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9) Airbus A300 (Pt. 1)

제트 여객기의 계보 (39)
Airbus A300 (Pt. 1)

 



유럽은 미국보다 앞서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 106 코메트(Comet)를 개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잇달아 발생한 코메트 추락 사고는 제트 여객기의 실용화에 큰 타격을 줬다. 유럽에서 제트 여객기의 발전이 잠시 주춤하던 시기에 대성공을 거둔 주인공이 바로 보잉(Boeing) 707 제트여객기다. 보잉 707 여객기는 오늘날 제트 여객기의 표준을 확립한 기종으로 외관이나 성능, 안전성이 모두 뛰어난 기종으로 1,000대가 넘게 생산됐다. 보잉 707 여객기로 시작된 제트 여객기의 실용화는 1950년대에 국제선은 물론이고 국내선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제트 여객기가 대중화되면서 항공기를 이용하는 여객도 꾸준하게 증가했고, 보잉 720, 보잉 727 여객기처럼 국내선 전용 기종까지 등장했다. 보잉 707 이전까지 여객기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던 더글러스(Douglas)는 제트 여객기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면서 보잉에 뒤쳐졌지만 국제선용 DC-8, 국내선용 DC-9 제트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나름 선전하고 있었다.
 

제트 여객기 필요성 대두된 유럽
미국 항공여객 시장이 급속하게 제트 여객기로 전환되던 시기,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유럽은 2차대전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1950년대 이후 경제부흥에 따른 여행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철도가 발달한 유럽에서 항공여행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유럽의 도시를 구석구석 연결하는 철도망은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철도여행이 일찌감치 발달했다. 더구나 공항은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철도역은 도심지에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항공편을 이용하려면 미리 공항에 나와서 탑승수속을 해야 한다는 점도 번거로웠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를 이어주는 주요 교통수단은 대부분 철도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과 달리 유럽 대륙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국은 항공노선이 일찌감치 발달했다. 요즘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 해협에 철도 터널이 개통돼 편리하게 왕복할 수 있게 됐지만 철도 터널이 없었던 1950년대에 영국에서 유럽대륙으로 도버 해협을 건너려면 페리를 이용해 철도편으로 갈아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따라서 여행객 입장에서 시간을 절약하려면 다소 비싸더라도 항공편을 이용하는 방법이 편리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영국에서 코메트 제트 여객기가 처음 등장했고, 1960년대에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Hawker Siddeley Trident, 1964년), VC-10(1964년), BAC 1-11(1965년) 제트 여객기가 속속 등장하면서 유럽의 민간항공시장을 선도했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가 부흥하면서 1960년대에는 유럽 내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럽은 철도망이 잘 발달했지만 반대로 여러 나라에 걸쳐 철도 노선이 펼쳐져 있다는 특징으로 현대화가 어려웠다. 낡은 철도망과 철도차량을 새로 교체하려면 여러 나라가 모여서 협상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에서 철도노선은 낡은 시설을 계속 사용해야만 했다.

반면 항공노선은 제트 여객기가 등장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제트 여객기는 비행속도가 증가하면서 반대로 운항시간이 감소했고 여행객의 수요증가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유럽대륙 노선에서 항공 여행객이 점차 증가했고, 장거리 노선에서 항공편을 선호하게 됐다.
 

미국에 뒤진 유럽, “에어버스” 공동개발키로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항공여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유럽대륙에서 운항하는 제트 여객기는 대부분 미국제 기종이라는 점에서 유럽 사람들은 불만이 있었다. 특히 보잉 727 여객기는 원래 미국의 국내선에서 사용되는 기종이었다. 그러나 에어프랑스(Air France), 루프트한자(Lufthansa), 알리탈리아(Alitalia), 이베리아(Iberia)와 같은 유럽 항공사의 주요 노선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유럽은 주요 도시의 거리가 가깝고 여행객도 많기 때문에 단거리 노선을 중심으로 항공수송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럽의 항공업체는 새로운 제트 여객기를 개발해 유럽의 항공노선에 투입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잉과 더글러스와 같은 대형 항공기 업체에 직접 대항하기에는 기술과 자금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하려면 많은 인력과 개발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어느 항공업체가 이러한 부담을 안고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한다면 적정한 판매대수가 보장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항공업체는 큰 손실을 입고 회사의 경영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보잉 727>

코메트가 등장한 이래 유럽의 여러 항공업체가 제트 여객기 개발에 나섰다. 프랑스의 카라벨(Caravelle), 영국의 트라이던트, VC-10, BAC 1-11, 독일의 VFW 614 등이 속속 등장했지만 미국의 경쟁기종에 뒤쳐졌다. 문제는 여객기의 판매량이었다. 미국제 제트 여객기는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판매되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제 제트 여객기는 상대적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가 쉽지 않았고 가격 경쟁력이 낮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유럽제 제트 여객기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제트 여객기를 개발했던 영국의 항공업체는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유럽의 입장에서는 항공시장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미국제 기종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1960년대에 경제가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본격적인 제트 여객기의 시대가 열리자 철도나 버스처럼 항공기도 가볍게 탈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됐다. 이러한 경향을 파악한 유럽의 항공업체는 당장 독자적으로 제트 여객기를 개발하기 힘들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항공업체가 서로 협력해 공동으로 개발한다면 비용과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러한 예상은 유럽 항공여행객의 수요가 충분했기에 새로운 기종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공항에 가면 예약을 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여객기에 탈 수 있는 시대가 가능하다는 뜻으로 에어버스(Airbus)라는 개념이 1960년대에 생겨났다.

1964년 영국의 국립항공연구소(Royal Aircraft Establishment, RAE)는 유럽에서 항공운송 증가에 대응할 수 있는 단거리 여객기의 개발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도 1961년부터 국영항공사인 에어프랑스에서 카라벨의 후속 기종으로 신형 단거리 여객기의 개발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의 영향으로 항공 산업의 발전이 늦었던 독일도 여러 항공업체가 모여서 여객기 공동개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65년은 에어버스가 탄생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한 해였다. 이렇게 각기 독자적으로 단거리 제트 여객기의 개발을 검토하다가 1965년 여름에 열린 파리 에어쇼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영국의 중단거리 국내선 항공사인 BEA항공(British European Airways)에서 에어버스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의 항공운항사와 항공업체가 모여서 200~250석 급 신형 쌍발 여객기를 개발하자는 열기가 높아졌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구체적인 협상을 시작했고 마침내 1965년 11월, 유럽에서 개발하는 에어버스의 기본적인 성능을 확정했다. 주요 성능은 200~225석, 항속거리 1,500km, 이륙활주거리 2,000m, 착륙활주거리 1,800m, 보잉 727-100 대비 30% 낮은 좌석당 마일 비용, 저소음, 자동착륙장치 등으로 미국의 제트 여객기와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벌어지는 격차”, 공동개발의 최대 동력원
한편 1960년대에 제트 여객기 분야에서 큰 발전을 보여준 미국은 기술적인 자신감을 배경으로 군용 수송기 분야에서도 제트화를 추진했다. 우선 1개 중대병력과 장비를 싣고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록히드(Lockheed) C-141 스타리프터(StarLifter)가 1965년부터 실전에 배치됐다. C-141 스타리프터 수송기는 유사 시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군이 서독을 침공할 경우 신속하게 병력과 장비를 수송할 수 있는 성능을 갖췄다.

C-141 제트 수송기의 실전배치에 만족한 미 공군은 전차를 통째로 싣고 대서양을 건널 수 있는 초대형 제트 수송기(CX-HLS)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의 5개 대형 항공업체가 경쟁을 벌인 결과 C-141 제트 수송기를 개발한 경험을 가진 록히드가 경쟁에서 승리했다. 사실 제트 여객기 개발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보잉은 CX-HLS 사업에 앞서 자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미 공군의 심사 결과 경쟁에서 탈락한 보잉은 여세를 몰아 보잉 747 점보(Jumbo) 여객기 개발을 시작했다. 보잉 747 점보 여객기의 등장은 사실 팬암(Pan American World Airways)항공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을 가진 후안 트립(Juan Trippe) 팬암항공 회장은 다른 항공사와 차별화된 초대형 여객기의 개발을 요구했다. 미국의 국제선 노선을 독점했던 팬암항공은 좌석의 공급이 부족한 대서양 횡단노선에 투입할 대형 여객기로 보잉 747 점보 여객기를 선택했다.

반면 미국의 국내선 노선에서 선도 항공사인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은 국제선에 주력하는 팬암항공과는 다른 관점에서 신형 여객기가 필요했다. 아메리칸항공은 미 공군의 CX-HLS 사업으로 개발 중이던 TF39 터보팬 엔진에 주목했다. 그 결과 아메리칸항공의 요구에 부응해 더글러스 DC-10,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TriStar) 여객기가 등장했다. 보잉 747 초대형 여객기보다 약간 작은 대형 여객기에 속하는 DC-10, L-1011 여객기는 미국의 주요 국내선 노선에 적합한 기종으로 250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3,500km를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서 유럽에서 구상하는 신형 여객기는 탑승인원은 비슷한 규모이지만 비행시간과 항속거리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유럽에 적합한 대형 여객기는 미국에서 개발한 기종으로는 충족하기 힘들었다. 넓은 국토를 가진 미국은 주요 도시가 멀리 떨어져 있어 비행시간이 길다. 반면에 유럽은 주요 도시가 멀지 않아 비행시간이 짧다. 이러한 유럽과 미국의 항공시장의 차이점은 에어버스 계획을 시작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 처음 주장해 어렵게 공동개발을 시작한 에어버스 계획의 가장 큰 장애물은 개발비용과 기술이었다. 참여한 모두가 공동개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비용과 기술력 확보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한 국가, 어느 한 항공업체에서 단독으로 대형 여객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공동개발을 통해 극복해야한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감대는 에어버스 계획이 깨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