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현장, 강릉기지와 공군 제18전투비행단


 

빨간 마후라의 고향 강릉기지는 6·25 전쟁 발발 이후 우리 공군이 대부분의 항공전을 수행한 역사 속 현장이다. 선배 전우들이 우리 공군 최초의 전투기 F-51 머스탱을 조종하고 조국 수호를 위해 목숨 바쳐 하늘을 난지 벌써 65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이제 그 빈자리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를 뚫고 뜨겁게 날아오르는 제18전투비행단의 F-5가 채우고 있다. 눈 덮인 강릉기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그 역사 속 현장을 지키는 F-5의 작전현장을 취재했다.
 
취재·사진 : 조문곤(jomoongon@gmail.com)


 
빨간 마후라의 고향 강릉기지
이제 막 떠오른 아침 해가 주변 나무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이내 F-5의 날카로운 제트엔진음이 살을 에는 듯한 새벽바람을 가르며 귓가를 때렸다. 한바탕 엄청난 눈이 내렸던 강릉기지의 활주로는 말끔히 제설작업이 되어 있었다. 활주로 양옆으로 수북이 쌓인 눈이 내린 눈의 양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지난 며칠간 일명 ‘마징가’라 불리는 활주로 제설장비(SE-88)가 쌓인 눈을 날려버리며 기지 곳곳을 종횡무진 했음이 틀림없다. 먼발치로 보이는 눈 덮인 산등성이를 병풍삼아 F-5 여러 대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이륙하고 있다. 기자가 서 있는 곳은 ‘빨간 마후라의 고향’이라 불리며 오늘날 우리 공군의 역사를 대변하는 현장인 강릉기지다.
 

6·25 전쟁 당시 출격을 준비하는 F-51 머스탱과 오늘날 비행을 준비하는 F-5의 모습
 

우리 공군 조종사들의 애국심과 명예의 징표가 된 빨간 마후라가 탄생한 곳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우리 공군 최초의 역사적 단독출격이 이루어진 곳도 이곳 강릉기지였다. 어디 그뿐인가? 6·25 전쟁의 3대 항공전으로 꼽히는 승호리철교 차단작전과 평양대폭격 작전, 그리고 351고지전투 항공지원작전은 모두 강릉기지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들이다. 정전 이후에도 19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항공작전지원 등 동북부 최일선 부대로서 영공방어 뿐만 아니라 각종 대간첩작전 및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해 오고 있다.
어쩌면 ‘빨간 마후라의 고향’이라는 수식어만으로는 강릉기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빨간 마후라 이야기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공군의 군가에 ‘빨간 마후라’가 있다. 가사에서 조종사 자신을 빨간 마후라와 동일시할 만큼 빨간 마후라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어느새 빨간 마후라는 조종사의 명예와 기꺼이 목숨 바쳐 조국영공을 수호하겠다는 충성심의 징표가 됐다. 그런데 강릉기지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볼 때 이 빨간 마후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종사들이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강릉기지기 때문이다.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이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빨간마후라를 걸어주고 있다.
 

매년 고등비행교육 수료식에는 공군참모총장이 새내기 조종사들 한 명 한 명에게 빨간 마후라를 직접 목에 걸어준다. 실습 및 기본비행교육 과정을 포함해 약 1년 8개월에 걸친 길고도 강도 높은 비행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예조종사로 다시 태어난 ‘보라매’들을 공군의 수장이 직접 챙기는 의식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바로 빨간 마후라다.
 
우리 공군의 조종사들이 빨간 마후라를 착용한 것은 강릉전진부대 초대 지휘관이자 강릉기지의 초대 비행단장 김영환 장군이 그 효시다. 강릉기지에서의 우리 공군 첫 단독출격 작전을 실시하고 있던 1951년 11월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이던 김영환 장군(당시 계급 대령)은 공군본부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출장길에 당시 공군 총참모장이자 친형이었던 김정렬 소장의 자택에 잠시 들렀는데, 이때 형수인 이희재 여사가 입고 있던 붉은색 치마가 김영환 장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조종복과 잘 어울리겠는데요?"라고 말하며 빨간 치마 빛깔이 좋으니 마후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이희재 여사가 치마를 짓고 난 자투리 천으로 마후라를 만들어 주었고 김영환 장군이 그 마후라를 착용했는데, 이것이 빨간 마후라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다.
 

사천기지의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 시절의 김영환 장군이 비행을 마치고 비행일지를 기록 중인 모습.
그는 1954년 3월 동해상공에서 F-51을 조종하다 악천후를 만나 실종되었다.
죽음마저 극적이었던 김영환 장군은 우리 공군의 전설적 인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빨간 마후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버린다. 어떤 연유로 조종사들이 하나같이 빨간 마후라를 착용하게 되었는지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김영환 장군이 빨간 마후라를 착용한 것은 애초에 개인적 취향에 따른 멋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독일 육군항공대 에이스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을 흠모했다. 리히트호펜은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로 모자와 장화를 착용하고 다녔는데, 특히 리히트호펜은 자신의 전투기를 전면 붉은색으로 칠하고 공중전에 나서 ‘붉은 남작(Red Baron)’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만큼 붉은색을 좋아했던 리히트호펜이었다.

머플러를 두르겠다는 것도 김영환 장군의 뜬금없는 생각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에 나서는 조종사들은 조종석이 완전히 개방되어있는 상태라 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머플러를 둘렀다. 리히트호펜 스타일의 장교모와 장화를 즐겨 신던 김영환 장군 역시 리히트호펜의 머플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80대의 격추기록을 세웠던 리히트호펜.
평소 붉은색을 좋아했고 그의 전투기 역시 붉은색으로 도색하여 ‘붉은 남작’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편 김영환 장군은 1953년 2월 15일 전대급에서 비행단급으로 승격창설된 제10전투비행단의 초대 비행단장으로 보임됐다. 1953년은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전황이 소모전 양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던 때였다. 그만큼 조종사 손실 및 충원률이 빨라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F-51은 조종이 쉽지 않은 기체였고, 충분한 훈련 없이 실전투입과 전투훈련비행을 병행하면서 사고도 빈번해졌다. 특히 사고로 지상에 떨어진 조종사를 찾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영환 장군은 탐색구조 시 조종사가 눈에 잘 띄도록 하는 방안을 부단장이자 참모장이던 장지량 장군(당시계급 대령)과 논의해 빨간 머플러를 조종사들의 목에 두르는 것으로 결심했다. 그리고 참모를 시켜 읍내에서 붉은색 천을 구입해 가져오도록 했다. 김영환 장군은 비행에 나서는 모든 조종사들에게 붉은색 천을 잘라 목에 두르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공군 조종사들의 목에 빨간 마후라가 둘러지게 된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다만 빨간 천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것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의 조종사들은 미군 제트전투기들의 폐 감속낙하산(drag shute)를 재단해서 목에 둘렀다. 당시 미군의 감속낙하산은 대부분이 흰색이었다. 이 때문에 1953년 7월 휴전을 전후로 우리 공군의 조종사들은 상당기간 빨간 마후라와 하얀 마후라를 혼용해 착용한 적도 있다.


1953년 8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조종사환영대회에 참가한 조종사들.
머플러의 색깔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률적으로 머플러를 착용하고 있다.

 


제18전투비행단과 강릉기지

강릉기지에서 처음 창설되었던 제10전투비행단이 1954년 11월 수원으로 이동해 간 뒤 강릉기지는 제18전투비행단(이하 18전비)과 인연을 맺는다. 1968년 2월 22일 공군본부 직할부대로 제18기지대가 강릉기지에서 창설되었는데, 제18기지대가 바로 18전비의 전신 격의 부대다. 제18기지대는 점차 부대규모를 늘려가 전대급 부대로의 성장을 거쳐 마침내 1977년 6월 1일 비행단급인 18전비로 승격창설됐다.
사실 강릉기지의 기후조건은 전투태세 유지를 생명으로 하는 전투비행단에게 매우 혹독하다. 기본적으로 동해안과 인접해 있어 봄과 겨울에 해무가 자주 발생해 이착륙에 많은 악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름에는 많은 장맛비가, 겨울에는 눈폭탄 수준의 폭설이 비일비재해 제설작업 소요가 대단히 많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강릉기지에서 1953년 2월 창설되었던 제10전투비행단은 불과 2년만인 1954년 강릉을 떠나 수원으로 이동한 바 있다. 이것은 당시 강릉기지에 연결된 철로가 없어 보급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탓도 있지만 특히 하계와 동계의 혹독한 기상 및 기후조건으로 인해 비행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만큼 18전비는 동부전선 최전방 부대로서 그 어느 부대보다 강도 높은 전투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강릉의 혹독한 기후도 극복해야 하는 부담을 항상 안고 있었던 셈이다. 프로펠러 전투기였던 F-51의 퇴역과 오늘날 초음속 제트전투기인 F-5의 운용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강릉의 혹독한 환경은 변함이 없다.



 
18전비 영내에 있는 강릉기지 전공비. 6·25 전쟁 중 올린 전공을 기념하고 산화한 선배 조종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68년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장지량 장군이 건립했다.


최근에 개장공사를 끝내고 새롭게 단장한 영내 역사기념관.
강릉기지를 설치할 당시 만든 제10전투비행전대 정문을 재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강릉기지의 F-5

105·112·205대대 총 3개의 전투비행대대로 구성된 18전비는 창설 이후 F-5만을 줄곧 운용해 왔다. 강릉기지와는 또 다른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18전비가 F-5를 운용하고 있는 것 역시 강릉기지와 무관하지 않다. 동북부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강릉기지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애프터버너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밝히며 이륙하는 F-5.
F-5의 최대이륙중량은 11.2톤급으로 12.3톤급의 T-50보다도 가볍다.

 
F-5는 F-15K나 KF-16에 비해 탑재하고 있는 첨단 전자장비가 적고 무장탑재량도 떨어진다는 비판을 흔히 받는다. 그러나 역으로 기체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정비 및 유지소요가 적은 장비들을 갖춘 F-5는 우리 공군의 전투기중 최단시간 긴급발진이 가능하다. 최전방 전투부대의 임무에서 제1의 목표는 가장 먼저 출격해 가장 먼저 적을 격추시키는 것이다. 불과 수십 km 앞에 북한 공군을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인 강릉기지에서 긴급발진을 위한 준비시간을 최소화하지 못해 시기적절한 요격에 나서지 못한다면 고성능 기체를 갖추고 있다 해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전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F-5를 대체하기 위한 KF-X 사업이 계속적으로 지연됨에 따라 운용기간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F-5에 대해 안전에 대한 염려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강릉기지의 기후와 기상이 안전비행에 많은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혹독한 기후와 거친 운용환경에도 불구하고 2013년 8월 6일 18전비 예하 제205전투비행대대(이하 205대대)는 13만 시간 무사고 비행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205대대가 창설된 1977년 9월 20일부터 기록달성 당일까지 무려 35년 10개월 동안 13만 시간을 비행하면서 단 1건의 비행사고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기록자체도 대단하지만 F-5의 장기취역에 따른 사고위험 증가와 강릉기지가 갖가지 비행 제약요소가 상존하는 환경임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대기록이다.
 


2013년 8월 6일 13만 시간 무사고 비행 대기록을 수립한 KF-5F와 대기록을 자축하는 205대대원들의 모습
 

18전비는 F-5를 두고 운용에 대한 노하우는 세계 최고수준이라 자부하면서도 오래된 기체인 만큼 예측하지 못한 결함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특히 실제로 후계기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계속 운용해야한다는 목표의식을 전 부대원이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조종사 및 정비사, 크게는 전 부대원들 간의 굳건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목표의식이다. 오늘도 18전비의 F-5는 강릉의 거친 바람과 기후를 뚫고 묵묵히 조국영공수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동북부 최전방을 지키는 3개의 창을 상징하는 사진을 연출해 보았다. 앞쪽부터 112대대, 105대대, 205대대 소속 F-5E.
 


18전비의 신념의 조인
공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신념의 조님은 6·25 발발 직후 전투기 1대 없던 우리 공군의 조종사들에 대한 교육훈련지원을 위 미 제5공군사령부가 편성한 바우트-원(Bout-One) 부대의 초대지휘관 딘 헤스(Dean Hess)의 F-51D 머스탱 18번 기체의 별칭이다(‘신념의 조인’ 명칭의 유래와 딘 헤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본지 2014년 4월호
기사 참조).
딘 헤스와 그의 애기(愛機) 신념의 조인은 6·25 전쟁기간 강릉기지에서 출격한 적은 없다. 우리 공군이 강릉에 처음 전개한 것이 1951년 9월의 일인데, 딘 헤스는 100회 출격 후 비작전 지역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미 공군 규정에 의해 1951년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딘 헤스는 우리 공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고, 그의 애기였던 신념의 조인 역시 피를 나눈 한미 동맹의 표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기체다. 아울러 한국 공군의 F-51 중 노즈 아트(nose art: 기수부근에 각종 문자나 그림을 그려 넣는 것)를 그려 넣은 유일한 기체로서의 희소성도 가지고 있다.
 

18전비 영내에 전시중인 F-51D. 국내에 남아있는 2대의 F-51D 중 1대다.
기존의 도색형태는 기체번호나 수직미익 'K'의 크기와 모양, 기수의 ‘신념의 조인’ 글자체 등 부정확한 것들이 많았다.
 


기자가 2014년 1월부터 6월까지 본지에 연재했던 공군 창군 65주년 기획 F-51 역사 복원 프로젝트
은 18전비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통해 지휘관 및 조종사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이 때 강연에서 설파한 내용 중 하나가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F-51 5대 모두 신념의 조인의 역사적 의미를 무색케 할 정도로 고증과 어긋나는 도색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18전비가 나서 역사바로잡기에 나섰다. 18전비는 정훈공보실장 이선미 소령 주도로 18전비 영내에 전시된 F-51을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정을 거쳐 완벽하게 복원해 냈다. 국내에 5대가 남아있는 F-51(단좌형 F-51D 2대, 복좌형 TF-51D 3대) 중 실존했던 딘 헤스의 신념의 조인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는 도색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최근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이 공군사 복원과 역사적 의미 되새기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공군에 역사 재조명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을 본지 2014년 12월호를 통해 보도한 바 있다. 18전비의 이번 작업은 단순히 퇴역전투기의 재도색 차원이 아니라 공군에 불고 있는 공군사 재조명 바람에 부합하는 의미있는 성과다. 뿐만 아니라 공군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강릉기지에 전개하는 18전비가 그에 걸맞게 선도적인 역사바로잡기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은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민간의 공군사 연구에 귀를 기울이고 의미있는 역사복원 작업에 동참한 18전비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최근 고증에 맞게 새로 도색된 F-51. 1951년 5월 전후로 딘 헤스가 조종했던 신념의 조인 최후기형 기체를 재현했다.
독특한 색깔 구성을 가진 국적마크와 윤곽선이 그려진 백색도색 위에 그려진 ‘신념의 조인’ 노즈아트 등 정확하게 재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