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10) 록히드 엘렉트라/로드스타(Lockheed Electra / Lodestar)

록히드 엘렉트라/로드스타(Lockheed Electra / Lodestar)
 
1930년대의 경제 공황기를 벗어난 후 록히드사는 새로운 쌍발수송기 시리즈의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그 첫번째 모델로 완성한 모델 10 엘렉트라는 고속성과 쾌적성이 우수한 여객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급 수송기로 명성이 높은 엘렉트라를 개발하여 성공적으로 여객기 시장에 진입한 록히드사는 더글러스사의 최신형기인 DC-3에 대항하고자 여객 탑승력을 증가시킨 모델 14 수퍼 엘렉트라와 모델 18 로드스타를 개발하였다. 고속성능과 신뢰성이 풍부한 두 기종은 소수이지만 충실한 고객층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로드스타는 여객기뿐만 아니라 군용기로서도 성공을 거두며 대량 생산되어 록히드사의 경영을 정상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미국의 경제 공황기에 록히드 에어크래프트사는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아 재산관리인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록히드사는 1932년 6월에 샌프란시스코의 주식 중개인이었던 로버트 그로스(Robert Gross)가 이끄는 투자가 그룹에 매각되었으며, 캘리포니아주 버뱅크(Burbank)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새롭게 출발한 록히드사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항공기의 개발이 필요하였으며, 당시 록히드사는 기술부주임인 홀 히버드(Hall Hibbard)와 로이드 스티어맨(Lloyd Stearman)이 스티어맨 바니(Stearman-Varney Inc.)에서 재직 중에 구상하였던 10인승 단발수송기의 개발을 기획하고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그로스는 단발기보다는 쌍발기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경영진에게 쌍발기의 개발 필요성에 대하여 설득하였으며, 이러한 판단은 나중에 실제로 옳았음이 판명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미국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단발기가 승객을 태우고 야간비행을 하거나, 긴급착륙이 불가능한 지역의 상공을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만약 신생 회사였던 록히드사가 단발기의 개발에 주력하였다면 다시 경영위기에 놓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로 개발하는 쌍발수송기는 록히드 모델 10 엘렉트라(Electra)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개발작업에는 히버드와 스티어맨이 리차드 폰 헤이크(Richard Von Hake)와 제휴하여 개발을 진행하였다. 기본 설계단계에서 제안한 모델은 전금속제의 저익단엽기로서 2기의 450마력급의 프래트 & 휘트니제 와스프 주니어 래디얼 엔진이 2엽 가변피치 프로펠러를 구동하며, 착륙시에는 감속용으로 분할식 플랩을 장착하고 인입식 미륜 랜딩기어를 장비하고 있었다. 모형을 사용한 록히드 10의 풍동실험은 미시간대학의 유체역학부의 에드워드 스토커(Edward Stalker) 교수의 후원하에 클라렌스 L. 존슨(Clarence L. Johnson)이라는 유명한 기술자가 실험을 담당하였다.
 

설계의 변경
켈리 존슨(Kelly Johnson)은 실험 결과 조종면에 지장을 예상하고 록히드 10의 단일 수직미익, 앞쪽으로 경사진 윈드실드, 주익과 동체 연결부의 대형 필레트의 설계를 변경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스토커교수는 켈리 존슨의 보고내용을 검토한 후 설계변경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록히드사는 제안된 설계변경을 실시하면서 존슨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켈리 존슨은 설계변경작업을 통하여 쌍수직미익을 장비한 엘렉트라를 설계하였으며, 그 독특한 형상은 향후 오랜 기간동안 록히드 항공기의 특징이 되었다. 엘렉트라의 시작기(X233Y)는 1934년 2월 23일에 테스트 파일로트인 마샬 히들(Marshall Headle)의 조종으로 초도 비행을 하였으며, 이때까지도 앞쪽으로 경사진 윈드실드와 필레트는 남아있었다. 그러나 시험비행이 진행되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점은 켈리 존슨의 판단과 제안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시작기의 정면 윈드실드는 V자형으로 변경되고, 주익과 동체의 연결부의 페어링의 형상도 개선되었다. 엘렉트라는 1934년 8월 11일에 형식증명을 취득하였으며, 이 시점에서 최초의 고객인 노스웨스트 항공(Northwest Airlines)의 발주를 받아 13대를 인도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엘렉트라의 순항속도는 306km/h로서 이는 고출력엔진을 장착한 대형여객기인 더글러스 DC-2에 필적하는 성능이었다. 10석을 배치한 캐빈은 쾌적성이 우수하여 승객들의 평판이 좋았으며 록히드는 빠르고 쾌적한 성능의 여객기 메이커로 인식되어 이후 개발한 콘스텔레이션의 성공에 큰 기초가 되었다. 당시에는 항공운송의 수요가 급속하게 신장하던 시기로서 록히드 엘렉트라는 승객 탑승력이 부족한 여객기로서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주요 항공회사의 주역 운용기종으로는 활약하지 못하였으나, 지역 노선용으로 인기가 있는 기종이었다.
 

엘렉트라의 각 형식
양산형 엘렉트라는 1934년 8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모두 148대가 제작되었으며, 민간용으로는 4가지 종류가 제작되었다. 주요 양산형은 모델 10-A로서 101대가 제작되었다. 이 모델은 가별 피치 프로펠러를 장비한 와스프 SB 엔진을 탑재하였으며, 생산이 진행되면서 정속 프로펠러의 장비도 가능하에 되어 이미 제작한 기체 중에서 일부의 기체도 프로펠러도 정속 프로펠러로 교환하였다. 모델 10-B는 2기의 라이트 훨윈드 엔진을 탑재한 기체로 1935년 9월부터 1937년 7월까지 18대가 제작되었다.  이 기체는 모델 10 시리즈 중에서 프래트 & 휘트니 엔진을 채택하지 않은 유일한 기체이다. 모델 10-C는 와스프 SC1 엔진을 탑재한 기체로 엘렉트라의 2번째 구입 고객인 팬 아메리칸 항공(Pan American Airways)이 알라스카 부문 및 중남미 자회사인 아에로비아스 센트라레스(Aerovias Centrales)와 쿠바나(Cubana)에서 8대를 발주하였다. 모델 10-E는 출력 600마력의 와스프52H1 엔진을 탑재한 기체로 4종류의 모델 10시리즈 중에서 가장 강력한 모델로서 15대가 제작되었다.

유럽의 항공회사는 브리티시 에어웨이즈(British Airways)가 1936년~37년에 7대의 모델 10-A를 구입하였으며 그 중 1대(G-AEPR)은 1938년 9월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의 평화협상을 위하여 독일을 방문하는 네빌 챔벌린(Neville Chamberlain) 영국 수상의 전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LOT 폴란드항공이 보유한 5대의 항공기는 1939년 9월에 독일이 침공하자 부카레스트로 피난하였으나 나중에 독일군에게 노획되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의 아에로푸트(Aeroput)가 8대, 루마니아의 LARES가 7대를 발주하였다. 또한 유럽과 미국이외의 세계각국에서도 엘렉트라를 구입하였으며 일본의 오쿠라상사(大創商事), 호주의 안세트(Aansett) 항공을 비롯하여 맥로버트슨 밀러(MacRobertson-Miller) 항공, 기니아 항공(Guinea Airways), 뉴질란드의 유니온 항공(Union Airways), 트랜스 캐나다 항공(Trans-Cananda Air Lines), 베네주엘라의 LAV, LAN-칠레 항공이 엘렉트라를 운항하였다. LAN-칠레 항공은 10대의 모델 10-A를 구입하였으며 그 중 1대는 1941년 7월에 마지막을 제작한 엘렉트라 최종 기체였다.



엘렉트라는 고속의 고급수송기 및 특수임무용의 기체로 민간용 및 군용 양쪽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미 해군은 2대의 엘렉트라를 XR2O-1 및 XR3O-1이라는 명칭으로 참모용 수송기로 운용하였다. 한편 미 육군항공대는 4대의 YC-36/37을 발주하였으며, 2차대전중에는 27대의 민간용 엘렉트라를 징발하여 C-36A/B/C라는 제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순수한 군용 엘렉트라는 1936년 6월에 발주한 XC-35로서 고고도 비행용의 여압캐빈의 개발실험기로 사용되었다.
 

엘렉트라 주니어
항공회사에 엘렉트라의 판매하는 과정에서 록히드의 판매담당 부사장인 칼 스퀴어(Carl Squire)는 엔진 출력은 엘렉트라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작은 소형 지선용 항공기의 잠재수요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으며, 미 항공상무국도 같은 종류의 항공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1935년 후반에 각 항공기제작업체에 대하여 1936년 6월 30일까지 설계안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록히드사의 홀 히버드와 켈리 존슨은 종전의 엘렉트라를 소형화한 모델 12 엘렉트라 주니어(Electra Junior)의 설계에 착수하였으며, 동체는 모델 10보다  길이가 1.3m 짧은 경량의 기체에 6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소형여객기를 개발하였다. 또한 기업체의 간부전용기 옵션의 경우 쾌적한 의자와 소파, 사무용 책상, 타자기를 비롯한 ‘하늘을 나는 사무실’에 필요한 기기를 장비하였다. 엘렉트라 주니어에는 대형의 자매 기체인 엘렉트라와 동일한 와스프 SB 엔진을 탑재하였다. 개발 스탭의 노력 결과 록히드 모델 12의 시작기는 기한 내에 완성되어 6월 27일에 버뱅크에서 시작기(NX16052)가 초도 비행을 실시하였다. 엘렉트라 주니어는 우수한 조종성과 362km/h의 최고속도 성능으로 미항공국의 승인과 잠재고객으로부터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였으며, 10월 14일에 형식증명을 받고 최초의 2대가 고객사에게 인도되었다.

그러나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록히드 12는 항공회사를 대상으로 한 판매실적이 부진하였으며, 1936년~42년에 제작된 130대중에서 미국의 항공회사에 납입한 기체는 6대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기체는 개인 및 기업, 미국 및 외국의 행정기관, 각군의 항공부대에서 사용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정부는 모델 12를 36대나 발주한 최대의 고객이다. 16대의 기체는 모델 212로 이름 붙여져 폭격기 승무원의 훈련용으로 사용되었으며, 7.7mm 기관총을 동체상부 총탑과 전방에 고정식으로 장착하였으며, 동체아래의 폭탄랙에는 8발의 45kg 폭탄을 장착할 수 있었다.

록히드 12는 130대가 제작되었으며 그 중 1/4 정도가 2차대전후까지 남아 고급수송기로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였다.
 

수퍼 엘렉트라의 개발
1935년 가을에 록히드 12의 개발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무렵, 록히드사의 홀 히버드와 켈리 존슨은 프로젝트 엔지니어인 돈 파머(Don Palmer)와 함께 더글러스사의 신형기인 슬리퍼 트랜스포트(DST, DC-3로 발전)에 대항할 수 있는 신형기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탄생한 기체가 엘렉트라 시리즈의 3번째인 모델 14 수퍼 엘렉트라(Super Electra)로서 빠르게 개발되어 1937년 7월 29일에 시작기(NX17382)가 초도 비행을 하였다.

모델 14는 엘렉트라 명칭을 계승하는 새로운 설계의 기체로서, 최대의 특징은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14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독립 좌석을 배치한 신형 캐빈, 고속성을 추구한 테이퍼 주익, 이륙거리를 단축하고 착륙 진입시 감속용으로 주익면적을 증가시키는 파울러 플랩을 갖추고 있었으며, 켈리 존슨이 모델 10과 모델 12용으로 설계한 독특한 쌍수직미익은 모델 14에도 이어졌다. 그밖에도 모델 14는 캐빈의 바닥아래에 수하물 수납공간 설치, 2단 터보차저가 달린 2기의 프래트 & 휘트니 호네트 S1E-G 래디얼 엔진(출력 875마력), 페더링이 가능한 프로펠러를 장착하는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순조롭게 개발되어 시험비행계획을 단기간에 마친 모델 14 수퍼 엘렉트라는 1937년 11월 15일에 형식증명을 취득하였다.
 

수퍼 엘렉트라의 운항회사
수퍼 엘렉트라의 최초 고객은 노스웨스트 항공이었다. 노스웨스트 항공은 시작기의 비행전에 호네트 엔진을 탑재한 모델 14-H를 9대 발주하였으며, 1937년 10월부터 노선운항을 시작하였다. 362km/h를 넘는 순항속도와 엘렉트라 시리즈의 쾌적성이 향상된 캐빈을 갖춘 수퍼 엘렉트라는 승객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취항 후 15개월간 노스웨스트 항공에서는 3건의 추락사고가 일어나 수퍼 엘렉트라의 평판이 한때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모델 14는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네덜란드의  국영 항공 회사인 KLM와 동인도의 자회사인 KNILM은 1938년 2월부터 6월까지 11대의 모델 14를 인도받은 첫번째 해외고객이 되었다. 모델 10의 운항실적에 만족한 브리티시 에어웨이즈는 4대의 모델 14-WF62를 발주하였다. 유럽에서는 이밖에도 루마니아의 LARES, 아일랜드의 에어 링거스(Aer Lingus), 프랑스의 Regie Air Afrique, LOT 폴란드 항공 등이 모델 14를 구입하여 노선에 취항하였다.




트랜스 캐나다항공은 16대의 모델 14-H를 한꺼번에 발주하여 단일 발주로는 최대규모의 모델 14를 발주한 항공사가 되었다. 모델 14-H는 나중에 출력 1,200마력의 프래트 & 휘트니 트윈 와스프 S1C3-G 엔진을 탑재한 모델 14-08로 개량되었다. 수퍼 엘렉트라의 최대 운항회사는 일본항공수송회사(나중에 대일본항공으로 개편)로서 라이트 사이클론 엔진을 탑재한 모델 14-WG3를 10대 구입하였으며, 면허생산 계약의 일환으로 타치가와(立川) 항공기가 20대를 구입하였다. 타치가와 항공기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가와사키(川崎) 항공기와 공동으로 출력 900마력의 미쓰비시 Ha-26-I 엔진을 장착한119대의 수퍼 엘렉트라(연합군 코드명 텔마-Thelma)를 제작하였다.

록히드사는 합계 112대의 수퍼 엘렉트라를 생산하였으며, 개인소유자를 위하여 라이트 사이클론 엔진을 탑재한 자가용기로 제작된 4대의 모델 14-N이 포함되어있다. 그 중에서 1대인 NX18973은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가 세계일주 비행용으로 발주한 기체로서 연료탑재량의 증가를 위하여 추가 연료탱크를 장착하였다. 조종사는 하워드 휴즈 이외에 부조종사, 항법사, 무선사, 항공정비사 등 4명의 승무원이 추가로 탑승하며, 1938년 7월 10일에 뉴욕의 플로이드 베네트(Floyd Bennet) 비행장을 이륙하여 91시간 14분 10초의 기록으로 세계일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로드스타의 탄생
민간기로서 수퍼 엘렉트라의 실적은 호조를 보여주었으나 반면에 이 기체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주요 불만사항으로는 경쟁 기종인 DC-3와 비교할 때 좌석마일당 원가가 높다는 점으로 록히드사는 운항면에서의 경제성을 개선하기 위한 필요성에 압박을 받았다. 이에 따라 록히드사는 동체를 1.67m 연장하여 2열분의 좌석을 추가하여 탑승객의 수를 18석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경제성을 높였으며 동시에 방향안정성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었다. 3대의 양산형 모델 14가 새로운 좌석배치로 개조되었으며 시작 초도기(NX17385)는 모델 18로 새롭게 태어나 1939년 9월 21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다.

록히드사는 신형 모델 18의 생산에 주력하기 위하여 모델 14의 생산을 중단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고객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모델 18은 이전의 기종과는 다른 기체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엘렉트라라는 명칭을 대신하여 로드스타(Lodestar)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로드스타의 양산 초도기(NX25604)는 1940년 2월 2일에 초도 비행을 하였으며, 비행시험 결과 승강타의 진동이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수평 안정판을 꼬리부분의 위쪽으로 높여서 장착하고 승강타에 서보탭을 추가하였다. 주익은 안쪽의 뒷전부분에 익현을 넓혀서 주익에서 발생하는 난기류가 꼬리날개에 영향을 주지않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개량형 로드스타는 1940년 3월 30일에 형식증명을 취득하고 미드 콘티넨트 항공(Mid-Continent Airlines)의 노선에 취항하였다.

수퍼 엘렉트라와 같은 출력의 엔진을 장착한 로드스타는 4명의 승객을 추가로 탑승시켜 좌석마일당 원가가 종전보다 향상되었으며 속도성능을 감안하면 DC-3에 필적하는 성능을 갖추었다. 그러나 출현이 늦었던 관계로 로드스타가 등장할 무렵에 미국의 주요 항공회사는 더글러스 기종의 구입을 결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인기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로드스타는 외국의 항공회사에 인기기 있었다. 남아프리카 항공(South African Airways)이 21대를 발주한 것을 비롯하여 트랜스 캐나다 항공(Tran-Canada Airlines : 12대), 영국해외항공(BOAC : 9대), 에어 아프리크(Air Afrique : 5대), 에어 프랑스(Air France : 3대)와 브라질 및 베네주엘라의 항공회사가 로드스타를 발주하였다. 그러나 최대의 발주처는 각국의 군대로서 로드스타를 기초로 설계한 해상초계기인 PV-1 벤추라와 PV-2 하푼과 미 육군항공대의 낙하산부대 수송기인 C-60이 군용기로 유명하다. 록히드사는 군용기 및 민간기를 합하여 모두 625대의 로드스타를 제작하였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로드스타는 지방노선을 운항하는 소규모의 항공회사로 넘겨졌으며,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호화 자가용기로 재등장하여 미국의 많은 일류기업이 자가용기로 로드스타를 운항하였다.

 
최고의 로드스타
로드스타의 사용자중 한 사람인 윌리엄 P. 리어(William P. Lear)는 기업가 정신이 풍부한 역신적인 항공 기술자 겸 발명가로 훗날 리어제트 비즈니스 제트기를 개발하여 항공사에 남을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리어는 “그리니 위니(Greenie Weenie)”라는 이름의 자가용 로드스타로 비행하는 것을 즐겼으며, 이 기체는 항공역학적으로 개선을 실시하여 성능이 향상된 기체였다.

2년간의 연구 끝에 리어의 연구작업은 리어스타(Learstar)로 결실을 맺었으며, 1954년 5월 10일에 초도 비행을 하였다. 이 기체는 주익을 연장하고 끝부분을 각진 형태로 개량하였으며, 수평미익의 형태 변경, 납작한 캐빈 창, 소형 랜딩기어를 장착하였다. 1,425마력의  라이트 사이클론 엔진을 탑재한 리어스타는 최대속도 516km/h, 순항속도 450km/h, 최대항속거리 6,115km를 발휘하여 기존의 민간여객기의 수준을 넘어서는 우수한 성능을 보유하였다. 최대 12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캐빈에는 우아한 분위기를 내기 위하여 기내식을 조리하는 주방, 온수/냉수공급장치, 접이식 칵테일 바, 소프트 베드, 시원스럽게 외부 전망을 제공하는 창문 등이 설치되었다. 리어스타는 “하늘을 나는 리무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65만 달러 가격의 당시 최고 가격의 자가용기였다.
 
 
 [제원 : 록히드 10 엘렉트라]
 
형식 : 단거리 경수송기
전폭 : 16.76m
전장 : 11.76m
전고 : 3.07m
주익 면적 : 42.59㎡
엔진 : 프래트 & 휘트니 와스프 주니어 SB 래디얼 피스톤 엔진(정규출력 450마력) ×2
공허중량 : 2,927 kg
최대이륙중량 : 4,627kg
최대속도 : 325km/h(고도 1,524m)
실용상승한도 : 5,915m
항속거리 : 1,305km
 
 
 [제원 : 록히드 14 수퍼 엘렉트라]
 
형식 : 단/중거리 민간수송기
전폭 : 19.96m
전장 : 13.51m
전고 : 3.48m
주익 면적 : 51.19㎡
엔진 : 프래트 & 휘트니 호네트 S1E-G 래디얼 피스톤 엔진(정규출력 875마력) ×2
공허중량 : 4,672 kg
최대이륙중량 : 7,938kg
최대속도 : 398km/h(고도 2,134m)
실용상승한도 : 7,405m
최대항속거리 : 3,315km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