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11) 록히드 L-049/L-649/L-749 콘스텔레이션 (上)

록히드 L-049/L-649/L-749 콘스텔레이션 (上)
(Lockheed L-049/L-649/L-749 Constellation)

 
록히드 콘스텔레이션은 프로펠러 여객기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에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가격이 비싼 여객기로 우수한 성능을 보유한 최고의 피스톤 엔진 여객기로 유명한 기종이다. 일반적인 여객기의 형태를 갖춘 경쟁 기종인 더글러스 DC-4와 비교할 때 록히드 콘스텔레이션은 외형에서부터 특징이 많았는데, 직선형태의 DC-4와는 달리 콘스텔레이션의 동체 윗부분은 완만하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3엽의 수직미익, 타원형의 주익평면형, 롱 랜딩기어 등의 특징을 가진 콘스텔레이션에 대하여 록히드는 당시 소수의 행운을 가진 항공여행 승객을 위하여 특별하게 제작한 ‘하늘의 여왕’이라고 선전하였으며, 맥아더 원수 및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민간 및 군대의 VIP 수송기로 널리 사용되어 호평을 받았다.

 


1938년 당시에는 콘스텔레이션의 성공을 예상하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해 6월 23일에 맥캐런 법안(McCarran Act)이 시행되면서 미국의 민간항공업계는 큰 변화를 겪었으며, 항공기 제조산업의 경우 보잉, 더글러스 및 록히드의 3강체제로 굳어졌다. 이중에서 보잉과 더글러스는 여압식 캐빈의 모델 307 스트라토라이너와 대형의 4발 여객기인 DC-4를 제작하면서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다. 반면에 록히드의 제조공장은 소형쌍발기 및 군용 허드슨,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제작으로 생산라인이 가득차있었고, 록히드가 기대를 걸고 있는 4발 여객기인 엑스칼리버(Excalibur)는 겨우 목업의 제작에 성공한 단계로 경쟁사인 보잉과 더글러스에 비하여 민간여객기 시장에서 뒤쳐진 상황이었다.
 

콘스텔레이션의 등장
이러한 여건에서 록히드가 여객기의 개발에 뛰어든 계기는 1939년 6월 9일에 유명한 부호인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가 록히드사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워드 휴즈는 트랜스콘티넨탈 웨스턴 에어(TWA)의 주식을 매입하여 지분을 확보하고, 자신이 지명한 잭 프라이(Jack Frye)사장과 함께 록히드 공장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TWA사는 자금력이나 항공노선의 경쟁에서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하워드 휴즈는 미 대륙의 동서해안을 무착륙으로 비행할 수 있는 초호화여객기의 개발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휴즈의 요구사항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으로서 자체중량 24,132kg, 순항속도 483km/h이상으로 비행할 수 있도록 4발의 2,200마력의 엔진을 탑재하고 뉴욕~런던간을 무착륙으로 비행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파격적인 기술조건은 록히드의 경쟁 상대인 다른 제작사들에 의하여 거절되었으며, 휴즈의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록히드사의 봅 그로스(Bob Gross)사장은 록히드의 최고 엔지니어인 홀 L. 히버드와 클라렌스 “켈리” L. 존슨을 불러 어떻게 든 도전하여 계약을 성사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1939년은 록히드가 작은 회사에서 큰 회사로 도약을 한 계기를 만든 중요한 한해였다. 1939년에 하워드 휴즈는 할리우드의 로메인가에 있는 자신의 비밀 장소에서 록히드 기술진과 장기간 협상을 하였으며, 하워드 휴즈는 최종적으로 42만 5천 달러의 가격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헬, TWA는 그 가격을 지불할 수가 없소. 아마도 파산할지도 모르오. 하지만 40대를 제작해주시오. 내가 그 비행기를 모두 사들일 것이오.”
 

군용기로 전환
모델 49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 민간 여객기로 취항을 하기 전에 2차대전이 시작되었으며, 미국도 전시 비상체제로 돌입하면서 자국의 보유 항공기는 전면적으로 민간용에서 미육군항공대(USAAF : United States Army Air Force)의 보유항공기로 전환되었으며, 콘스텔레이션도 우수한 비행성능을 인정 받아 고속수송기로 취역하게 되었다. 군용의 국방색으로 도장을 한 콘스텔레이션은 군용기 명칭인 C-69 콘스텔레이션으로 바뀌었다.

가늘고 긴 동체의 꼬리에는 3엽의 수직미익이 자리잡고, 주익은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설치된 것보다 훨씬 큰 파울러 플랩이 설치되었다. 콘스텔레이션이 성공을 거두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당시로서는 초대형급 엔진인 출력 2,200마력의 라이트 R-3350 사이클론 18 엔진을 선택한 점이었다.

록히드는 전쟁기간 중에 작업지연을 거듭하면서도 콘스텔레이션을 완성하였으며, 시험비행사인 에디 알렌(Eddie Allen)을 고용하여 1943년 1월 9일에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록히드의 버뱅크(Burbank)공장에서 최초의 콘스텔레이션(민간등록기호 NX67900, 록히드 항공기 제조번호 1961)의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다. 2차대전중에 미 육군항공대는 22대의 콘스텔레이션을 수령하였으며, 그 중 9대는 TWA에서 주문한 콘스텔레이션으로 1942년에 록히드와 TWA간의 180대에 달하는 제작 계약 중 13대의 일부 기체였다.

1945년 여름에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미 육군항공대와의 항공기 구입계약은 폐기되었으며 버뱅크공장은 미완성의 C-69 수송기와 함께 폐쇄되고 말았다. 록히드는 15대의 군용 C-69를 민간용인 L-049로 판매하고자 하였으나 전쟁후의 어려운 여건에서 이를 구입하려는 항공회사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따라 록히드는 새로운 콘스텔레이션의 개발에 착수를 결정하게 되었으며, 결국 미국 행정부로부터 여유 분의 치공구, 부품, 자재 및 미완성 단계의 C-69를 다시 사들였다. 그 결과 록히드의 민간용 L-049는 더글러스 DC-6와 보잉 307 스트라토크루저보다 18개월이나 빠르게 등장할 수 있었으며, 록히드는 9일 동안 8개 항공회사로부터 모두 7,750만 달러에 이르는 103대의 콘스텔레이션을 수주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후의 성공
TWA는 1945년 11월에 27대의 L-049중에서 1호기를 인도 받았으며, 12월 11일에 미국 민간항공국(CAA)은 형식증명을 발행하였다. 민간항공노선 취항은 1946년 2월초로서 TWA는 뉴욕~파리 노선, 팬아메리칸항공은 뉴욕~버뮤다 노선에 신형기를 투입하였다. 취항기록은 급속하게 성장하여 1946년 7월까지 2억승객마일의 운항실적을 달성하였다. 1946년 10월 19일에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델 649의 1호기가 초도 비행을 하였다. 이 기체는 호화판 여객기로서 특히 에어컨디셔닝 및 방음이 우수하여 “번쩍이는 코니(Gold Plate Connie)”라고 불렸다.

콘스텔레이션이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잠재력은 개발을 시작할 당시부터 분명한 확인이 가능하였다. 속도와 좌석수를 증가하려는 요구와 페이로드와 항속거리를 향상하고자 요구하는 많은 항공회사의 요청에 대응하기 위하여 록히드는 기체중량, 엔진의 출력, 연료탑재량 및 페이로드를 점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유로운 설계안을 가지고 있었다.

모델 749A는 최초 설계의 파생형으로, 1949년에 록히드는 콘스텔레이션을 대형화하여 페이로드를 증가한 “수퍼 콘스텔레이션(Super Constellation)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수퍼 G 콘스텔레이션”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2세대 L-1049G는 1954년 12월 12일에 초도 비행을 하였다.

L-1049G는 처음으로 북태평양에서 미 대륙까지의 무착륙항로와 최초의 세계일주항로에 취항한 장거리 여객기로서 2차대전후 피스톤 엔진여객기 중에서 최고의 클래식여객기라고 할 수 있는 피스톤 엔진 여객기이다. 각 형식을 합하여 콘스텔레이션은 모두 850여대가 제작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주요 항공회사에서 활약하였으며, 퇴역 후에도 소규모 항공회사 및 부정기 항공회사로 넘겨져 우수한 성능을 활용하여 장거리 노선에서 사용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가된 노선을 어기고 불법운항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만큼 우수한 성능은 오랜 기간동안 이어졌다.

 
L-049의 개발
록히드의 콘스텔레이션 프로그램은 TWA가 9대의 모델 049(록히드 사내명칭 L-049)를 발주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40년에 시제기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TWA의 주문수량은 나중에 40대로 증가하였으며, 팬 아메리칸 항공도 같은 수량을 발주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2차대전의 참전이 임박하면서 콘스텔레이션의 민간항공계의 데뷔는 연기되었다. 미국 행정부는 군사용 항공수송의 필요성을 예상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하면서 1941년에는 민간항공기를 모아서 미 육군항공대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제조라인에서 직접 항공기를 징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콘스텔레이션의 성능에 대하여 기대가 컸던 만큼 미 육군 항공대는 C-69B의 형식명으로 180대를 발주하였다. C-69시리즈 중에서 C-69A는 민간용으로 제작된 기체에 사용하였으며, 처음부터 군용기로 제작한 기체는 C-69B라고 불렸다.

발주에 관하여 민간용 콘스텔레이션의 소유권은 미 육군이 아닌 항공회사에 있었으며, 소유권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자 1942년 6월에 미 육군은 최초의 9대를 TWA로부터 구입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그 밖의 민간 발주 콘스텔레이션도 미 육군의 180대 C-69B의 발주물량에 포함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미 육군의 대량 발주로 실제로 생산이 시작된 C-69는 비행성능의 핵심인 엔진이 B-29 폭격기와 같은 엔진인 관계로 엔진의 공급면에서 우선순위가 밀려서 제작에 애로를 겪었으며, 180대라는 대량발주에 맞지않게 결국 22대만 제작되어 미 육군에 인도하는데 그쳤다.

콘스텔레이션의 시제기의 시험비행을 위하여 록히드사는 보잉사의 수석 테스트 파일로트인 에디 알렌(Eddie Allen)을 스카우트하여 조종간을 잡게 하였으며 부조종사인 밀러 부캐넌과 함께 1943년 1월 9일에 버뱅크 비행장을 이륙하여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다. 1시간에 걸친 초도 비행을 마치고 콘스텔레이션은 시험비행이 이루어지는 무록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시험비행이 진행되면서 콘스텔레이션은 당시의 수송기 수준을 뛰어넘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시제기는 558km/h의 초고속도를 기록하였으며, 순항속도는 출력 52.5%의 상태에서 1.6km당 2.4ℓ의 연비로 443km/h를 달성하였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 육군 항공대의 수송기 수요가 대폭 소멸하자 C-69 프로그램은 중지되었다. 록히드사는 버뱅크 공장을 5일간 폐쇄하면서 장래의 계획을 검토한 결과, 새로운 콘스텔레이션의 개발을 시작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미 육군항공대가 보유한 15대의 C-69 여유 분을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이후 3개월동안 록히드는 8개의 민간항공회사로부터 모두 89대의 L-049의 확정발주를 받았으며 큰 성공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사고 및 실험으로 손실한 2대와 시제기 1대를 제외한 나머지 12대의 C-69가 민간기인 L-049로 개조되어 민간항공회사에 인도되었으며, 생산이 중단되면서 버뱅크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미완성상태로 방치된 C-69도 개조작업을 거쳐 민간항공회사에 인도되었다. L-049는 27시간의 시험비행을 거쳐 1945년 12월 11일에 연방민간항공위원회의 형식증명 제763호를 수령하였다.

TWA는 콘스텔레이션의 개발 당시부터 계획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계로 가장 먼저 기체를 인수하였으며, 최초의 L-049를 1945년 11월 15일에 인수하였다. 그후 팬 아메리칸 항공도 L-049를 인도받았으며, 이들 2개 항공사는 경쟁적으로 콘스텔레이션을 자사의 장거리 항공노선에 취항시켰다.
 

민간항공노선에 취항 
1947년에 팬 아메리칸 항공은 뉴욕에서 영국까지 최초의 장거리 대서양횡단비행을 시작하였으며, TWA는 하루 늦게 뉴욕~파리 노선에 콘스텔레이션을 취항시켰다. TWA항공은 2월 11일에 이탈리아 노선에 정기항공노선에 운항을 시작하였으며, 4일 후에는 로스 앤젤레스~뉴욕간 대륙횡단노선에 콘스텔레이션을 투입하여 종전에 보잉 307 스트라토라이너보다 소요시간을 5시간이상 단축하였다.

L-049 콘스텔레이션은 TWA와 팬 아메리칸 항공에 이어 파네어 드 브라질(팬 아메리칸 출자회사), BOAC, 에어 프랑스, KLM, 엘 알에도 인도되었으며, TWA와 팬 아메리칸 항공에서 사용한 콘스텔레이션도 이스턴 항공(EAL)과 델터항공에 매각되어 정기운항에 투입되었다. L-049의 좌석배치는 당초 북대서양 횡단노선에는 4열 47석의 퍼스트 클래스로 배치하였으나, 나중에는 96.5cm 좌석간격으로 5열 배치한 투어리스트 클래스를 적용하여 60석으로 좌석수가 증가하였다. 또한 좌석간격을 더욱 좁히는 이코노미 클래스의 경우 81석 배치도 가능하였다.

L-049 콘스텔레이션은 주요 민간항공회사에서 취항한 후 다수의 기체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부정기 항공회사에 매각되었다. 이들 회사에 양도된 콘스텔레이션의 대부분은 전세기 운항에 취항하였다.

록히드는 15대의 C-69와 73대의 L-049를 제작하였으며, 그 중에는 버뱅크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민간항공회사의 표준사양으로 개조된 7대의 C-69가 포함되어있다.

 
개량형 L-649/L-749 콘스텔레이션
록히드의 콘스텔레이션은 1946년 말의 시점에서 우수한 성능의 여객기로서 부동의 위치를 보유하고 해외여행의 쾌적과 편리성을 한단계 높여주었다. 1945년 5월에 록히드는 L-049의 개량형에 대한 설계작업을 개시하였으며, 이 신형기는 모델 049의 절반에 이르는 부분을 새롭게 설계하여 순항속도를 높이고 경제성과 적재량을 향상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기체의 중량증가에 대처하고자 라이트사는 전쟁 중에 B-29 폭격기에 탑재한 R-3350 엔진에서 얻은 경험을 활용하여 민간용으로 사용할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L-649에는 이륙마력 2,500마력급으로 향상된 R-3350 엔진을 탑재하였다.

최초의 L-649(N101A)는 1946년 10월 19일에 초도 비행을 하였으며, 14대를 발주한 이스턴 항공에 1947년 5월 13일에 1호기가 인도되었다. 이스턴 항공은 7대를 추가 발주하였으며 추가 발주분은 L-649의 성능 향상형인 L-749로 변경되어 인도되었다.

1940년대의 대서양 횡단 여객기는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섬의 간다, 아일랜드의 샤논에서 급유를 받기 위하여 중간 착륙이 필요하였다. 한편 태평양을 횡단하는 노선의 경우 하와이, 웨이크, 괌이 중간 급유 지점이었다. 당시의 항공회사는 장거리 해상비행과 대륙 횡단비행이 가능한 여객기에 관심이 높았으며, 이에 따라 록히드는 L-649의 장거리형을 긴급하게 개발할 것을 결정하였다. L-749의 주익 연료탱크 용량은 2,139ℓ의 연료탱크를 양쪽 외익부에 추가하여 모두 22,029ℓ로 증가하였다. L-749의 최대중량은 주익을 개조하여 약간 증가하였고 페이로드는 L-649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항속거리의 경우 1,609km가 대폭 연장되었다.




항속거리의 연장에 따라 무착륙으로 대서양횡단이 가능하게 되어 동쪽으로 비행할 때는 중간기착이 필요하지만 서쪽으로 비행할 때는 바람의 영향으로 무착륙비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황금 노선인 뉴욕~파리간 5,890km 항공노선을 항속거리 범위에 넣을 수 있는 L-749는 유럽 노선을 공략할 수 있는 장거리 여객기로서, 에어 프랑스에서 14대를 발주하여 1947년 4월 1일에 1호기를 인도받았다. 팬 아메리칸 항공은 최초로 제작한 L-749를 사용하여 1947년 4월 18일부터 뉴욕을 출발하는 동쪽으로의 세계일주 기록비행수립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민간항공회사에서 L-649와 L-749의 지위는 부동의 존재로서 록히드는 콘스텔레이션의 지속적인 성능향상을 위하여 1949년 초에 L-749A를 발표하였으며 이 기종은 1세대 콘스텔레이션의 최종판이었다. 최대 총중량은 48,535kg으로 증가하여 최대 페이로드가 2,268kg이 증가한 L-749A는 주익의 중앙부분 구조를 강화하고 랜딩기어의 강도를 높였으며 브레이크와 타이어를 보강하였다.

L-749와 L-749A는 콘스텔레이션을 운항중인 항공회사를 비롯하여 새롭게 채택하는 항공회사에도 판매되었으며, L-749와 L-749A를 합쳐 119대가 제작되었다.
 
[제원 : 록히드 L-649/L-749]
 
형식 : 장거리 4발 여객기
전폭 : 37.46m
전장 : 29.03m
전고 : 7.21m
주익 면적 : 153.29㎡
엔진 : 라이트 GR-3350-749-C18BD-1 사이클론 더블 래디얼 피스톤 엔진(정규출력 2,500마력) ×4
자체중량 : 26,670kg
최대착륙중량 : 68,239kg
최대총중량 : 42,638kg
최대페이로드 : 9,179kg
최대속도 : 566km/h
순항속도 : 517 km/h(고도 7,000m)
실용상승한도 : 7,833m
항속거리 : 5,150km
승객 :  64명(4열 좌석)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