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 여객기의 계보 (41) Airbus A300 (Pt. 3)

제트 여객기의 계보 (41)

Airbus A300 (Pt. 3)

 

경제 성장과 항공산업의 발전으로 여객기 개발의 필요성이 증가되는 시기, 유럽은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항공기를 공동개발키로 했다. 에어버스의 시작, A300의 개발 스토리는 어땠을까?

 

유럽형 제트여객기 필요 대두

1960년대에는 경제 발전으로 비롯된 항공여객의 증가에 힘입어 넓은 객실에 많은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대형 여객기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유럽은 각기 신형 여객기 개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965년 미 공군의 초대형 수송기 “CX-HLS” 개발이 시작됐고 치열한 경쟁 끝에 록히드(Lockheed)가 수주에 성공했다. 보잉(Boeing)은 경쟁에서 탈락했지만 재기해 팬암항공(Pan American Airways)과 초대형 여객기의 개발을 놓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63월에는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에서 미국의 국내선에 적합한 대형 쌍발 여객기의 개발을 요구했고, 이에 더글러스(Douglas), 록히드가 각각 신형 여객기의 개발을 시작했다.

반면 대서양 반대편 유럽에서는 대형 여객기 개발이 필요하다는데 서로 동의했지만, 미국보다 규모가 작은 유럽의 항공업체가 막대한 개발비용을 자체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의 항공업체가 협력해 공동으로 개발하는 방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유럽의 항공시장은 미국과 달리 국가 간 거리가 가까워 짧은 노선에 많은 승객이 탑승하는 특징이 있었다. 반면 탑승객을 줄이고 연료를 많이 탑재해 장거리를 비행하는 미국의 국내선 여객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실정에 적합한 신형 여객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유럽 각국의 항공업체가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이처럼 버스처럼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여객기가 유럽의 항공시장에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에어버스(Airbus)”라는 개념이 시작됐다.

19667, 영국과 프랑스는 에어버스 여객기를 개발하는 주도 업체로 호커 시들리(Hawker Siddeley), 수드 에비에이션(Sud Aviation)을 각각 선정했다. 그리고 서독도 한발 늦게 에어버스 계획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영국은 에어버스 여객기에 자국의 신형 엔진을 탑재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기체 부분을 다소 양보하더라도 자국의 롤스로이스(Rolls-Royce) 엔진을 탑재하도록 관철한다면 장기적으로 큰 경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기체보다 엔진은 판매가격도 높을 뿐만 아니라, 여객기가 운항하는 동안 정기적인 정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작업체의 입장에서 부가가치가 높다. 1966년 말까지 에어버스 계획에 참여하는 영국, 프랑스, 서독의 항공업체는 사업의 참여 규모와 지분을 놓고 협상을 진행했다.

 

구체적인 에어버스 개발 시작

19667, 미국의 보잉은 사상 최대의 제트 여객기인 보잉 747 점보(Jumbo)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에서 개발하는 고성능 CF6 터보팬 엔진(turbofan engine)을 탑재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보잉의 움직임은 막후 협상을 진행하면서 출발이 늦어지던 유럽의 에어버스 계획에 충분한 자극을 줬다.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주도적인 항공업체가 없었던 서독은 196694일에 MBBVFW가 출자하는 에어버스 서독법인을 설립했다. 1967926일에 영국, 프랑스 및 서독 정부는 에어버스 계획을 추진하는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양해각서는 에어버스 설립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체는 프랑스가 개발을 주도하고 영국과 서독은 협력하며, 개발비용은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37.5%, 서독이 25% 부담하기로 했다. 엔진의 개발은 영국이 주도하고 프랑스와 서독이 협력하며, 개발비용은 영국 75%, 프랑스와 서독이 각각 12.5% 부담하기로 했다. 특히 유럽산 여객기라는 원칙에 따라 탑재하는 각종 장비는 유럽제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산과 판매를 전담할 합작법인을 설립하며 본사는 프랑스에 두기로 했다. 에어버스 여객기는 영국의 BEA, 프랑스의 에어프랑스(Air France), 서독의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사에서 75대를 구매하고, 1973년 봄에 취항하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에어버스 계획이 시작되고 검토를 거듭하면서 프로젝트는 점점 대형화됐고, 이러한 움직임에는 미국에서 개발하는 보잉 747 점보 여객기와의 경쟁이 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에어버스는 300인승으로 동체의 지름도 보잉 747 여객기와 비슷한 6.4미터가 됐다. 탑재하는 엔진은 미국 GE CF6 엔진과 경쟁 기종인 프랫 앤 휘트니 (Pratt & Whitney) JT9D 엔진이 검토됐다. 그러나 영국은 자국의 롤스로이스 엔진 채택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결과 영국 롤스로이스에서 새로 개발하는 RB207 터보팬 엔진을 쌍발로 탑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300명이 탑승하는 에어버스 여객기라는 의미에서 A300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19679월에 3개국 정부가 체결한 양해각서도 A300 계획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속적인 설계 변경과 영국의 불만

그러나 개발을 시작하면서 미국과의 경쟁을 의식해 A300은 더욱 대형화됐고 최대이륙중량이 140톤으로 증가하면서 엔진의 추력을 보강해야만 했다. 더구나 개발비용도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당시 항공사는 크고 비싼 여객기를 구매하기 꺼려했고, 1968년까지 1대도 주문이 없었다. 반면에 미국의 더글러스 DC-10, 록히드 L-1011 여객기는 개발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경쟁기종의 개발이 착실하게 진행되는 반면, 유럽의 에어버스는 1대도 팔리지 않았기에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은 에어버스 계획에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록히드 L-1011 기종에 RB211 엔진의 독점 공급에 성공하자 영국의 입장에서는 지지부진한 에어버스 A300 계획에 불만이 많았다.

에어버스는 방향을 수정해 HBN100이라고 이름을 붙인 250인승, 항속거리 1,500km급 이중통로기(wide body) 개발을 검토했다. HBN100은 완전하게 원형 단면을 가진 동체와 대형 쌍발 엔진을 가진 여객기로 당시의 다른 여객기보다 앞서가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여객기 동체의 단면은 정확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 대부분이었고, 엔진 역시 마땅한 고출력 엔진이 없던 관계로 3~4기의 엔진을 탑재하느라 설계가 다양했다. 그러나 에어버스는 이중통로기 여객기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쌍발 엔진을 선택했다. HBN100 기종은 최대이륙중량이 125톤으로 기체가 작아지면서 엔진은 GE CF6, P&W JT9D, 롤스로이스 RB211 3가지 엔진을 선택해 탑재할 수 있었다. 기체의 크기를 줄이고 항공사가 엔진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여객기 판매도 확대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250명이 탑승하는 에어버스라는 의미에서 A250으로 시작한 새로운 설계안은 나중에 A300B라고 이름을 바꿔 항공사를 상대로 마케팅을 시작했다.

그러나 탑재하는 신형 엔진의 독점 공급을 노리던 영국은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1969410일 계획의 탈퇴를 선언했다. 영국제 엔진의 개발비용을 부담하는 영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독점권이 보장되지 않는 A300B 계획은 매력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L-1011 여객기에 탑재하는 RB211 엔진의 개발비용을 지원해야하는 영국 정부의 입장에서 A300에 탑재하는 RB207 엔진의 개발비용까지 동시에 부담하기에는 당시 영국 정부의 재정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점도 일부분 작용했다.

영국이 에어버스 계획에서 탈퇴하면서 기체를 담당하는 호커 시들리는 입장이 모호하게 됐다. 그러나 지지부진하던 에어버스 계획이 탄생하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커 시들리의 입장에서 영국 정부의 탈퇴 결정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내리막을 걷고 있는 영국의 경제사정으로 인해 군용기의 매출이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커 시들리는 민간 여객기 사업까지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호커 시들리는 영국 정부의 탈퇴 결정에도 불구하고 민간업체 차원에서 계속 에어버스 계획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한편 프랑스와 서독 정부는 영국의 탈퇴에도 불구하고 에어버스 계획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고객에게 보여주고자 19695월에 열린 파리 에어쇼에 A300B 여객기의 실물 크기 모형(mock-up)을 전시하고 전 세계 항공사를 상대로 마케팅을 전개했다. 아직 1대의 주문도 없었지만 에어버스 계획은 1972년에 형식인증을 받고 1973년 봄에 취항한다는 당초의 일정을 그대로 진행했다. 특히 1969년 파리에어쇼에서는 프랑스와 서독 정부를 대표해 양국의 항공 장관이 에어버스 계획 협정서에 서명하면서 정식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올해로 에어버스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영국 탈퇴와 스페인·네덜란드의 참여

유럽의 여러 나라가 모여서 시작한 에어버스는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각국 정부가 개발을 진행하는 항공업체에 지원하는 형식으로 출발한 계획이다. 업체 단독으로는 개발비용을 조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항공산업의 발전 측면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엔진 공급의 독점권이 없어진 영국 정부가 탈퇴를 선언하면서 비용 분담을 중단하게 됐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탈퇴에도 불구하고 계속 참여하고자 했던 호커 시들리는 비용 분담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정부의 도움이 없이 호커 시들리는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그러나 항공기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어려운 구성품인 주익을 개발하는 호커 시들리가 이탈한다면 에어버스 계획의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동체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어려운 주익을 다른 업체가 이어받아서 개발한다고 해도 개발 일정이 대폭 지연되고 비용도 크게 증가한다. 더구나 1973년 봄에 취항한다는 목표가 무너지면 고객 항공사가 외면할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대안이 없었기에 프랑스와 서독 정부는 에어버스 계획을 수정하게 됐다. 영국 정부의 탈퇴로 부족한 개발비의 일부는 서독 정부가 추가로 부담하고, 나머지 개발비는 호커 시들리가 자체 부담하는 조건으로 에어버스 계획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호커 시들리는 금융비용에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결정으로 호커 시들리는 주익의 생산을 계속 담당하게 됐고, 오늘날에도 에어버스 여객기의 주익은 대부분 영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영국이 탈퇴하면서 19679월에 체결한 양해각서는 대폭 수정이 불가피했고, 개발비 부족으로 인해 같은 해 11월에 네덜란드가 추가로 참여했다. 그리고 19701월에는 프랑스의 수드 에비에이션과 노르(Nord)를 합병해 국영 항공업체인 아에로스파시알(Aérospatiale)이 설립됐다. 이어서 197012월에는 에어버스 사업을 담당하는 에어버스 합작법인(Airbus Industries)이 설립됐다. 에어버스는 공동설립의 취지에 따라 참여하는 업체가 공동으로 경영책임을 부담하는 독특한 기업이다. 1970년 에어버스 설립 당시 프랑스와 서독은 50 : 50 비율로 출자했다. 이후 197112월에 스페인 CASA가 참여했고, 영국 호커 시들리와 네덜란드 포커(Fokker)가 참여하면서 출자 지분의 변동이 발생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아에로스파시알이 생산물량 36.1% 분담하고 개발비 43% 분담, 서독은 에어버스 독일법인이 생산물량 36.1% 분담하고 개발비 43% 분담, 영국은 호커 시들리가 생산물량 17% 분담하고 개발비 6% 분담, 네덜란드는 포커가 생산물량 6.6% 분담하고 개발비 6% 분담, 스페인은 CASA가 생산물량 4.2% 분담하고 개발비 2% 분담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에어버스 합작법인의 출자는 프랑스 47.9%, 서독 47.9%, 스페인 4.2%이며 영국과 네덜란드는 개발과 생산에만 참여하고 합작법인에 출자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출자구조 덕분에 1990년대 이후 항공산업의 대대적인 구조개편 과정에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은 에어버스를 기반으로 역량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에어버스 합작법인에 투자하지 않았던 영국과 네덜란드는 민간항공시장에서의 주도권 확장 실패로 이어졌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