 장착하였다. 당시 대형 여객기가 주로 4대의 R-3800급 래디얼 엔진을 장착한 것과 비교할 때 HK-1은 엔진의 출력에 있어서 당시의 여객기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대형기임에도 불구하고 HK-1은 기체의 구조와 형태면에서 일반적인 배치를 적용하였으며, 단일 수직미익과 고정식 익단 플로트, 완전한 캔틸레버 방식의 주익과 수평미익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계약 조건에 따라 기체의 골격과 표면의 재료는 알루미늄 합금이 아닌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재료는 주로 가볍고 튼튼한 자작나무를 사용하였다. ‘전나무 거위’라는 명칭 때문에 전나무 또는 가문비나무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전나무는 사용되지 않았다. HK-1의 제작은 일반적으로 항공기에 많이 사용되는 세미 모노코크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나무로 제작한 프레임에 못이나 나사를 사용하지 않고 1/32인치 두께의 베니어 합판을 부착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항공기라기 보다는 배를 제작하는 방법에 가까웠으며, 방수효과의 유지를 위하여 못을 사용하지 않고 특수한 접착제로 부착하였으며 ‘듀라몰드(Duramold)’라고 불리는 특수한 특별한 수지로 방수 코팅을 하여 염분의 부식을 방지하였다. HK-1의 놀라운 점은 현재 최대급의 수송기인 C-5 갤럭시의 경우에도 연료를 제외한 중량이 170톤인 것과 비교할 때 알루미늄을 사용하지 않고도 나무로만 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튼튼하다는 점에서 매우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플랩을 제외한 HK-1의 조종 익면은 목면제 천으로 입혀졌으며, 이러한 제작방식도 금속제 항공기가 등장하기 이전의 초창기 항공기 제작방식과 같았다. HK-1의 제작방식을 살펴보면 당시의 기술로서 도전하기 어려운 새롭고 기발한 신기술보다는 개발위험이 낮은 기존의 방식을 사용하되 작업규모가 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워드 휴즈는 HK-1의 제작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며 습도와 온도에 따라 변형이 되기 쉬운 나무의 특성을 대처하고자 항온, 항습이 가능한 상태에서 HK-1을 제작하도록 항상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에어컨이 가동되는 전용 대형 격납고를 지었다. HK-1의 동체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는데 동체 앞부분의 위쪽에 자리잡은 조종 데크는 조종석과 승무원석, 각종 계기류 패널로 구성되었고 높은 위치에서 양호한 시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뒷부분은 화물 데크로서 인원과 장비를 탑재하는 공간이었다. 두 부분은 완전히 구분되어있었으며, 연락 통로인 고전적인 형태인 원형 계단으로 연결되어있었다.

8대의 대형 엔진을 장착한 거대한 비행정이 장거리를 비행하려면 다량의 연료가 필요하며, HK-1은 5,500km를 비행하는데 12,500갤런이나 되는 연료가 필요하다. 비행 연료는 설계구조상 일반적으로 주익의 내부에 연료탱크를 설치하여야 하지만 나무로 제작된 특별한 구조 때문에 강도가 약하여 주익에 무거운 연료를 넣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휴즈는 자신의 아이디어로 수상 활주할 때 물속에 잠기는 카고 데크의 아래부분에 연료탱크를 설치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바닷물보다 가벼운 연료의 특성을 활용하여 부력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사람과 화물을 싣고 장거리를 비행하는 수송 비행정인 HK-1은 2대의 셔먼 전차를 싣기 위하여 앞부분에 대형 출입문과 램프를 설치하도록 설계되었다. (다만 시제작 1호기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대형 출입문을 통하여 비행정이 부두에 도착하면 별도의 번거로운 하역작업 없이 전차가 직접 주행하여 내릴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는 현재의 C-5에서도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상당히 앞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형기인 HK-1을 조종하려면 종전의 조종사의 인력에 의한 케이블 방식으로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파워 부스트 시스템을 사용하여 100명의 사람에 해당하는 동력을 발생시켜 조종 익면을 가동하도록 하였다.

세간의 사람들이 ‘전나무 거위’라고 비웃고 심지어 미국 정부자금을 낭비하였다는 혐의로 하워드 휴즈는 미국 상원 청문회에 불려나가기도 하였지만, 항공역사와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HK-1은 기록에 남을 귀중한 항공기이다. 우수한 기본설계와 적용기술은 후대의 항공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규모 자체만으로도 지금까지도 초대형 항공기의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금속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제작한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한 비행기록
당초에 1대당 1,800만 달러의 가격에 3대를 제작하기로 하워드 휴즈와 미국정부는 계약을 맺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제작이 지연되면서 미국 정부의 관심은 멀어졌으며 위협의 대상이었던 U-보트의 위력도 신형 대잠 무기의 발달과 호위함대의 강화로 점차 약해져 초대형 수송비행정의 필요성은 줄어들었다.

1944년 3월에 이르러 미국정부는 1호기의 제작만 계속 진행하되 나머지 2대의 제작은 취소하였으며 제작예산 역시 1,800만 달러까지만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1호기의 제작은 기술적인 어려움과 함께 주요 제작 재료인 자작나무의 조달에 어려움이 있어 지연되었으며 이에 따라 제작비용도 당초의 예상비용을 초과하여 2,500만 달러나 사용되었다.

이중에서 1,800만 달러는 정부 예산을 사용하였며, 초과분 700만 달러는 하워드 휴즈의 개인 재산을 털어서 충당하였다. 한편 처음에 개발을 시작할 때 최대의 후원자이자 완성될 경우 가장 큰 고객이 될 헨리 J. 카이저는 리버티 수송선 사업이 성공을 거둔 반면 HK-1 허큘리스는 부진한 제작 진척도를 보이자 중도에서 합작을 포기하였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하워드 휴즈는 초대형 비행정의 제작에 집념을 보였으며, 개인재산으로 제작비용을 충당하면서 H-4 허큘리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제작을 계속하여 마침내 2차대전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47년에 H-4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상원 청문회에 정부자금 유용 건으로 하워드 휴즈는 궁지에 몰릴 때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영화 ‘Aviator’에서 잘 묘사되어있다.


H-4은 수상 활주시험을 거쳐 1947년 11월 2일에 캘리포니아 롱 비치 해변에서 수십 명의 보도진과 수천명의 일반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워드 휴즈가 직접 조종간을 잡고 시험비행에 나선 H-4는 플랩을 내리고 수상 활주를 한 다음 8대의 대형엔진을 최대한 가동하여 이륙속도를 내어 마침내 바다위로 떠올랐으며 33피트의 높이로 1분간 비행한 다음 다시 내려앉았다. 최초이자 최후의 비행이 된 이 날의 시험비행으로 H-4는 날지 못하는 거위라는 별명을 지우게 되었으며, 시험비행 당시 동승한 승무원이 하늘을 나는데 성공했다고 하자 하워드 휴즈는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당시 상원 청문회 위원과 비난을 일삼은 언론에 대한 자신의 반격이라고 생각된다. 시험비행이 끝난 후 하워드 휴즈는 H-4의 등록번호를 NX37602에서 N37602로 변경하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H-4
세계 최대의 항공기라는 근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H-4 허큘리스는 어려운 상황에서 단 한번의 비행으로 일생을 마쳐야만 하였으며, 1947년의 시험비행이후 1976년 4월에 하워드 휴즈가 죽을 때까지 캘리포니아 롱 비치 근교에 위치한 하워드 휴즈의 개인적인 특별 격납고에 언제라도 비행할 수 있는 상태로 완벽하게 보관되었다. 사실 하워드 휴즈가 사재를 털어가면서 제작한 특별한 항공기인 까닭에 지금까지 H-4가 보존될 수 있었으며, 만일 정상적으로 제작이 끝나서 미국 정부에 납품되었더라면 아마도 2차대전이 끝난 후에 폐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워드 휴즈가 죽은 후 1980년에 H-4는 여러 가지 복잡한 경로를 거쳐서 남부 캘리포니아 비행 클럽이 구입하여 롱 비치 해변에 퀸 매리 호화여객선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1983년 5월부터 H-4는 특별히 제작한 원형 돔 내부에 전시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이전비용만 1,20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돔형 전시장에서 H-4의 조종석에는 하워드 휴즈의 실물 모형과 함께 내부에는 비행승무원까지 재현되어있었다. 전시기간동안 H-4는 수백만 명이 관람하는 인기 전시 품목이었으며, 기체도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그러나 전시장의 관리비용 문제로 1988년에 디즈니사가 관리회사를 매입하고 전시관을 임대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년 후에는 전시장소를 테마공원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하면서 H-4 허큘리스의 운명에도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격렬한 논란의 와중에 H-4는 9개의 장소에 분해하여 전시하자는 제안까지도 나왔으며, 결국 1992년에 오레건주 맥민빌에 위치한 벤처 박물관인 에버그린 항공박물관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에버그린 항공박물관은 클래식 항공기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여 전시하는 박물관으로서 2000년에 H-4를 포함하여 수십 대의 항공기를 전시하는 전시장을 일반에 공개하였다.

에버그린 항공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하여 캘리포니아주 롱 비치에서 완전히 분해된 H-4는 오레건주 맥민빌까지 1,400km에 이르는 거리를 육로를 통하여 전용 트레일러에 실려 트럭으로 운반되었으며 재조립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롱 비치 해안에서 전시될 때와 다른 점은 관람객의 내부구조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체의 뒷부분에 있는 외부 패널을 떼어내고 투명 플라스틱을 설치한 점이다. 현재까지도 완전한 보관상태로 전시되고 있는 H-4를 살펴보려면 에버그린 항공 박물관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된다. (www.sprucegoose.org)
 
[제원 : 휴즈 H-4 허큘리스]
 
형식 : 장거리 8발 수송비행정
전폭 : 97.51m
전장 : 66.75m
전고 : 24.17m
주익 면적 : 1,061.80㎡
엔진 : 프래트 & 휘트니 R-4360-4A 래디얼 피스톤 엔진(출력 3,000마력) ×8
공허중량 : 136,077kg
최대이륙중량 : 181,436kg
최대속도 : 371km/h(고도 1,524m)
순항속도 : 241km/h(고도 1,524m)
해면상승률 : 305m/min
상승한도 : 6,370m
항속거리 : 4,830km
화물탑재량 : 58,960kg (M-4 셔먼전차 2대)
탑승인원 : 750명
승무원 : 18명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