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1) BOEING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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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객기 분야의 대표적인 회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보잉을 꼽을 것이다. 모델 747 ‘점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배출한 보잉사는 시애틀에서 자그마한 규모로 창업하여 20세기 초기의 민간 항공분야의 태동기에 항공분야의 무한한 열정을 품고 개척정신으로 우편물 배달용 항공기, 소형 군용기, 소형 여객기를 주로 제작하면서 사세를 착실하게 성장하는 신예 메이커였다. 이러한 보잉사가 최초로 제작한 본격적인 여객기가 바로 모델 247이며 경쟁 상대였던 더글러스 DC-2와 함께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민간여객기의 시대를 연 선구적인 기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델 247은 보잉사를 민간 여객기 제작사로서 위치를 확보하게 한 결정적인 기체이기도 하다.

비록 보잉 모델 247은 판매 대수면에서 많지 않고 취항 기간면에서도 짧지만, 항공 역사에 있어서 큰 발자취를 남기 기체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본다면 작은 크기의 평범한 항공기로 생각할 수 있으나, 변변한 여객기가 없었던 1930년대의 항공기 제작기술을 대폭 향상시킨 선구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보잉 247의 등장

1930년대 초, 보잉 에이플레인 컴퍼니(Boeing Airplane Company)는 당시의 항공기 설계기술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의 신형 항공기를 제작하였다. 그 중 하나는 최초의 현대적인 수송기라고 알려져 있는 모델 200 모노메일(Monomail)이며, 금속으로만 제작한 모노코크 구조의 기체구조, 저익 배치의 캔틸레버식 대형 주날개, 완전히 접어 넣을 수 있도록 한 랜딩기어를 사용하였고 유선형의 기체에 단발 엔진을 탑재하여 우편 및 화물수송기로 활약하였다. 1930년대에 등장한 기체로서는 설계 기술면에서 같은 시기의 다른 항공기보다 앞서 있었다. 한편 다른 하나의 항공기는 미 육군을 위하여 개발한 B-9 쌍발 폭격기로서 유선형의 기체에 곡선으로 처리한 엔진 나셀을 채택하여 당시의 단발엔진 전투기보다 오히려 성능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모노메일과 B-9은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앞서가는 항공기이지만 대량 발주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보잉사의 기술진이 쏟은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으며, B-9의 설계단계에서부터 보잉사의 필립 G. 존슨 (Philip G. Johnson) 사장과 클레어 엑트베드 (Clairmont L. Egtvedt) 부사장은 모노메일과 B-9 양쪽의 혁신적인 특징을 활용하는 항공기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미국 최초의 완전금속제 유선형여객기인 모델 247의 등장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32년 항공회사에 제안한 사양은 확실히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델 247은 550마력의 프래트 & 휘트니 S1D1 와스프 성형(星型) 엔진 2기를 장착하고 고정피치의 3엽 프로펠러를 구동하며, 캔틸레버식 주날개에 링 타입의 나셀을 사용하였다. 메인 랜딩기어는 주날개의 아랫 면에 위치하며, 타이어의 일부가 일부 노출되도록(지금의 A-10 공격기와 같이) 설계하였다. 다만 테일 랜딩기어는 인입식이 아니었다. 랜딩기어의 작동은 전기장치로 움직이며 긴급 시에는 수동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기내에는 10개의 좌석이 설치되며, 좌석은 조절 가능한 리크라이닝 암체어를 채택하였고 좌석간격은 102cm를 확보하였다. 이밖에도 각 좌석에는 넓은 창, 실내등, 개별 독서등, 최신 난방 환기장치가 채택되었다. 또한 방음시스템을 설치하여 엔진의 소음이 기내로 들어오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모델 247은 근대적인 여객기로서 혁신적인 항공기였으며 당시에 사용중인 1차대전의 폭격기와도 같은 형태의 초보적인 여객기와는 완전히 차별화 된 기체였다.

객실 뒷부분에는 화장실과 1.7㎥의 우편, 화물실이 설치되었다. 당시 다른 항공기라면 엔진이 장착되었을 유선형의 기수 내부에는 엔진 대신에 최신형 무전기와 180kg까지의 우편물이나 화물을 수용할 수 있는 화물실이 설치되었다. 양쪽의 화물실에는 외부에서 화물을 싣고 내릴 때 사용하는 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승객이 자신의 수하물이 혹시나 분실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공항에서 신속한 서비스를 실시하여야 하였으며, 이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었다.

콕피트는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운항하며, 승객을 위한 객실승무원을 탑승 시켰다. 콕피트도 마찬가지로 2기의 방위 자이로, 나침반, 고도계, 승강계, 선회경사계, 인공 수평의 등 각종 최신기술을 채택하였다. 항법등과 착륙등, 낙하산이 부착된 조명등과 같은 야간비행장비도 표준장비로 설치되었다. 또한 주날개와 꼬리날개의 앞부분에는 뜨거운 공기를 사용하는 팽창식 결빙 방지용 부츠를 옵션으로 설치하여, 기체가 높은 고도로 상승하여 비행고도를 유지할 때 얼음이 달라붙지않고 안정적인 비행이 가능하도록 배려하였는데 이는 민간수송기로는 매우 새로운 특징이었고 훗날 2차대전시 고공을 비행하는 폭격기에도 사용한 중요한 기술이었다(B-17 폭격기나 C-54 수송기의 주날개 앞쪽의 검은색 부분이 방빙 부츠이다).

무엇보다 모델 247의 가장 큰 장점은 기체구조가 완전한 밀폐식으로 제작되어 높은 고도를 비행할 때 객실을 여압하여 따뜻한 공기를 공급하면서 승객들이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다.

 

최초의 승객

1932년 보잉 에어트랜스포트 시스템(보잉 에어트랜스포트, 내셔널 에어트랜스포트, 퍼시픽 에어트랜스포트, 버니 에어라인즈로 구성, 나중에 유나이티드 항공으로 재편됨)은 설계 단계에 있던 모델 247을 70대 발주하였다. 초도기(NC13301)는 1933년 2월 8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존슨 사장과 엑트베드 부사장의 장래의 항공기설계에 대한 발상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보잉 247은 종전에 사용하던 포드 트라이모터와 비교할 때 탑재량은 다소 작으나 80km/h~100km/h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었다. 또한 쌍발기로서 1기의 엔진이 정지한 상태에서도 최대이륙중량으로 상승이나 비행고도의 유지가 가능하여 항공역학적으로 우수한 설계의 항공기였다.

양산기간 중에 59대의 모델 247이 유나이티드 항공(구 보잉 에어트랜스포트)에 인도되었다. 한편 2대(D-AGAR, D-AKIN)가 독일의 루프트한자항공에 인도되었다. 30번째의 양산기체는 임원전용기로 개조되어 보잉 그룹에 속한 유나이티드 에어크래프트사의 프래트 & 휘트니 부문에 납입되었다. 이 기체(NC13300)는 14기통 625마력의 프래트 & 휘트니제 와스프 주니어 엔진을 2기 탑재하여 최대속도 320km/h, 연료탑재량 1,100ℓ, 항속거리 1.045km의 성능을 발휘하였으며, 객실 내부는 호화로운 내장과 6개의 좌석을 설치하여 모델 247A로 불렸으며 통상적인 기체와 구별되었다. 이 기체의 초도 비행은 1933년 9월 14일로서 유나이티드 에어크래프트사에 11월 4일에 인도되었다. 그 후 회사의 전용기로 활약하였으며, 2차대전후에는 테스트베드로 사용되었다.

 

유나이티드항공의 직원들과 조종사, 승무원들.(PHOTO WIKIPEDIA)



개량형 모델 247D의 등장

1933년, 유나이티드 항공은 자사가 보유중인 모델 247 초도기를 보잉사에 반환하면서, 제안중인 모델 247D의 개발을 위한 테스트베드기로 제공하였다. 모델 247은 새로운 수직 미익을 채용하여 방향타의 형태가 바뀌었으며, 최종적인 형태는 당초의 제안과 비슷하게 따랐다. 종전의 모델 247과 가장 큰 차이점은 방향타를 종래의 금속제에서 천으로 교체한 점으로 승강타의 금속제 포장부분에도 교체하여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모델 247D에 채택한 개량은 해밀턴 스탠더드제 가변 피치 프로펠러를 구동하는 기어식 프래트 & 휘트니제 S1H1G 와스프 엔진, NACA설계의 저항감소 엔진 카울링, 245ℓ의 연료를 추가하였으며, 종전에 앞쪽으로 경사진 콕피트 윈드실드를 뒤쪽으로 경사지도록 개량하였다. 이 콕피트 윈드실드는 종전의 모델 247에도 채택되어 앞쪽으로 경사진 윈드실드를 개조하기도 하였다. 가변피치 프로펠러의 채택으로 모델 247D는 이륙 및 순항성능을 최적으로 설정하여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게 되었다. 모델 247D의 순항속도는 304km/h로 초기 모델의 최대속도보다 빨랐다. 최대속도는 320km/h이며 항속거리는 780km에서 1,200km로 대폭 연장되었다. 순항고도는 6,250m에서 8,290m로 높아졌으며, 최대이륙중량도 338kg이 증가하여 항공회사의 요구사항을 만족하였다. 유나이티드 항공이 제공한 개조기체는 모델 247E로 불리며 테스트가 마친 후 유나이티드 항공에 반환하였다.

모델 247D의 양산 초도기는 루프트한자 납입을 위하여 제작하였으나 발주가 정식으로 확정되지않아 필립스 석유사의 임원전용기(하늘을 나는 사무실이라고 불렸다)로 매각되었다. 이 기체는 필립스사의 유명한 항공연료 브랜드인 ‘66’을 본떠서 민간등록기호 역시 NC2666을 사용하였다. 유나이티드 항공이 발주한 70대의 모델 247중에서 인도하지 않은 나머지 기체는 모두 모델 247D형으로 인도하였으며, 유나이티드 항공의 보유 기종을 순차적으로 교체하였다.

 

모델 247의 운영 실적

모델 247을 민간항공사업에 투입한 유나이티드 항공(UAL)은 미국대륙을 횡단하는 여객, 우편수송업무의 비행시간을 단축을 선도하여, 종전의 27시간의 비행시간을 19시간 30분으로 단축하였으며, 수백명의 승객이 이 운항편을 이용하였다. 그 후 2년간 모델 247은 동급의 속도성능을 갖춘 대형 여객기인 더글러스 DC-3가 등장할 때까지 항공업계에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더글러스 여객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보잉사에는 ‘항공기제조와 항공수송의 개척으로 발전에 성공한 회사’라는 호칭이 붙여졌으며, 항공관계자에게는 영광인 구겐하임상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1938년 1월까지 보잉사는 미국과 해외항공회사에 30대의 모델 247을 판매하였을 뿐이었다.
 

 

항공레이스에서의 활약

UAL이 보유한 1대의 모델247D는 특별히 높은 명성을 보유하였는데, 이 기체는 1934년에 개최된 항공레이스에 4개월간 임대형식으로 출전하였다. 에어쇼 파일럿인 로스코 다나 대령과 유명한 항법사인 크라이드 팬본(원래 곡예비행사 출신)이 구성한 팀은 모델 247(NR257Y)는 영국 런던에서 호주 멜보른에 이르는 맥로버드슨 항공레이스에 출전하였다. 주요 스폰서는 하인즈 식품과 헐리우드의 영화 회사인 워너 브러더즈로, 기체는 워너 브러더즈 코메트호로 명명하였다. 247D는 장거리 고속비행을 위하여 원래의 기체에서 필수적인 장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떼어냈으며, 객실내부에 8개의 보조연료탱크를 설치하여 모두 4,260ℓ의 연료를 탑재하였다. 그러나 항공레이스의 주최자는 다나 대령에 대하여 기체가 공인 중량제한을 초과하여, 레이스 시작 전에 4개의 340ℓ들이 연료탱크를 봉인하도록 명령하였다. 따라서 개조작업을 통하여 연료, 윤활유계통의 배관을 신품으로 교체하고 윤활유탱크도 대형으로 개량하였다. 다나와 팬본은 특별 제작한 저주파단파무전기를 지상과의 교신에 사용하여 비행 중에도 북아메리카의 통신사에게 생생한 뉴스를 보낼 수가 있었다.

미국 내에서의 시험비행이 끝난 후 NR257Y는 분해되어 영국에 선박 편으로 운반되었으며 1934년 10월 20일 아침, 대회의 참가기가 대기하고 있는 서포크의 밀덴홀 영국공군기지를 2번째로 이륙하였다. 다나와 팬본은 아테네, 바그다드(다나의 부주의한 착륙으로 사고가 발생), 카라치, 아라하베드, 아롤 스타(연료보급을 위하여 예정 외 착륙), 싱가포르, 쿠판, 다윈, 챨즈빌, 버크(엔진고장으로 강행착륙)를 경유하여 멜보른에 도착하였다. 소요시간은 92시간 55분 38초로서 NR257Y는 속도부문에서 3위를 기록하였으며, KLM의 더글러스 DC-2 위버호의 네덜란드인 조종사가 핸디캡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다나는 2위를 차지하여 상금 1,500파운드를 받았다. 이 레이스는 2종류의 상을 수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레이스가 끝난 후 기체는 미국으로 운반되어 항공회사에서 표준기체로 다시 개조되었다.

이 기체는 1937년 1월까지 UAL에서 사용되었으며, 같은 해 유니온 일렉트릭사의 중역용 수송기로 매각되었다. 그 후 미국 민간항공국에서 14년간 비행에 사용되고 1953년 7월 17일에 스미소니언 대학에 기증되었으며, 현재 맥로버트슨 항공레이스에 참가할 당시의 모습으로 도장 되어 워싱턴DC의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보잉247은 에어레이스에 참가해 속도부문에서 3위를 차지했다. 한 승무원이 에어레이스 참가 기념 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PHOTO WIKIPEDIA)
 

 

전쟁 중의 247D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민간항공회사에서 사용중인 27대의 보잉 247D는 미 육군 항공대에 징발되어 C-73수송기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모델 247D는 화물이나 무장병력의 수송에 사용하기에는 객실 내부가 좁아 적합하지 않았다고 판명되어, C-73은 주로 항공승무원의 전개공수에 사용되었으며 전쟁 말기에는 다발기 승무원의 계기비행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기체는 미 육군항공대가 운영하기에 적합하도록 개조되었으며, 엔진은 군용 표준인 프래트 & 휘트니제 R-1340-AN1 와스프로 교체되었다. 1944년 모든 기체가 군무에서 해제되어 중소항공회사와 차터편 운항회사 및 개인 소유주에게 매각되었다.

민간항공회사가 소유한 8대의 247D는 캐나다공군에 인도되었으며, 그 중 1대(DZ203)는 영국공군에 판매되어 초기의 무시계 착륙장치의 시험기 및 영국공군의 전신전화연구소에서 사용하였다. 시대를 선구하는 이러한 연구 덕분에 현재 많은 여객기가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계기착륙시스템(ILS)이 개발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보잉 247은 민간 여객기분야에서 획기적인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라이벌인 더글러스 DC-2, DC-3의 등장으로 대량 생산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여객기 메이커로서 보잉의 명성을 높여준 기체였으며, 1933년에 등장한 이래 유나이티드 항공의 주력 기체로서 활약하여 오늘날의 유나이티드 항공으로 발전하도록 확고한 명성을 확립하게 한 동력원이 되었다. 다만 2차대전의 발발로 민간기로서의 운항을 중지하고 군용기로 전환되어 아쉬움을 남기었으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초창기의 프로펠러식 여객기로서는 획기적인 성능을 보유한 기체로서 훗날 등장한 많은 여객기 및 폭격기에 큰 영향을 준 기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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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247D 제원>

기체크기 : 전폭 22.56m, 전장 15.72m, 전고 3.60m, 주익면적 77.68㎡
엔진 : 프랫 앤 휘트니 S1H1C 와스프 성형 엔진(정규출력 550마력)×2기
중량 : 공허중량 4,148kg, 최대이륙중량 6,192kg
페이로드 : 승객 최대 10명 및 181kg의 우편물
최대속도 : 322km/h(최적고도)
순항속도 : 304km/h(고도 8,000ft)
항속거리 : 1,199km


글/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