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4) Boeing 747 Jumbo Jet(pt.1)

제트 여객기의 계보(33)
Boeing 747 Jumbo Jet (pt.1)



대형 여객기의 대명사로 불리던 747 점보제트 여객기는 역설적으로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 세상에 등장한 기종이 아니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우연한 기회에 등장한 기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많은 여행객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것은 절묘한 타이밍과 독보적인 성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제트 여객기 최초의 베스트셀러, 707
알려진 바와 같이 1949년에 등장한 최초의 제트여객기 영국의 D.H.106 코메트(Comet) 여객기는 설계결함으로 인해 불행히도 연속적인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고는 제트 여객기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던 탑승객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제트 여객기 시장은 풍부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기종이 보잉의 707 여객기이다. 707 여객기는 앞서 발생한 기술적인 문제점을 모두 해결했을 뿐 아니라 미 공군 KC-135 공중급유기로 먼저 채택돼 성능 측면에서 검증을 거친 기종이다. 미 공군의 운항실적을 바탕으로 707 여객기는 고객의 신뢰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곧이어 등장한 더글러스(Douglas) DC-8 기종까지 합세해 미국의 항공 산업은 유럽을 제치고 제트 여객기 시장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

1957년에 처음 등장한 707 여객기는 고객의 주문에 앞서 보잉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종이다. 어떻게 보면 판매에 대한 위험부담이 많았지만 당시 보잉의 빌 알렌(Willian McPherson Allen) 회장의 결단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앨런 회장은 당시 미국 최대의 국제선 항공사 팬암항공(Pan American World Airways)의 후안 트립(Juan Trippe) 회장 앞에서 시범비행을 선보였고, 707 여객기의 잠재력을 한눈에 파악한 후안 트립 회장은 곧장 20대를 주문했다. 트립 회장은 무엇보다도 성능이 우수한 신형 기종을 다른 항공사에서 먼저 차지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 팬암항공에서 처음 운항을 시작한 707 여객기는 D.H.106 코메트 여객기 이후 적당한 신형 기종이 없었던 제트 여객기 시장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707 여객기의 장점은 안정된 비행성능과 더불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기종이라는 점이다. 당시 가장 많은 여객이 몰리는 대서양 횡단 노선에서 707 여객기는 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태평양 노선의 경우에도 중간에 하와이 또는 앵커리지를 경유하면 횡단이 가능했다. 또한 4발 엔진에서 나오는 충분한 파워와 안전성 또한 장점에 속했다.

이러한 성능을 바탕으로 707 여객기는 1958년에 처음 운항을 시작한 이래 1960년대 후반까지 경쟁기종을 물리치고 장거리 국제노선에서 독보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707 여객기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우수한 비행성능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운항을 하기에 기내가 비좁다는 점이었다. 707 여객기는 오늘날 737 여객기와 같은 단일통로를 가졌었다. 뿐만 아니라 여객 수요가 몰리는 인기 노선에 투입하기에 탑승능력도 부족했다. 항공사의 입장에서는 런던~뉴욕, 파리~뉴욕과 같은 인기 노선에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는 여객기가 필요했다.
 

초음속 여객기 프로젝트, 보잉 2707
이러한 여객수요의 증가에 대해 당시 항공기 제작업체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당시는 냉전의 시기였고 동서 진영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던 때였다. 특히 항공 산업은 첨단기술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적인 자신감을 바탕으로 항공기 제작업체는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하려면 더 빠르게 비행하면 된다는 해결책을 항공사에 제시했다. 물론 항공사의 입장에서도 운항시간을 단축하면 같은 대수의 항공기로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승객 역시 여행의 피로감을 줄이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기종이 바로 콩코드(Concorde)다. 콩코드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 내어준 항공기술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야심차게 개발한 초음속 여객기다. 콩코드가 개발된다는 소문이 나자 소련도 이에 질세라 경쟁기종인 투폴레프 Tu-144 여객기를 서둘러 개발해 오히려 먼저 초도비행이 성공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미국의 입장에서도 경쟁에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생기게 됐다. 더구나 소련까지 초음속 여객기 개발에 성공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에 당시 냉전의 시각에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장거리 국제선 노선을 독점하고 있던 팬암항공의 트립 회장은 초음속 여객기가 당장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콩코드 여객기를 구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에 따라 구입은 보류하되 미 정부와 항공기 제작업체에 강력한 대책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초음속 여객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됐고 미 항공우주국(NASA)을 중심으로 기초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초음속 여객기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많고 천문학적인 개발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한 회사가 단독으로 비용을 부담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따라서 미 정부는 항공기 제작업체가 개발을 담당하고 정부에서 개발비용을 지원하는 방법을 추진했다. 미 정부는 항공기 제작업체에 새로운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 제안서를 요구했다. 여기에 보잉, 록히드, 노스아메리칸 3개 업체가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보잉 2707 모델이 승리했다. 보잉 2707 여객기는 초음속 비행에 적합하게 가변익 방식을 채택한 기종으로 저속이나 고속에서 모두 안정적인 비행이 가능한 모델이었다. 사실 여객기에 가변익을 사용하는 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경쟁기종인 콩코드나 Tu-144 기종보다 늦게 등장한만큼 차별화되는 첨단기술이 필요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콩코드보다 기체가 훨씬 큰 보잉 2707 여객기는 270명이 탑승할 수 있는 대형 기종으로 실제 상업 운항을 시작하면 장거리 노선을 석권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초음속 대형 여객기를 실제로 개발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 당시에 미국은 아폴로(Apollo) 우주선 프로젝트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에도 많은 예산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 부담에 직면한 미 정부는 보잉 2707 여객기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개발비용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더구나 보잉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시간만 지체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미국의 민간 항공시장을 좌우하던 팬암항공의 트립회장은 더 이상 보잉 2707 프로젝트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지켜만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영국항공과 에어프랑스(Air France)의 콩코드 기종이 인기 노선이었던 영국~뉴욕, 파리~뉴욕 구간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초음속이라는 장점을 내세운 콩코드 여객기는 불과 2시간 만에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콩코드 여객기의 성공에 선수를 빼앗긴 트립 회장은 시급하게 어떠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콩코드 여객기는 구입하지도 못하고, 개발이 지연되는 보잉 2707 프로젝트에 의지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747의 기반이 된 수송기 프로젝트, CX-HLS
보잉 2707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한편에서 미 공군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착실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치루면서 전선으로 향하는 병력과 물자를 대량으로 공수하는 임무를 맡은 미 공군은 커다란 문제에 직면했다. 정글과 하천으로 이뤄진 복잡한 지형을 가진 베트남은 도로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전선에 필요한 대량의 보급품은 항구에서 하역한 다음 철도나 도로를 이용해 운반하지만 베트남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 이에 따라 최전방에 위치한 부대까지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한 항공기가 필요했다. 미국은 선박과 항공기를 동원해 태평양을 건너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베트남에 도착한 다음 작은 수송기나 헬기를 이용해 최전방까지 운반했다. 특히 병력 수송은 장시간이 걸리는 뱃길을 대신해 항공편을 주로 이용했다.

이러한 공수작전을 진행하면서 미 공군은 종래의 C-130, C-141 수송기로는 정상적인 물량을 처리하는데 한계에 직면했다. C-130 기종은 당시 최고의 전술수송기였고, C-141 기종은 최신 기종으로 하와이, 괌을 경유해 베트남까지 비행이 가능한 최고의 전략수송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수송기를 모두 동원해도 밀려드는 병력과 화물을 모두 감당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또한 전차와 자주포와 같은 중장비는 C-130 수송기에 직접 탑재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미 공군은 한꺼번에 많은 화물과 대형 장비를 수송할 수 있는 초대형 수송기가 필요했다. 1964년에 미 공군은 80톤의 화물을 싣고 대서양을 직접 횡단하거나 하와이를 경유해 베트남에 도착할 수 있는 초대형 수송기 CX-HLS(Cargo Experimental, Heavy Logistic Support)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기술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대형 프로젝트인 CX-HLS 프로젝트에 보잉, 더글러스, 록히드 등 미국의 주요 항공기 제작업체가 도전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결국 록히드가 승리했고 마침내 C-5 갤럭시(Galaxy)라는 초대형 수송기가 등장했다. 여객기 분야에서 나름 꾸준하게 실적을 쌓은 보잉으로서는 미 공군의 CS-HLS 프로젝트에 도전하면서 내심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민간 여객기 분야와는 다른 군용기 분야에서 C-130 전술수송기, C-141 전략수송기를 개발한 실적을 가진 록히드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보잉은 CX-HLS 제안서에 기체 화물칸에 전차, 장갑차, 트럭과 같은 장비를 탑재하고 기체의 상부에는 객실을 설치해 병력이 탑승하도록 하는 설계안을 제출했다. 이는 당시 C-130, C-141 수송기의 경우 장비를 탑재하면 병력이 탑승할 공간이 비좁아 불편한 점을 반영한 결과다. 경쟁사인 록히드 역시 이러한 안을 담아 제출했는데 이러한 2층 구조의 항공기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경쟁을 물리치고 사업을 수주한 록히드 C-5 갤럭시 수송기는 실제 개발과정에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초대형 수송기를 하늘에 뜨게 하는 고성능 엔진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개발된 TF39 터보팬 엔진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고성능 엔진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불과 20~40톤의 화물을 공수하던 당시의 기술수준에서 무려 80톤의 화물을 싣고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보잉 2707의 임시 대책이었던 747
이러한 C-5 수송기 프로젝트에 자극을 받은 보잉은 팬암항공의 트립 회장이 신형 여객기를 요구하자 이에 응하였다. 주위의 방해에 밀려 콩코드 여객기 구입에 실패한 트립 회장의 입장에서는 1960년대 이후 크게 증가하는 항공여객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미국 국제선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팬암항공은 시급하게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다른 회사에 승객을 빼앗긴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이에 트립 회장은 개발이 지연되는 보잉 2707 여객기가 완성될 때까지 임시로 투입할 수 있는 신형 여객기를 보잉에 요구했다. 트립 회장의 생각으로는 증가하는 승객수요를 초음속 여객기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대신에 초대형 여객기를 투입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트립 회장은 당시 707 여객기보다 2배 큰 여객기를 요구했다. 다만 신형 여객기는 보잉 2707 여객기가 완성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임시 대책이었다. 꿈에 그리던 보잉 2707 초음속 여객기가 완성되면 여객수요에 집중하고 대형 여객기는 화물기로 전환해 사용할 예정이었다. 당시에는 여객수요의 증가와 더불어 국제교역량이 성장하면서 항공화물의 수요 또한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보잉 2707 여객기의 개발에 대비한 임시 대책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747 여객기로 훗날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