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4) Boeing 747 Jumbo Jet(pt.2)

제트 여객기의 계보(34)
Boeing 747 Jumbo Jet (pt.2)
 

보잉 2707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이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미 공군의 차기 전략수송기(CX-HLS) 경쟁에서 경쟁사인 록히드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보잉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분간은 707, 727 기종으로 판매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미래의 전망은 불투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최대의 항공사인 팬암(Pan American World Airways)의 회장 후안 트립(Juan Trippe)이 2707 여객기의 대안으로 대형 여객기의 개발을 요구한 것은 보잉으로서 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본격적인 개발, 전략수송기2층 설계 활용
보잉은 미 공군 차기 전략수송기 사업을 준비했던 개발 인력을 대형 여객기의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해 개발을 시작했고 조 서터(Joe Sutter)가 수석엔지니어(Chief Engineer)를 맡았다. 조 서터는 차분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고, 2차대전 당시 미 해군에 후보생으로 입대해 호위구축함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학업을 마친 조 서터는 보잉과 더글러스에 입사지원을 했고 학창시절 보잉에서 인턴 근무한 경력으로 입사하게 됐다. 그 후 보잉 367-80, 707, 727, 737 민간 여객기 시리즈의 개발에 참여하면서 엔지니어 경력을 쌓았다. 대형 여객기 개발이라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조 서터는 미 공군의 차기 전략수송기 사업에서 검토한 기본설계를 최대한 활용해 민간 여객기를 개발한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747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조 서터는 "747의 아버지(Father of the 747)"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조 서터가 이끈 보잉의 개발팀은 처음에 차기 전략수송기의 2층 구조 화물실 배치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했다. 최대한 개발비를 절약하고 개발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잉은 자사의 여객기 중에서 314, 377 기종에서 2층 구조의 설계를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검토 결과 미 연방항공청(FAA)이 규정한 "사고 발생 시 90초 이내 전원 탈출"이라는 요구 조건을 충족하려면 2층 구조의 대형 여객기 개발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 서터는 2층 객실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후안 트립 회장이 요구한 여객기와 화물기 겸용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조종실만 2층에 두고, 승객은 1층에 탑승하는 독특한 구조로 개발을 추진했다.

조 서터가 조종실의 위치를 2층에 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 후안 트립 회장은 2707 초음속 여객기를 이용해 장거리 국제선을 독점한다는 야심이 있었고, 2707 여객기가 취항하면 747 여객기는 화물기로 개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747 기종을 화물기로 사용하면 넓은 동체 내부에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747 기종을 화물기로 사용하면 화물실 바닥의 위, 아래에 2줄로 화물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토 결과 위층에 적재한 대량의 화물 컨테이너를 옆쪽 적재문으로 하역하는 작업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화물기의 앞쪽을 활짝 열고 2줄의 화물 컨테이너를 한꺼번에 싣고 내리는 아이디어를 검토했다. 그 결과 기체의 앞쪽에 위치한 조종실을 2층으로 올리게 됐고 지금의 747의 모습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2층에 조종실과 승무원 휴게실 설치를 계획했다. 그러나 나중에 2층 조종실 뒤쪽의 공간은 항공사의 요구에 따라 1등석(First Class)과 1등석 전용 휴게실(Lounge)이 설치됐다. 결론적으로는 2층 구조를 가지면서 747 기종은 미 공군의 차기 전략수송기에서 볼 수 있는 2층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형 여객기 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인 고성능 엔진은 미 공군 C-5 수송기의 개발 사업에서 완성될 예정이었다. 이처럼 미 공군의 차기 전략수송기 사업은 처음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민군 겸용사업이 됐다.
 

팬암항공의 강행이 개발 이끌어
707 여객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 초대형 여객기인 747을 과연 개발할 수 있는지 여부를 놓고 보잉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특히 747 여객기의 최대이륙중량은 300t이 넘어 707-320B(최대이륙중량 152t)의 2배가 넘었고 450명이 탑승한다는 것 자체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도전이었다. 민간업체인 보잉에서 자체투자로 진행하는 747 사업의 성공 여부에는 회사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707, 720, 727, 737 기종은 모두 렌튼(Renton)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747 기종은 너무 큰 기종이라 렌튼 공장에서 생산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새로운 공장의 건설이 필요했고 보잉은 자금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후안 트립 회장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에 747 여객기 사업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트립 회장은 유럽에서 개발한 콩코드(Concorde) 여객기가 뉴욕 국제공항에 취항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국산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이 지연되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 항공여객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트립 회장은 여객 수요가 계속 증가한다면 자신이 경영하는 팬암항공의 국제선 독점 구조가 언젠가 깨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무언가 대책이 시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747 기종과 같은 대형 여객기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다른 항공사와 차별화가 가능하리라는 구상이 가능했다.

후안 트립 회장은 2707 초음속 여객기가 취항하면 747 기종을 화물기로 사용하면 됐기에 조속한 개발을 요구했다. 747 여객기의 최초 고객인 팬암항공은 20대를 우선적으로 주문했다. 보잉으로서도 대형 여객기인 747 기종은 초대형 항공사인 팬암항공 정도가 돼야 주문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항공여행은 대중화로 접어들고 있었고 증가하는 여객수요를 먼저 잡는 항공사가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6년 4월, 팬암항공이 747 여객기 25대를 5억 2,500만 달러(약 5,900억 원)에 계약했다. 그러자 경쟁자인 노스웨스트항공(Northwest Airlines), TWA(Trans World Airlines), 일본항공(Japan Airlines), 영국 BOAC(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독일 루프트한자(Lufthansa)와 같은 주요 항공사에서도 앞을 다투어 주문했다.




마침내 개발된 보잉의 슈퍼점보
1966년 4월, 보잉은 2년 이내에 747 여객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계약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무리가 있었지만 조 서터가 이끄는 개발팀은 2년간 착실하게 개발을 진행했다. 설계와 개발을 마치고 1968년 9월 30일, 첫 번째 747 여객기가 에버렛(Everett) 공장에서 출고됐다. 에버렛 공장은 747 대형 여객기를 생산하기 위해 보잉에서 새로 건설한 공장으로 현재 747, 767, 777, 787 여객기를 생산하는 보잉의 주력 공장이다. 출고 시점에서 747 여객기는 26개 항공사의 주문을 받았고 출고식에는 해당 26개 항공사의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보잉은 출고식이 끝나자 곧바로 초도비행을 준비했다. 무사히 지상시험을 거친 747 1호기는 1969년 2월 9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초도비행은 보잉의 시험비행 조종사인 잭 와델(Jack Waddell)과 브라이언 위글(Brien Wygle)이 조종간을 잡았다. 조종실이 2층에 위치한 747 여객기는 이착륙할 때 조종사의 시선이 다른 기종과 달라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초도비행을 준비하면서 보잉은 대형 트럭의 지붕에 조종실 모형을 설치해 주행하면서 조종감각을 익히도록 준비했다.

의외로 빠르게 진행된 기체 설계와 달리 보잉 개발팀의 골칫거리는 엔진이었다. 당초 계획으로는 미 공군이 C-5 갤럭시(Galaxy) 전략수송기를 개발하면서 실용화한 GE TF39 엔진을 민간용으로 개조해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GE의 경쟁사인 P&W에서도 동급 엔진 JT9D 엔진을 개발해 공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TF39 터보팬 엔진을 개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목표 성능에 미달하고 말았다. 더구나 P&W JT9D 엔진도 개발과정에서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대형 여객기의 개발에 차질이 발생했다. 300t이 넘는 몸집이 하늘에 뜨려면 고성능 엔진이 필수적인데 여기에서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납품일정에도 차질이 발생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747 여객기는 1969년 파리 에어쇼에 처음으로 참가해 많은 관계자의 주목을 받았다. 이 때 보잉은 747 여객기를 개발하고 에버렛 공장을 건설하면서 12억 달러(약 1조 3,500억 원)가 넘는 자금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빌 앨런(Bill Allen) 보잉 회장과 후안 트립 팬암항공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747 여객기가 탄생하기 못했을 수도 있었다.

대형 여객기에 사용하기에는 다소 불충분한 엔진을 선택해야 했던 보잉 개발팀은 극단의 처방으로 최초 모델인 747-100 여객기에 물분사장치를 추가하는 조치를 실시했다. 물분사장치는 이륙할 때 엔진에 물을 분사해 잠시 추력을 증가하도록 하는 장치다. 그러나 이 장치만으로 부족해 747-100 기종은 기체의 전체에 걸쳐 구조물을 간략화하는 다이어트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아무튼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등장한 747-100 여객기는 최초의 고객인 팬암항공에 인도됐고 1970년 1월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뉴욕~런던 노선에 처음으로 취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주요 국제선 노선은 팬암항공에서 독점하고 있어서 아메리칸항공, 콘티넨탈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과 같은 미국의 주요 항공사는 747 기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항공자유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미국의 대형 항공사는 점차 747 기종을 도입해 국제선 노선에 투입하게 됐다. 미국에서 팬암항공을 제외하면 노스웨스트항공, TWA 정도만 일부 인가된 국제선에서 747 여객기를 운항했다. 거대한 자금이 투입된 보잉으로서는 판매확대가 시급했는데 다행히 영국 BOAC, 일본항공, 독일 루프트한자, 에어프랑스와 같은 주요 국가의 국적항공사의 주문이 이어지면서 판매에 성공했다.
 



747의 초기 계량기종
가장 처음에 생산된 747-100 기종은 엔진의 파워 부족과 기체구조물의 강도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없었던 큰 몸집으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고 모두 168대가 생산됐다. 747-100 기종을 개량한 747-100SR(Short Range)은 일본항공에서 특별히 주문한 기종이다. 일본항공은 좌석이 부족한 단거리 국내선에서 이착륙 횟수를 줄이고 많은 승객을 수송하고자 747-100 기종의 객실에 최대한 많은 좌석을 넣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탄생한 747-100SR 기종은 500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었다. 일본항공과 ANA항공의 747-100SR 기종은 보다 신형인 747-400D 기종이 취항하면서 퇴역했다.

747-100SR 기종을 개량한 747-100B 기종은 단점으로 지적되던 기체 구조물과 랜딩기어를 보강하고 연료탑재량을 늘린 개량형이다. 452명의 승객을 태우고 5,000마일(9,300km)을 비행할 수 있는 이 기종은 이란항공, 사우디아라비아항공에 모두 9대가 인도됐다.

747-100 기종은 대형 여객기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주요 항공사는 엔진의 파워와 항속거리 부족을 지적했고 겨우 대서양을 횡단하는 성능에 불만이 많았다. 747SP(Special Performance) 기종은 팬암항공과 이란항공에서 뉴욕~테헤란 노선에 투입하기 위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게 특별히 개발한 기종이다. 747-100 기종의 동체를 14.74m 단축한 이 기종은 10,000km 거리를 비행할 수 있었다. 긴 항속거리를 자랑하는 747SP 기종은 모두 45대가 생산됐고 대한항공에서도 운항했다.

엔진의 파워 부족으로 제한된 성능만 낼 수 있었던 747-100 기종을 개량한 747-200B 기종은 진정한 의미에서 747 시리즈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747-200 기종은 747-100 기종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엔진 파워 부족, 기체와 랜딩기어의 강도 부족, 항속거리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기종이다. 747-200 기종은 기체 구조물을 재설계하고 고성능 엔진을 탑재했다. 특히 기존의 GE CF6, P&W JT9D 엔진과 더불어 영국 롤스로이스(Rolls-Royce) RB211 엔진까지 합세했고 항공사는 3종류의 엔진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747 초기 모델 중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747-200 기종은 모두 393대가 생산됐고 205대가 판매된 747-100/100B, 747-100SR 기종 판매량의 2배를 기록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