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교 기장의 Flight Bag (1)



[하늘길의 적색경보, 적란운과의 한판 사투]
 
항공대학 재학 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비행생활이 이제 40년을 훌쩍 넘어 몇 달 후면 조종간을 놓아야 한다. 흔한 말로 아쉬운 마음 반, 시원한 마음 반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그 가운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비행생활, 민항기장으로의 임무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몇몇 순간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하늘의 불청객 적란운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인 2010년 8월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중국항공사에서 747 화물기 기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당시 항공사에서는 상해를 떠나 LA(KLAX)를 거쳐 미 중부 댈러스(KDFW)까지 운항하는 노선이 있었다. 사건은 이 노선에서 발생했다.

일정은 일단 LA에 한 번 착륙한 후 이민국 및 세관을 거쳐 댈러스로 향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장거리 운항을 담당하는 민항 조종사들은 화물기든 여객기든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하면 최종 목적지로 연달아 비행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 장거리 비행 임무에 따른 스트레스와 시차 때문이다. 특히 여객기는 중간 기착지 없이 최종 목적지로 운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화물기는 최소 한두 번의 중간 기착지를 거치기 때문에 이에 따른 피로감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면 거의 녹초가 되곤 한다.

그 날도 LA에 착륙 후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댈러스까지 가야하는 터라 달리 방도가 없었다. 공항 입국심사와 출국 수속을 마치고 회사 사무실에 들려 운항 관계 서류를 한 뭉치 받아 내용을 살펴봤다.

운항에 특이 사항은 없어 보였다. 단지 댈러스 예정 도착시점의 기상예보가 눈에 거슬렸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니 도착 시간 전후로 공항 부근 지역에 광범위한 적란운(Cumulusnimbus)이 발달하게 될 것으로 예보돼 있었다.

사실 민항 조종사들에게 항공기 상태, 도착 시 기상 예보, 진입 및 착륙에 따른 관제 상황 등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주는 요소다. 어느 조종사들에게나 날씨가 좋고, 항공기 상태가 좋고, 관제상의 문제가 없으면 임무 수행에 따르는 스트레스의 반은 이미 사라지는 것과 진배없다.

어쨌든 주어진 운항 일정에 따라 모든 이륙 준비를 끝내고 예정된 시간에 이륙해 항로고도를 잡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댈러스의 기상상태가 신경 쓰였다. 원래 현지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예보만 믿고 비행 계획을 세웠다가는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상 비행시간은 약 2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일정이었다. 순항고도에 진입해 부조종사와 함께 댈러스에 관련된 각종 정보를 다시 살펴보고 기상예보도 최신 것으로 업데이트했다. 그런데 출발 전 예보 상으로는 적란운만 크게 발달했지 강수현상은 없었는데 현재는 약한 비가 내리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대형으로 시시각각 발달하는 적란운이 과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게 문제의 핵심으로 보였다. 다행히 적란운의 이동경로가 공항을 비껴 지나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공항 상공으로 움직인다면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으로 생각됐다. 만약 목적지 기상이 예보보다 악화돼 댈러스에 정상 착륙을 못하고 인근 공항으로 우회(Diversion)한다면 그 피로감이란 상상 이상이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적란운이 공항 부근에서 벗어날 때까지 체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료들을 살펴보며 이런 저런 방안을 구상하는 사이 어느덧 본격적으로 착륙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착륙 40분 전”에 도달했다.
 

숨 막혔던 착륙
기상 레이더를 살펴보자 공항 부근으로 짐작되는 곳에 직경 약 55km의 대형 적란운이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치솟아있었다. 흐릿하지만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컸다. 아직 관제상 특별한 정보사항이 전파되지 않는 것을 보니 댈러스 공항의 입출항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보였다. 기상악화로 공항이 폐쇄되면 관제소로부터 연락이 오기 때문이다.

약간은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 부조종사와 함께 예상되는 상황과 예기치 못한 이레귤러(Irregular) 상황을 포함한 착륙 전 브리핑을 끝내자 곧 강하가 시작됐다. 관제소의 지시에 따라 고도를 강하하면서 적란운의 크기와 강도를 재확인해보니 크기도 더 커졌고 강도 또한 매우 심각해 보였다. 레이더가 붉었다. 적란운 내에 아주 강한 비와 번개 등이 포함돼 있으면 레이더 화면 전체가 적색과 자홍색으로 가득 찬다. 하는 말이지만 조종사들에게는 공포의 색이다. 더욱이 착륙 예정 공항 항공이 이런 색으로 뒤덮여 있다면 그 날의 임무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조금이라도 진입하게 되면 항공기 손상은 물론 그 이상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므로 어떡해서든 안전운항을 위해 절대적으로 회피해야 할 존재들이다.

기상레이더를 참고삼아 관제사에게 적란운 회피를 위한 레이더 방위를 요청하며 활주로 주변 구름을 회피했다. 체공시간은 조금 길어졌지만 무사히 계기착륙시설을 이용하기 위한 최종 진입코스에 진입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동시에 물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자동비행장치를 연결해놓은 터라 비행기가 급격하게 요동치기는 했어도 그런대로 코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선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려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하고 활주로로부터 약 12km 지점에서 착륙장치와 플랩을 모두 내렸다. 이미 현지 시간은 자정이라 다른 비행기도 없어 착륙허가도 발부됐다.



문제는 비행기가 심한 기류 때문에 계기판 숫자도 읽지 못할 정도로 흔들거렸다는 점이다. 자동착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자동착륙이 가능한 측풍 착륙제한 범위를 초과해 그럴 수도 없었다. 당시 측풍 세기는 초속 약 14m로 747 자동착륙 제한범위인 초속 13m를 초과하고 있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뒤쪽을 보니 뒷좌석에서 모니터를 해주고 있던 2명의 조종사 역시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앞에서 조종하는 동료가 잘해주기만을 바라는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와이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비행기가 착륙 약 5km 지점에 들어서자 활주로 접근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어 자동비행장치를 풀고 수동으로 조작을 시작했다. 비행기는 계속해서 요동을 쳐댔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비행기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상태에서 윈드시어(Wind Shear)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뒷좌석 조종사들은 계속 침묵을 지키면서 행여 운항제한치라던가 아니면 비정상 상황이 발생하지 않나 열심히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비행기가 활주로 끝자락에 진입하면서 자동으로 고도를 불러주는 소리가 들렸다. “One hundred, Fifty, Forty, Thirty, Twenty, Tenⵈ" 나는 착륙을 하자마자 역추진장치(Reverse Thrust)를 최대로 올리면서 아울러 측풍에 따른 날개수평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야말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밖을 보랴 비행기를 정지시키랴 한 판 전쟁을 치렀다.

다행히 큰 이상 없이 착륙에 성공했다. 속도가 점점 줄어들자 뒤에 앉아있던 2명의 조종사가 박수를 쳤다. 본인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을 꽤나 졸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찾아왔다. 주기장 방향으로 가려면 착륙 후 활주로를 왼쪽으로 벗어나서 유도로로 진입해야 했는데, 나를 비롯한 조종석의 모든 조종사들이 착륙에만 몰두한 나머지 녹색 유도등이 보이는 오른쪽으로 벗어났던 것이다.

활주로를 벗어나자 바로 “아이구” 소리가 나오면서 “잘못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유도로 진입 전 관제사를 불러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 활주 인가를 요청했다. 다행히 관제사는 아무 불평 없이 야간이라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유도로 활주 인가를 다시 발부해줬다. 그 와중에도 비는 쏟아지고 있었고 번개와 천둥은 번쩍거리며 소리쳐대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경험 ⵈ 타산지석이 되기를
지금도 그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글로 옮길 수 있는 이유는 그때 그 시점에 처했던 상황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긴박했기 때문이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마 민항에 근무 중인 많은 조종사들도 이 같은 경험을 해마다 한두 번씩은 경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항상 안전운항이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글/ 정문교(항공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