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7) 더글러스 DC-4(Douglas DC-4)

1942년에 초도 비행을 실시한 더글러스 DC-4는 탄생 후 50년 이상 민간여객기와 군용기로 활약하면서 세계의 하늘을 지배하였으며 현대적인 항공수송의 시대를 개막한 선구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보잉 247이나 더글러스 DC-3와 같은 선구적인 여객기가 개척한 민간항공사업을 이어받아 등장한 DC-4는 여유 있는 파워와 항속능력, 비행성능으로 안락하고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거리노선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며 대서양 및 태평양을 횡단하는 정기노선을 확립하였다. 한편 2차 대전 당시 군용수송기로도 큰 활약을 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민간회사에 불하한 DC-4는 민간항공노선의 부흥을 주도한 걸작기였다.
 
 

DC-3의 성공으로 놀라운 사업실적을 거둔 도널드 더글러스는 유나이티드항공의 W. A. 패터슨과 제휴하여 새로운 항공수송시대의 선구적인 존재가 될 신형 4발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구상에 의하여 야심적인 설계로 탄생한 신형 4발 여객기가 바로 DC-4(나중에 DC-4E로 명칭변경. E는 Experiment를 의미)이다. DC-4E는 여객기로서는 상식적인 저익 배치의 주익과 대형의 원형 단면을 가진 동체, 여압식 캐빈, 에어컨을 갖추었으며 동체와 수평 미익의 양쪽 끝에 모두 3개의 수직 미익을 설치하였다. 랜딩기어는 DC-3와 달리 앞 바퀴식으로 변경되어 착륙 시에도 승객실이 수평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현대식 여객기였다. 다만 착륙 후 뒤로 넘어질 우려가 있어 안전을 위하여 주기중에는 후방동체 아래에 받침대를 설치할 필요성이 있다. 메인 랜딩기어는 매우 커다란 싱글 타이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륙 후 접어서 주익내부에 수납하도록 하였다.(DC-3는 엔진나셀에 수납). 엔진은 프래트 & 휘트니  R-2180 래디얼 피스톤 엔진을 4대 장착하였으며 주익 앞전의 엔진 나셀에 수용하였다.

최대 52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넓은 객실을 확보한 DC-4E는 1938년 6월 7일에 초도 비행을 한 이후 우수한 조종성을 증명하였으나 성능은 예상외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DC-4E는 더글러스가 처음 제작한 대형여객기인 관계로 기술경험이 부족하여 기체의 강도를 유지하기 위한 설계가 복잡하였으며, 정비 및 운항코스트가 높아 더글러스사와 5개 항공회사가 각 10만 달러씩 부담하여 시작한 개발자금은 점차 증가하여 1대의 시험 제작용 기체를 제작하는데 모두 1,344,600달러의 자금이 투입되었고, 초도 비행의 시점에서 자금을 부담하는 2개의 항공회사(팬 아메리칸 항공과 TWA)가 개발계획에서 탈퇴하였다.

항공 회사들은 더글러스사의 신형 여객기의 성능과 운항경제성에 기대를 걸고 자금을 부담하였으나, DC-4E에는 동력 부스트 방식의 조종장치, 보조동력장치, 교류식 전원 시스템, 캐빈의 여압시스템등의 신기술을 많이 적용한 결과 기술적인 어려움이 많아 개발비용이 증가하였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DC-4E에 적용한 신기술은 현재의 여객기에는 기본적인 시스템이나 1930년대 말의 기준에서는 호화로운 장치로 취급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1대만 제작된 더글러스사의 DC-4E 원형기는 1939년에 일본의 대일본항공(大日本航空)에 여객기로 매각되었으며, 나중에 비행 중 동경만에 추락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LXD1(해군시작 D형수송기)이라는 명칭을 붙여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나카지마 항공기제작회사에서 해체되어 13식 육상공격기 ‘深山’ (G5N1)이라는 4발 중폭격기 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팬 아메리칸 항공과 TWA가 개발계획에서 탈퇴한 후 더글러스사는 나머지 3개 항공회사(아메리칸 항공, 이스턴항공, 유나이티드항공)와 개발방향에 대하여 다시 논의한 결과 DC-4E보다 단순하고 경비가 저렴한 별도의 수송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여 DC-4와 C-54 시리즈가 탄생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더글러스사의 A. E. 레이몬드와 E. F. 버튼이 중심이 된 기술진은 1939년 5월에 수용능력은 DC-4E와 동등하면서도 간소한 설계로 무게를 가볍게한 비여압방식의 새로운 항공기의 설계를 대안으로 추진하였다. 더글러스사의 새로운 여객기 구상에 대하여 아메리칸 항공, 이스턴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이 많은 관심을 표시하였고, 더구나 실제 비행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더글러스사의 신형기 DC-4A의 발주가 이루어졌다.

1939년에 등장한 새로운 DC-4 시작기의 설계안을 살펴보면 기체의 구조를 대폭 경량화하고 큰 어스펙트비를 가진 새로운 주익과 1개의 대형 수직미익을 가진 상식적인 후방동체, 더블 타이어를 장착하고 접는 방식의 메인 랜딩기어, 앞 바퀴식 노즈 랜딩기어를 채택하였으며, DC-4E와는 달리 메인 랜딩기어를 2번 엔진과 3번 엔진의 나셀 내부에 수납하도록 변경하였다. DC-4E보다 무게가 가벼워진 관계로 초기에는 출력 1,000마력급의 엔진 4대를 탑재하도록 구상하였으나, 고객인 항공회사와 의견을 나눈 결과 양산형에는 출력 1,450마력의 R-2000-2SD1G 트윈 와스프엔진을 4대 탑재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탄생한 DC-4A는 주익의 익폭이 35.81m로 짧아졌으며 DC-4E의 특징인 후퇴익도 직선익으로 변경되었다. 전장은 28.63m로 단축되었고, 중량은 약 25%가 가벼워졌으며, 승객은 DC-4E보다 줄어들어 최대 42명까지 탑승이 가능하였다. DC-4A의 경우 DC-4E보다 동체가 단축되어 승객탑승능력이 약간 줄어들었으나, 앞서 개발한 DC-3와 비교할 때 50%나 크게 증가하였다. 엔진은 1,450마력의 프래트 & 휘트니제 트윈 와스프 래디얼 피스톤 엔진을 4대나 장착하여 파워에 여유가 있었다. DC-4E에서 DC-4A로 개발계획이 바뀌면서 가장 크게 변화한 점은 미익의 설계가 변경된 것으로, 종전에 셋으로  나누어져 있던 수직 미익이 하나의 대형 수직 미익으로 교체되었다. 만약 DC-4A의 수직 미익이 DC-4E와 같았더라면 록히드사의 콘스텔레이션과의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용기로 활약한 DC-4
 
DC-4A의 개발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939년 9월 유럽에서는 2차대전이 발발하였고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군대에서는 DC-3 수송기를 대량으로 발주하였다. 따라서 더글러스사는 DC-3 군용기의 생산을 최우선으로 진행하였으나 장래성이 유망한 DC-4A의 개발을 경시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하였다. 이 당시 더글러스사는 민간 항공 회사들로 부터 61대나 되는 발주를 받았으며 34대의 1차분 기체의 제작에 착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에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항공기의 생산계획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전쟁성(현재의 육군성)은 민간형으로 제작중인 34대의 DC-4 민간여객기 양산형을 강제적으로 군용기로 조달할 것을 결정하였고, C-54라는 군용기 명칭이 주어졌다. 이는 아직 제작하지도 않은 민간기를 군용기로 서류만으로 징발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DC-4/C-54는 시험용 기체의 제작을 생략하고 곧바로 군대 마크를 부착한 초도기(미 육군 시리얼 넘버 42-20137)가 1942년 3월 26일에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에서 초도 비행을 할만큼 당시의 전시상황은 급박하였으며, 조종은 존 F. 마틴이 담당하였다. 시험비행 결과 C-54는 우수한 비행성능을 실증하였고 특히 이전에는 꿈으로만 여겨졌던 대양 횡단비행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연료탑재가 가능하였다. 당시 미군이 처음부터 찾고 있던 기체는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어가는 2차 대전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인원과 물자의 장거리수송이 가능한 수송기였으며, 이러한 성능을 보유한 기체가 바로 DC-4/C-54였다. 초기의 기체는 아직 국방색으로 도장하지 않은 민간형 여객기 그대로의 상태였으나 나중에는 인원과 화물을 수송하거나 부상자를 후송하는데 사용하는 군용수송기형의 생산으로 계약이 변경되었다.

기체의 설계가 우수하니 만큼 개발중의 시험비행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공중수송 성능을 보강할 필요성이 긴급 제기되어 미 육군은 기체구조의 개량을 추진하게 하였고, 캐빈 바닥을 강화하고 화물 탑재용 도어와 화물취급장치를 추가한 완전한 군용규격의 C-54A를 발주하였고, 더글러스사는 대규모의 생산라인을 설치하여 대량생산에 착수하였다. C-54 시리즈는 2차 대전 기간에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개량을 거듭하여 각종 군용형이 개발되었으며, 최대 좌석수도 단거리/중거리용은 50석(장거리용은 20석으로 제한)으로 민간형보다 증가하였다. 미 육군에서 C-54의 명칭으로 채택한 DC-4의 비행성능에 주목한 미 해군은 R5D라는 명칭으로 여러 가지 개량형을 채택하였으며 미 육군과 미 해군 납품용으로 모두 1,000대 이상이 제작되었다.



원래 민간여객기로 등장한 DC-4A는 민간항공사의 큰 기대를 모았으며 실제로 발주를 받아놓고 있었으나, 2차대전의 발발로 민간형의 개발과 생산은 일시 중지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C-54 스카이마스터(Skymaster)가 그 자리를 채웠다. 군용기인 C-54A는 1943년 1월에 등장하였고 개량형인 C-54B는 1944년 3월에 등장하여 2차 대전 기간 중에 수송기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기체를 모두 국방색으로 도장한 미 육군 항공대의 스카이마스터는 승무원과 탑승객에게 감동적일 만큼 견고한 기체구조와 더불어 높은 신뢰성을 발휘하였으며, 전쟁의 수행에 필수적인 인원과 물자를 전투지역까지 운반하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미 육군 항공대의 항공수송부대는 급증하는 장거리수송임무를 담당할 조종사가 부족하게 되자 계약직 민간인 조종사와 여성조종사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1대의 C-54A는 VC-54C ‘셰이크리드 카우’라는 명칭으로 개조되었으며, 이 기체는 최초의 대통령전용기로서 오늘날 ‘에어포스 원’이라고 불리는 기체이다. 이 전용기에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쉽게 탑승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제작한 전동식 리프트를 부착하였다. VC-54C는 1944년에 납입하였으며, 1945년 2월에 소련의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회담에 참석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탑승하였다. VC-54C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시작으로 트루먼 대통령도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일반 수송기로 전환되어 1961년 10월까지 사용되었다.

1944년 6월에는 윈스턴 처칠 영국수상도 스카이마스터를 입수하여 전용기로 사용하였으며 영국공군에서 운용을 담당하였다. 처칠 수상은 4발 엔진의 더글러스제 수송기를 이용할 경우 적 전투기의 공격을 받을 경우를 예상하여 방호용 장갑캡슐을 탑재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실효성이 적어 취소되었다. 영국공군이 도입한 10대의 스카이마스터는 대부분이 일반 수송임무에 사용되었으며, 3대는 런던 근교의 영국공군 노솔트 기지에 배치되어 VIP 수송기로 사용되었다.

신뢰성이 높은 기체로 유명한 C-54 스카이마스터는 전쟁 기간 중에 개량을 거듭하였으나 기본설계가 충실하여 기체의 기본구조는 크게 변경되지않았다. 1944년 8월에 등장한 C-54D는 엔진의 출력이 높아진 R-2000-11을 탑재하였으며 380대가 시카고에 위치한 더글러스사의 전시공장에서 제작되었다. C-54E는 D형에서 연료탑재량을 증가한 개량형으로 산타 모니카의 조립라인에서 모두 125대가 제작되었다. 미 육군 항공대의 스카이마스터 신규 제작분 발주는 E형과 동일한 C-54G를 162대 제작하는 것으로 모두 종료하였으며, 이 기체는 산타 모니카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스카이마스터는 일반적으로 2명의 조종사, 항법사, 항공기관사, 무선통신사, 2명의 로드마스터 등 7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였다. C-54는 동체가 지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화물의 하역작업이 쉽지 않았으며, 로드마스터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화물의 탑재량은 중단거리 비행의 경우 12,000kg이지만, 장거리 비행의 경우 9,000kg로 줄여야만 항속거리가 부족할 경우 대체비행장까지 비행이 가능하도록 유연성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러한 적재화물의 중량을 계산하는 임무를 로드마스터가 담당하였다. 한편 지상에 착륙한 상태에서는 뒷부분의 화물부터 차례대로 하역작업을 해야 기체가 뒤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도 로드마스터의 담당 임무였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성능을 보유한 록히드 L-049 콘스텔레이션와 비교할 때 스카이마스터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군용수송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2차 대전 기간 중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을 79,000회 이상 횡단하였으며,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노선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인원과 작전물자, 보급품을 수송하였다. 수많은 수송작전이 스카이마스터를 투입하여 수행된 반면에, 전투 중에 손실된 스카이마스터는 4대에 불과하다.
미 해군은 스카이마스터를 수송기로 채택하면서 독자적으로 R5D라는 명칭을 붙였으며, 모두 331대의 스카이마스터가 R5D, R5D-1이라는 제식 명칭으로 미 육군 항공대를 위한 생산라인에서 미 해군과 미 해병대로 인도되었고 연안경비대도 14대를 사용하였다.
 
민간항공업계에서의 스카이마스터
 
2차대전이 종전되면서 미 육군과 해군은 보유중인 항공기를 대폭적으로 축소하였고, 민간항공회사가 다수의 C-54와 R5D 중고기를 구입이나 임대의 형태로 입수하였다. 더글러스사도 전쟁이 끝난 후 민간항공기의 대량수요를 예측하고 2종류의 DC-4 신형기인 DC-4-1037과 DC-4-1009를 시장에 투입하였다. 이 신형기는 C-54 시리즈를 사용하면서 실시한 개량작업을 반영하여 재설계한 항공기이다.

민간 화물수송시장을 겨냥하여 개발한 DC-4-1037은 군용 파생형에 채택하였던 대형 화물용 도어를 표준사양으로 설치하였다. 한편 DC-4-1009에는 화물용 도어가 없으며 주간 비행용 사양일 경우 44명의 승객과 수하물, 화물을 적재하고, 야간 비행용 사양일 경우 침대를 설치하여 22명의 승객과 수하물, 화물을 적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항공기 시장에는 군용기로 사용되었던 대량의 중고 스카이마스터가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었기 때문에 새로 제작한 스카이마스터는 79대에 불과하였다. 더글러스사는 자사의 C-54 성공에 거꾸로 손해를 입은 격이 되고 말았다.

DC-4의 초기 개발단계에서부터 지원을 하였던 아메리칸 항공, 유나이티드항공, 이스턴항공은 1946년에 국내선에 처음으로 DC-4를 취항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아메리칸 오버시즈항공을 비롯한 여러 항공사는 대서양횡단노선에 DC-4를 이미 운항 중이었다. 한편 팬 아메리칸 항공, KLM, 에어 프랑스, SAS, 사베나항공, 스위스항공 등은 북대서양노선을 개설하면서 DC-4를 투입하였다. 1947년까지 DC-4는 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남태평양 군도, 남아메리카의 여러 항공사에서 운용되었으며, 대부분의 기체는 중고 C-54를 민간규격으로 개조한 기체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제작된 DC-4의 파생형 중의 하나는 캐나데어사가 라이센스 생산한 DC-4M으로, 1946년 7월에 초도 비행을 하였다. 이 기체는 롤스 로이스제 마린 626 직렬엔진 4대를 탑재하고 여압식 캐빈을 설치한 고급형이다. 합계 46대의 DC-4M이 생산되어 C-4 아르고노트, 영국해외항공(BOAC), 트랜스 캐나다항공에 인도되었다. 특이한 것은 캐나다공군이 24대의 DC-4M을 구입하여 노스 스타(North Star)라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더글러스 DC-4는 각 형식에 따라 기내의 배치에 차이가 있으며, 기본형은 승무원 4명과 승객 44명으로 좌석간격을 여유 있게 배치하였고 고밀도 배치를 할 경우 최대 86석을 배치할 수 있었다. DC-4M의 경우 모두 이코노미 클래스로 배치하여 최대 62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도록 하였다.
DC-4는 많은 기록수립비행을 실시하였으며 항공역사상 최대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1948년부터 1949년까지의 베를린 공수작전에 크게 활약한 주역이기도 하다. 베를린 공수작전에는 많은 수송기가 동원되었는데 당시 미 공군이 보유한 441대의 C-54중에서 70%가 넘는 312대가 투입되었고 미 해군의 R5D도 다수가 참가하였다. DC-4는 현대적인 항공기로 출현하여 전쟁 후 주요 항공회사에서 주력 항공기종으로 활약하였으나 항공기술의 발전과 신형여객기의 대거 등장으로 급속하게 자취를 감추고 중소항공회사에 넘겨졌다.

DC-4의 발전형으로 등장한 DC-6의 등장으로 주요 항공사들은 DC-4의 처분을 시작하였으나, DC-4는 우수한 초기설계의 덕분에 중소 항공회사에 의하여 장기간 운항하였으며, 군용형인 C-54도 미군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장기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도 1953년 10월에 대한항공공사에서 DC-4를 인수하여 취항하였으며, 한국공군도 1966년 6월에 C-54를 도입하였으며 같은 해 9월 한국에서 월남까지 장기리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C-54는 1966년 10월에 한월간 장거리공수임무를 위하여 창설한 은마부대에서 활약하였으며, 1992년 3월에 퇴역할 때까지 무려 26년간 활약하고 C-130 수송기로 교체되었다. C-54는 현재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여러 기념관에 C-54가 전시되어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종이기도 하다.


 
[더글러스 DC-4의 파생형]
C-54 : 26석을 설치한 최초의 인원 수송형. 엔진은 출력 1,350마력의 R-2000-3 래디얼 피스톤 엔진 4발. 24대 제작
C-54A : 완전한 군용 규격형. 병력 50명 또는 14,742kg의 화물을 탑재. 엔진은 출력 1,350마력의 R-2000-7 래디얼 피스톤 엔진 4발. 252대 제작
C-54B : C-54A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주익내부에 연료탱크를 설치하여 동체내부의 보조연료탱크 2개를 폐지한 개량형. 초기형은 출력 1,350마력의 R-2000-3 래디얼 피스톤 엔진을 장착하였으며 후기형은 R-2000-7 래디얼 피스톤 엔진을 장착.  220대 제작
VC-54C :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용기로 C-54A를 개조하여 1대를 제작. ‘셰이크리드 카우’라고 불림
C-54D : 스카이마스터의 주요 양산형. 기본적으로 C-54B와 같으며 출력 1,350마력의 R-2000-22 엔진을 탑재. 380대 제작
C-54E : C-54D의 객실 뒷부분의 보조연료탱크 2개를 폐지하고 주익에 탱크를 설치한 개량형. 인원수송(50석), 화물수송(14,742kg), 참모진 수송(44석) 등 임무에 맞게 신속한 전환이 가능하도록 특별히 설계된 캐빈을 채택. 125대 제작
C-54G : C-54E를 기본으로 한 인원 수송형. R-2000-9 엔진을 장착. 162대 제작
R5D-1 : 미 해군에 이관된 C-54A. 56대 이관.
R5D-2 : 미 해군에 이관된 C-54B. 30대 이관.
R5D-3 : 미 해군에 이관된 C-54D. 95대 이관.
R5D-4 : 미 해군에 이관된 C-54E. 20대 이관.
R5D-5: C-54G와 동일한 해군형으로 주로 연안경비대에서 사용.
DC-4-1009 : 전후에 제작된 민간형으로 최대 44석의 여객기. 나중에는 최대 86석으로 증가.
DC-4-1037 : 전후에 제작된 민간용 화물수송기.

[제원]
 
더글러스 DC-4-1009
 
형식 : 수송기
승무원 : 4명
전폭 : 35.81m
전장 28.60m
전고 : 8.38m
주익 면적 : 135.63㎡
엔진 : 프래트 & 휘트니 R-2000-2SD13G 트윈 와스프 래디얼 피스톤 엔진(정규출력 1,450마력) ×4대
공허중량 : 19,640kg
최대이륙중량 : 33,112kg
페이로드 : 승객 최대 86명
최대속도 : 451km/h(고도 4,267m)
순항속도 : 365km/h(고도 3,005)
실용상승한도 : 6,800m
항속거리 : 4,023km(페이로드 5,189kg)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