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23) Boeing 727

제트 여객기의 계보 (23)
Boeing 727

 

707, 긴 활주거리로 취항지 제한적
제 2차 대전 중에 등장한 제트 엔진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추진력을 낼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아직 완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투기는 물론 폭격기에 탑재하는 엔진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전쟁 중에 이미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제트 엔진을 탑재한 여객기를 다각도로 검토하던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개발을 시작해 다른 국가보다 앞서 1949년 7월에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 106 코메트 (Comet) 여객기를 선보였다.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영연방 국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자 장거리 비행을 할 수 있도록 개발된 코메트 여객기는 고도를 높여 공기가 옅어지더라도 충분하게 연소가 유지되는 제트 엔진의 덕분으로 42,000 피트의 높은 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어 구름이나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날씨와 상관없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코메트 여객기는 이전의 왕복엔진 여객기와 비교할 때 결항이 줄어들고 기체의 진동이 줄어들어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공을 비행하기 위해 여압을 하면서 기체의 수축과 팽창이 반복돼 금속재료에 균열이 발생하는 현상을 알지 못했기에 취항한지 2년이 지나는 시점부터 여압에 의한 기체의 피로가 한계에 이르렀고, 균열부위가 파손돼 기체가 분해되는 사고가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D.H 106 코메트 여객기가 활약하는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사라진 코메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제트 여객기가 바로 1954년 7월에 등장한 미국의 보잉 707 장거리 제트 여객기이다. 코메트와 비교할 때 대형 기종으로 등장한 보잉 707 여객기는 짧은 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개발을 마치고 1958년부터 상업노선에 취항했으며 나중에 등장한 더글러스 DC-8, 콘베어 CV-880 여객기와 더불어 제1세대 제트여객기를 대표하는 기종으로 제트여객기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최대 219명의 승객을 태우고 10,000 km를 무착륙 비행할 수 있는 보잉 707 여객기가 연료를 가득 채우고 안전하게 이륙을 하려면 충분하게 가속할 필요가 있었기에 매우 긴 활주로가 필요했다. 최근에 등장한 신형 여객기는 고성능 엔진의 덕분으로 파워가 크고 또한 날개에 양력을 높여주는 장치가 설치돼 기체가 무거워도 짧은 거리에서 이륙이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설계개념이 보편화돼 있지는 않아 보잉 707 여객기는 6,000 피트가 넘는 긴 활주거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관계로 보잉 707 여객기는 긴 활주로를 구비한 대형 공항에만 취항이 가능한 단점이 있었다. 제트 여객기가 일반화되지 못했던 1950년대에 중소도시를 이어주는 중단거리 노선의 경우 왕복엔진 여객기가 주로 취항했으며 터보제트 엔진보다 연비가 우수한 터보프롭 여객기가 막 자리를 잡던 시기이었다. 더구나 당시에 활약했던 더글러스 DC-3, DC-4 여객기의 경우 2차 대전이 끝난 다음 미 공군에서 대량으로 민간 항공회사에 매각한 중고 항공기로 구입 가격이 저렴하고 비행성능이 우수해 많은 수량이 활약하고 있었다.
 
 
중단거리용 여객기 개발착수
보잉의 기술팀은 이러한 지방노선에 취항이 가능한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하고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했는데, 아직 시장이 작은 지방노선용 여객기를 새로 개발할 경우 비용이 많이 필요하기에 기존의 보잉 707 여객기를 개조해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 보잉 707-120 여객기의 동체를 2.54 m 단축하고 승객과 연료탑재량을 줄여 크기를 줄인 국내선 전용 모델인 보잉 720 여객기가 등장했다.

전체적으로 보잉 707 여객기와 비슷하지만 기체의 크기가 약간 작아진 보잉 720 여객기는 보잉 707 여객기처럼 4발 엔진을 사용하는 관계로 콘베어 CV-880 이나 CV-990 여객기와 비슷한 개념으로 개발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스턴항공, 웨스턴항공과 같은 중소 항공사에서 일부 도입했다.

그러나 기체의 성능에 비해 가격이 높았고 연료의 소모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항공사에서 반기는 기종은 아니었으며, 나중에 보잉 727 이나 더글러스 DC-9 여객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과도기적인 기종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잉의 기술팀도 4발 제트엔진을 탑재한 지방노선용 여객기는 너무 낭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터보제트 엔진은 비행 중에 연소가 불완전해 추력이 갑자기 낮아지고 엔진에 진동이 발생하거나 심하면 시동이 꺼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등 기술적으로 불완전했기 때문에 쌍발 엔진은 불안한 면이 있었다.

민간항공시장에서 보잉 720 여객기의 한계를 확인한 보잉의 경영진은 보잉 707 장거리 여객기로 개척한 제트 여객기 시대를 선도하는 기업의 입지를 굳히고 여세를 몰아 중소도시의 작은 공항에도 취항이 가능한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보잉 707 여객기의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인 1956년 2월에 보잉의 기술진은 당시 중소도시의 지방공항에서 주로 운항하던 더글러스 DC-4, 콘베어 CV-440 기종과 같은 왕복엔진을 탑재한 여객기를 대체할 수 있는 중단거리 여객기의 개발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여객기 프로젝트는 많은 자금을 차입해 보잉 707 여객기 사업을 진행하던 보잉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도전이었으며 자칫 실패할 경우 회사의 운명이 엇갈릴 수 있는 프로젝트이었다.

이러한 사정이 있어 보잉의 기술진은 개발비용을 줄이고자 새로운 규격의 동체를 개발하지 않고 기존의 보잉 707 여객기의 동체를 최대한 활용해 쌍발 여객기를 개발하고자 했다. 신중하게 진행한 기술검토 결과 보잉 707 여객기의 동체를 줄이고 당시 인기가 있었던 프랑스의 슈드 카라벨 여객기의 디자인을 본떠 쌍발 엔진을 동체 뒷부분에 탑재하는 디자인을 채택했다. 보잉의 영업팀은 새로운 디자인을 국내노선 주요 항공사인 이스턴항공, 유나이티드항공, 아메리칸항공에 제안하고 의견을 청취한 결과 쌍발 엔진의 경우 한쪽 엔진이 고장 날 경우 안전성에 문제가 있고 덴버 공항처럼 고지대에 위치한 공항에서는 이륙에 필요한 추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이들 항공사의 주요 취항지인 카리브해 지역의 도서국가에 운항하려면 ETOPS (Extended-range Twin-engine Operational Performance Standards, 쌍발기 운항경로 제한) 규정에 따라 취항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답변을 듣게 됐다.

보잉 727 여객기가 등장한 1960년대 초반에는 이미 영국의 코메트 여객기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카라벨, 소련의 Tu-104 카멜을 비롯해 미국 내에서도 보잉의 라이벌 회사인 더글러스에서 DC-8 여객기를 출시해 장거리 노선용 여객기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보잉의 경쟁사 역시 제트 여객기 시장이 점차 성장하자 오히려 보잉에 앞서 중거리 노선에 적합한 여객기 개발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콘베어는 초음속 폭격기 개발기술을 활용한 CV-880/CV-990 여객기를 개발해 보잉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고, 대서양 건너 영국의 호커 시들리는 세계 최초로 3발 엔진 형태를 시도한 트라이던트 여객기를 선보였으며, BAC(British Aircraft Corporation, 영국항공기회사)에서는 다시 쌍발 엔진으로 축소한 1-11 여객기를 개발하는 등 중단거리 노선 시장에서 경쟁업체들이 오히려 앞서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중단거리 노선용 여객기를 개발하려는 보잉의 입장에서 안전하게 4발 엔진을 요구하는 항공사도 있었고, 위험하더라도 쌍발 엔진을 채택하고자 하는 항공사도 있었으며, 더구나 중단거리 노선에서 제트 여객기는 아직 시기상조라며 왕복엔진 여객기를 고집하는 항공사도 있었기에 보잉으로서는 결단을 내리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보잉 유일의 3발엔진 여객기
이에 대응해 보잉의 기술진은 그동안 검토했던 쌍발 엔진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실패한 보잉 720 여객기처럼 4발 엔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결국 기술팀은 쌍발과 4발의 형태를 절충한 3발 엔진을 탑재한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순조롭게 개발을 거쳐 1960년 12월 5일에 보잉 727 개발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보잉 727 여객기는 보잉에서 개발한 최초이자 유일한 3발 여객기이며 동체의 꼬리부분에 3발의 제트 엔진을 한꺼번에 탑재했기에 수평미익을 설치하기 어려워 결국 수직미익의 윗부분에 수평미익을 설치한 T-테일 방식을 채택했다.




보잉 727 여객기는 원래 보잉 707 여객기의 뒤를 이어 등장했기에 보잉 717 여객기로 불려야 했으나 보잉 707 여객기가 등장하고 곧바로 707 모델을 군용으로 개조한 KC-135 공중급유기가 생산을 시작하면서 보잉 717 기종으로 정해졌기에 이어서 등장한 신형 여객기는 보잉 727로 불리게 됐다.

보잉의 경영진이 힘들게 결정한 3발 엔진 여객기 개발은 어려운 상황에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는데, 당시에는 보잉 최초로 1,000대가 넘게 판매를 기록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힘들었다. 보잉 727 여객기는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유나이티드항공과 이스턴항공으로부터 40대의 주문을 받아 개발을 시작했다.



보잉 727 여객기는 앞서 등장한 보잉 707 여객기와 비교할 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많은 개량이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어 고속비행을 할 때 조종사의 피로를 줄이고자 처음으로 유압식 비행제어 장치를 완전하게 설치했으며, 3중 간격의 플랩을 설치해 짧은 활주로에서도 안전하게 이착륙이 가능했다. 더구나 엔진이 모두 동체의 뒷부분에 설치돼 있기 때문에 주익의 전체에 걸쳐 플랩을 설치할 수 있어 양력이 발생하는 효율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공항에서 엔진의 시동을 걸거나 지상에서 엔진을 끈 상태에서 기내에 전기와 에어컨을 공급하려면 외부에서 동력을 공급해야 하는데 당시 미국의 지방공항에는 이러한 지원시설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고자 보잉 727 여객기에는 소형 가스터빈 엔진을 동체 내부에 설치해 주 엔진의 시동을 끄더라도 전기와 에어컨이 작동할 수 있어 항공사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또한 여객기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접어서 수납할 수 있는 계단을 설치해 공항에 탑승용 계단이 없더라도 승객이 타고 내리는데 불편이 없도록 배려했다.

보잉 727 여객기의 1호기는 1962년 11월 27일에 최초로 공개됐으나 이때 주문량은 손익분기점인 200대를 밑돌고 있었다. 저조한 판매실적을 만회하고자 보잉의 영업팀은 시제기를 이끌고 26개 국가, 76,000 마일을 비행하면서 적극적으로 판촉활동을 전개했다. 1963년 2월 9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한 보잉 727 여객기는 비행시험을 거쳐 1964년 2월 1일에 이스턴 항공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보잉의 경영진은 당초에 손익분기점을 넘어 250대만 판매하면 성공이라고 판단했으나 131인승인 보잉 727-100 기종을 확대해 189인승으로 개량한 보잉 727-200 기종이 1967년에 등장하자 많은 항공사로부터 인기를 얻으면서 판매가 급증했고, 22년간 무려 1,832대가 판매되는 엄청난 실적을 기록했다. 모두 1,010대가 판매된 보잉 707 여객기와 더불어 3,000대에 가까운 제트 여객기를 판매하는데 성공한 보잉은 1960년대 중반부터 경쟁회사인 더글러스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큰 여객기 제작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오늘날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제트 여객기 경쟁에서 실패한 더글러스는 결국 1967년에 전투기 제작사인 맥도넬에 인수돼 항공기 제작사업부는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우주선 및 미사일사업부는 별도로 분리되고 말았다.

1984년 9월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보잉 727-200F 화물기는 미국의 유명한 특송회사인 페덱스에 인도됐으며 많은 수량의 기체가 아직도 현역에서 운항을 계속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던 보잉 727 사업은 결과적으로 보잉에게 큰 수익을 가져다 준 효자 기종으로 보잉 737 여객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항공기로 기록되고 있다. 중단거리 노선에서 활약한 보잉 727 여객기의 후속기종은 보잉 757 여객기이며 아직까지도 후속기종이 검토 중이라고 한다. 지난 50년간의 제트 여객기 역사에서 미국 국내선을 중심으로 하는 중단거리 노선용 여객기가 단 2가지 기종밖에 없다는 사실을 볼 때 보잉 727 기종이 얼마나 확고하게 시장에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대량으로 판매돼 취항하면서 크고 작은 사고가 많이 발생했으며, 특히 1971년 11월 24일에 노스웨스트항공 305편이 D.B. 쿠퍼에 의한 납치사건이 유명한데 당시 현금과 낙하산을 요구한 범인은 비행 중 뒷부분의 비상계단을 통해 뛰어내렸는데 현재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는 희대의 미제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연방항공청에서는 모든 보잉 727 여객기에 대해 비행 중 비상계단을 열 수 없도록 개조하도록 조치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