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29) 제트여객기 시대를 열다 보잉 민항기의 계보 Boeing 737(part 1)

제트여객기 시대를 열다
보잉 민항기의 계보
 


세계 1·2차 대전을 거치며, 보잉은 고속 성장했다. 하지만 보잉의 앞에는 여전히 더글러스가 있었고, 여객기 시장에서도 이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돌파구가 된 것은 제트여객기. 미국 최초의 제트여객기 보잉 707을 기반으로 보잉은 항공시장 선두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나온 707,727,737 시리즈는 보잉을 성공으로 이끌며, 세계 최대 항공사의 지위를 부여했다.
 

제트여객기 707, 보잉 성공의 서막
1930년대 중반, 미국의 민간항공시장은 여행객의 증가와 항공기의 발달에 힘입어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성공의 가도를 달린 것은 더글러스였다. 혜성처럼 등장한 더글러스 DC-3 프롭여객기는 여행객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따뜻한 객실에서 기내식 서비스를 받으며 신문을 읽을 수 있는 환상적인 기종이었다. 특히 기체를 확대해 개발한 DC-4 여객기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해 미국 국내선은 물론이고, 중간 기착으로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성능을 갖췄다.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DC-3, DC-4는 군용 수송기로 전환됐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2,000대가 생산됐다. 보잉도 2차 대전 당시 B-17 및 B-29 폭격기로 큰 성공을 거뒀다. B-29 폭격기를 개조한 C-97 대형 수송기와 KC-97 공중급유기도 900대나 생산됐다. 그러나 여객기 시장에서는 경쟁사 더글러스와 대조적으로 초라한 판매실적을 보이고 있었다. C-97 수송기를 민간 여객기로 바꾼 보잉 377 여객기는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불과 56대만 판매돼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대 중반, 보잉의 최고경영자 윌리엄 M. 앨런은 미국 최초의 제트여객기 보잉 707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시도해 제트여객기 시대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다. 당시 많은 항공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엔지니어였던 것과 달리 앨런은 변호사 출신이었다. 앨런은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없지만 회사가 크게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평을 얻고 있었다. 707 프로젝트가 너무 큰 위험을 안고 있다며 많은 사람이 주저할 때 그는 성공을 확신하고 결단을 내렸다. 완성된 보잉 367-80은 첫 번째 비행시험에서 멋진 비행을 선보였다. 707시리즈는 여객기와 군용기를 합쳐 1,000대가 넘게 판매되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이로써 보잉은 1930년대 DC-2가 등장한 이래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민간여객기 시장에서 더글러스를 큰 격차로 추월할 수 있었다.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앞서 제트 여객기 분야의 선두주자로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게 됐다.




처음 개발한 707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4발 대형 여객기로 국제선 노선을 개척했다. 그러나 707을 기본으로 중단거리 노선용으로 개조한 720은 기대와 달리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보잉은 720의 실패를 인정하고 약점을 보완한 기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엔진을 3기로 줄여 경제성을 높이고 활주로가 짧은 지방공항에서 운항이 가능한 727을 개발한 것이다. 727은 큰 성공을 거뒀다. 흔히 707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2세대 여객기로 불리는 727은 미국 국내 노선에서 큰 환영을 받으며 무려 1,800여대가 판매됐다.



보잉이 2가지 기종으로 제트여객기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던 당시 더글러스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한 DC-8 기종을 선보였다. 프랑스는 슈드 카라벨을 개발해 중단거리 노선에 도전했고 영국은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보잉과 한판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707과 727이라는 명작의 아성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보잉은 한동안 제트여객기 시장에서 호황을 누렸다.


 
소형 여객기 시장 확산, 737로 역전
당시 미국의 중장거리 노선에서는 구형 프롭 여객기가 점차 사라지고 신형 제트여객기로 대체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지방노선에서 운항되던 모든 프롭 여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현재도 여객의 수요가 적은 단거리 지방노선의 경우 터보프롭 여객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제트여객기가 처음 등장했던 1960년대 초반에는 대부분의 지방노선에서 프롭 여객기가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에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DC-3, DC-4는 전쟁이 끝나고 다수가 민간항공회사에 싼 값으로 매각됐다. 저렴한 가격의 프롭 여객기는 단거리 지방노선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일부 구형 기종을 대체하고자 콘베어 CV-440, 록히드 L-188 Electra 같은 터보프롭 기종이 등장했으나, 가격과 성능 면에서 중고 DC-3, DC-4를 능가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으로 1960년대, 미국의 국내선 중 대도시 노선은 727이 주력으로 자리를 잡아갔지만,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 노선의 경우 아직 프롭 여객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고 여객기가 노후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체 기종이 필요해졌다. 이런 시장의 수요를 빠르게 파악한 기종은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BAC 1-11과 DC-9다. 이들은 727이 장악하기 힘든 단거리 소형 여객기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DC-9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더구나 영국에서 생산하는 BAC 1-11까지 미국의 안방시장을 점령했지만, 당시 보잉은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DC-9는 1966년 69대, 1967년 153대, 1968년 202대를 판매하는 등 해를 거듭하면서 판매량이 크게 늘고 있었다.

뒤늦게 시장의 상황을 파악한 보잉은 기존의 727보다 작은 국내선 전용 기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 노선은 비행시간이 짧기 때문에 이·착륙이 빈번하고 충분한 비행고도를 갖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 다시 하강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지방공항은 활주로가 짧고 탑승객이 많지 않아 여객터미널도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런 공항에 727의 취항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등장한 더글러스 90인승 DC-9-15은 쌍발 엔진과 더불어 넓은 주익과 플랩을 갖추고 있어 지방공항에 취항하기에 적당한 기종이었으며, 가격도 727보다 저렴했다. 결국 보잉은 DC-9와 직접적으로 경쟁할 새로운 기종을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1964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개발을 시작한 보잉은 이미 경쟁기종들에 한참 뒤지는 상황이었다. 아메리칸항공과 델타항공은 이미 DC-9와 BAC 1-11 구입을 결정했고, 유나이티드항공과 이스턴 항공 역시 DC-9을 구입하기로 합의를 보고 있었다. 보잉으로서는 미국의 4대 항공사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잉의 입장에서는 어렵게 결정한 신형 100인승 제트여객기의 개발을 중단할 수 없었다. 잘못하면 시장 전부를 내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단거리 노선의 수요가 많은 서유럽에서 새로운 여객기가 필요한 항공사를 찾아 영업활동에 나섰다. 때마침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에서 프랑스제 슈드 카라벨이나 영국제 BAC 1-11이 아닌 새로운 100인승 기종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루프트한자 항공도 단거리 노선용 기종이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보잉은 겨우 21대의 주문만 받을 수 있었다. 보잉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100대의 주문량을 확보해야 안정적인 사업을 할 수 있었지만 최대 수요처인 미국의 4대 항공사가 이미 경쟁기종을 선택한 상황이라 그나마 주문을 하는 고객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겨우 사업을 시작한 보잉은 유나이티드항공에게 제안을 던졌다. 만약 737을 구매하면 납품할 때까지 운항 대체 기종으로 727을 무상 임대해준다는 것이었다. 유나이티드항공은 원래 DC-9를 구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고 대체 기종까지 무상임대를 제공한다는 보잉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보잉은 미국의 주요 항공사인 유나이티드항공과 확정 40대, 옵션 30대의 계약을 성공했고 추가 옵션을 포함해 최대 91대의 물량을 확보, 개발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1964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737은 설계를 마치고, 1967년 4월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으며 1968년 루프트한자 항공에 납품을 시작했다.

737은 단거리 노선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운항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개념을 도입, 개발된 기종이다. 우선 기장, 부기장, 기관사 등 3명의 승무원이 필요한 727과 달리, 기체의 상태를 자동 점검하는 시스템을 통해 기장, 부기장 2명이서 운항이 가능하게 했다. 이는 경쟁기종인 DC-9와의 경쟁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707의 4인 승무 조종실의 레이아웃을 720, 727까지 고집한 점을 고려해보면 보잉의 입장에서는 매우 과감한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승객이 적은 단거리 노선에 적합하게 727과 같은 JT8D 터보팬을 쌍발 엔진으로 채택, 기체의 레이아웃을 단순하게 배치함으로써 생산비용을 절감했다. 또한 727의 경우 후방동체에 3기의 엔진을 집중 배치해 구조적으로 복잡했다. 특히 가운데 위치한 엔진을 정비하려면 작업이 매우 번거로웠다. 그러나 707과 같이 엔진을 주익 아랫부분에 매다는 방식으로 환원한 결과 엔진의 정비가 매우 편리해졌다. 동체는 707에서 이어져온 3+3 배치 방식을 채택해 개발비를 절감했는데, 다만 100인승에 맞춰 동체의 길이를 727보다 축소했다. 727 동체의 형태를 이어받으면서 100인승 여객기에 맞추다보니 기체는 굵고 짧은 형태가 됐다.




한편 비행성능을 좌우하는 주익의 설계는 737의 가장 큰 특징인데, 시설이 빈약해 활주로가 짧은 지방공항에서 이·착륙하기 위해 주익의 앞쪽과 뒤쪽에 폭이 넓은 플랩이 설치됐다. 물론 727에도 대형 플랩이 설치됐었지만, 737에는 폭이 더 넓은 플랩이 적용됐다. 대형 플랩이 발휘하는 양력의 증가 덕분에 737은 짧은 활주로에서 이륙해 빠른 시간 내에 순항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또한 737은 소형 엔진을 주익 가까운 부분에 장착해 착륙장치의 길이를 매우 짧게 설계함으로써 비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착륙장치의 바퀴를 덮개 없이 그대로 노출시켜 브레이크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냉각되도록 했다. 높이 상승하지 않으므로 착륙장치가 추운 기온에 얼어붙는 일도 적었다.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려는 의도로 과감한 설계를 시도했으나 나중에 737 기종이 점차 3세대, 4세대로 개량되는 과정에서 대형 터보팬 엔진이 등장하면서 엔진을 설치할 공간이 부족하게 돼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737은 민항기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서 항공시장에서 보잉의 입지를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