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8) Lockheed L-1011 TriStar (Pt. 2)

제트 여객기의 계보 (38)
Lockheed L-1011 TriStar (Pt. 2)

 


냉전 시기에 군용기 사업이 전문이었던 록히드(Lockheed)가 민간 여객기 사업으로 눈을 돌린 결정적인 계기는 미 공군 C-5 갤럭시(Galaxy)사업의 영향이 가장 컸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력 사업이었던 F-104 전투기의 생산이 마무리되고, 후속 전투기 사업은 부진했다. 더구나 미 육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입어 개발하던 AH-56 샤이엔(Cheyenne) 공격헬기 사업은 미 공군이 사업의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결국 미 육군과 미 공군은 새로운 지상공격기를 개발하기로 합의했고 마침내 A-10 공격기가 등장했다. A-10 공격기는 성공한 기종이었지만 반면에 록히드의 입장에서는 사업의 중단이라는 타격을 입게 됐다.
 

여객기 개발이 마지막 비상구
비행성능이 우수하기로 소문난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 여객기를 개발한 록히드는 2차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에 어떤 후속 기종을 내놓을 것인가 고민했다. 1952년부터 운항을 시작한 영국의 D.H.106 코메트(Comet) 제트 여객기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운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속으로 발생한 의문의 추락사고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록히드는 불완전한 터보제트 엔진(turbojet engine)보다 신뢰할 수 있는 터보프롭 엔진(turboprop engine)을 선택했다. 이러한 결정은 유럽 항공운송시장에서 영국의 빅커스(Vickers) 뱅가드(Vanguard), 바이카운트(Viscount)와 같은 터보프롭 여객기가 크게 활약하고 있는 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제트 엔진을 포기한 록히드가 콘스텔레이션 이후 처음으로 선보인 L-188 엘렉트라(Electra) 여객기는 기대와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주익과 엔진을 연결하는 부분의 설계 착오는 결국 추락 사고를 불러왔다. D.H.106 코메트 제트 여객기의 실패를 목격한 록히드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터보프롭 엔진을 선택했다. 그러나 설계 착오가 불러온 결과는 매우 심각했고 록히드는 한동안 여객기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록히드에게 주어진 한줄기 희망이 바로 초음속 여객기(SST, supersonic Transport) 프로젝트였다. 유럽과 소련에서 먼저 등장한 초음속 여객기에게 선수를 빼앗긴 미국은 교통부 주도로 초음속 여객기 개발을 추진했다. 개발 사업을 놓고 미국의 대표적인 항공회사인 록히드, 보잉(Boeing), 노스 아메리칸(North American)이 경쟁했다. 록히드는 일찌감치 1956년부터 자체적으로 초음속 여객기 개발을 추진했다. 실제로 록히드가 제안한 L-2000 설계안은 보잉 733 SST보다 최대속도, 좌석수, 항공역학 성능이 모두 우수한 기종이었다. 그러나 심사 도중에 보잉이 2707 설계안을 다시 내놓으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가변익을 가진 보잉 2707 제안이 채택되면서 록히드는 다시 한 번 고배를 마셨다. 초음속 여객기(SST) 프로젝트는 결국 막대한 개발비용이 문제가 돼 1971년에 중단됐지만, 록히드로서는 여객기 시장에 다시 진입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

이후 L-188 엘렉트라를 개조한 P-3 오라이언(Orion) 해상초계기 사업이 성공하고, C-130 허큘리즈(Hercules)와 C-141 스타리프터(Starlifter) 수송기 사업이 호조를 보이면서 록히드는 당분간 여객기 사업을 접고 있었다. 그러나 큰 기대를 걸고 입찰경쟁에 승리한 C-5 갤럭시 수송기 사업에서 설계상 하자와 국방예산 삭감의 여파로 생산수량이 줄어드는 바람에 록히드는 경영난을 겪게 됐다. 물론 주익의 강도에 문제가 발생해 재설계가 발생한 원인은 록히드에게 있지만 못내 아쉬운 점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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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 공군의 초대형 수송기(CX-HLS) 사업은 록히드뿐만 아니라 보잉, 더글러스(Douglas)에도 모두 큰 영향을 준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3사가 경쟁해 록히드가 수주에 성공했지만 납품수량 축소로 인해 록히드는 경영난이 발생했다. 한편 보잉은 수주실패를 계기로 초대형 여객기 개발을 시작해 보잉 747 점보(Jumbo) 여객기를 개발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반면에 더글러스는 원래 계획했던 초대형 여객기를 대신해 DC-10 여객기를 개발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추락사고가 일어나면서 DC 여객기 시리즈에 큰 타격을 입었다.

록히드에게 계속되는 사업의 불운을 타개할 마지막 비상구는 제트 여객기 사업이었다. 군용기 사업이 하락세를 보인 점도 작용했지만 터보프롭 여객기와 초음속 여객기 사업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은 록히드로서는 더 이상 기댈 언덕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1966년에 CL-1011 쌍발 제트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여객기 시장에 복귀한 록히드는 캘리포니아 팜데일(Palmdale)에 있는 공군 시설을 임차하고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첫 번째 고객으로 삼은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의 요구 성능에 맞추고자 록히드는 3발 엔진을 탑재한 230~250석 급 중거리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보잉 707, 더글러스 DC-8 여객기와 정면 대결보다는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록히드는 중거리 여객기가 유럽에서도 큰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유럽 대륙은 주요 도시의 거리가 가깝고 여객의 수요가 많은 독특한 시장으로 수요가 충분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록히드는 미국제 엔진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유럽시장을 공략하고자 영국제 롤스로이스(Rolls-Royce) RB211 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경쟁 기종인 더글러스 DC-10 여객기에 탑재된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F6 터보팬 엔진과 동급 추력이지만 훨씬 더 조용하고 연비가 높은 우수한 엔진이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갖추고 1967년 9월에 고급스러운 신형 여객기로 등장한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TriStar)는 가장 먼저 신형 여객기를 요구한 아메리칸항공을 비롯하여 이스턴항공(Eastern Air Lines), 트랜스월드항공(TWA), 내셔널항공(National Airlines) 등 미국의 주요 항공사를 대상으로 판촉활동을 전개했다. 경쟁기종인 더글러스 DC-10보다 서둘러 발표한 것도 기술적인 자부심보다는 시장을 먼저 선점하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록히드의 신형 여객기 발표에 당황한 더글러스는 기본설계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1월에 계획을 발표했다. 전반적으로 더글러스보다 다소 여유가 있었던 록히드는 개발 진척도가 앞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개발 지연 이끈 엔진 문제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신형 RB211 엔진을 개발하던 롤스로이스에서 기술적인 문제가 겹치면서 비용문제가 급증했다. 급기야 롤스로이스는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신형 RB211 엔진을 개발하면서 엔진의 무게를 줄이고 연비를 높이고자 팬 블레이드(fan blade)에 금속을 대신해 복합재를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최첨단 재료인 복합재로 만들어 내구성이 충분할 것으로 예상된 팬블레이드가 조류 충돌시험에도 실패해 개발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됐다. 이러한 개발비용 증가는 결국 롤스로이스의 재무상황을 악화시켰다. 원래 유럽 시장을 공략하고자 영국제 엔진을 과감하게 채택한 결정이 문제를 일으킨 셈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록히드는 가능한 방법을 강구했다. RB211 엔진 대신에 제너럴 일렉트릭 CF6, P&W JT9D 엔진 교체를 검토했으나, L-1011 여객기의 재설계가 필요했다. 따라서 록히드는 어떻게 하든 롤스로이스 RB211 엔진 개발의 완성이 필요했다. 당시 경영적자가 심각하였던 록히드는 영국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다. 마침내 RB211 엔진을 계속 개발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L-1011 여객기의 생산을 보장하는 대신 영국 정부에서 롤스로이스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약속대로 영국 정부는 롤스로이스를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유화했고 록히드는 파산을 피할 수 있게 됐다.

1970년 11월 16일에 팜데일 공장에서 초도비행에 성공한 L-1011 트라이스타는 시험비행을 거쳐 1972년 4월 15일에 미 연방항공청(FAA) 형식인증을 받아 4월 28일부터 이스턴항공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경쟁상대인 더글러스 DC-10보다 2달 먼저 계획을 발표했지만 L-1011 트라이스타는 엔진 문제를 겪으면서 일정이 지연됐다. L-1011 트라이스타는 1971년 8월에 아메리칸항공에 취항한 DC-10보다 9개월이 늦은 1972년 4월에 취항했다.
 



록히드, 상업적 실패 거두고 여객기 시장 철수
록히드는 기술적으로 앞선 L-1011 트라이스타가 완성도가 높은 고급 기종이라고 자부했지만, 실제로 항공운항사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는 아메리칸항공이 더글러스 DC-10을 선택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는 최초의 요구 성능에 딱 맞춰 개발된 기종으로 향후 탑승객과 항속거리 증가에 대비한 여유가 설계에 반영돼 있지 않았다. 반면에 더글러스 DC-10의 경우 최대이륙중량 증가에 대비해 기체를 확대할 수 있도록 설계에 반영하고 있었다. 그 결과 최대이륙중량 증가가 어려운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는 항공사에서 요구하는 장거리 비행성능을 맞추기 힘들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항공사는 미국 대륙과 대서양 횡단노선에서 더글러스 DC-10을 선호했다. 반면에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는 중거리 노선에만 한정해 취항하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시장의 요구와 다른 항공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민간 여객기 시장에서 치명적이다. 결국 완성된 여객기를 구매할 고객은 항공운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수사업에 중점을 두었던 록히드는 민간 여객기 시장의 상황에 둔감했고 기술적으로 우수한 기종을 개발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시장의 냉담한 반응에 자극을 받은 록히드는 최대이륙중량이 고정된 상태에서 항속거리를 연장하기 위해 동체를 단축해 탑승객을 줄인 L-1011-500 장거리 형을 개발해 1979년 4월에 내놓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더구나 록히드가 노렸던 유럽 항공시장에서 새로 등장한 에어버스(Airbus) A300 여객기는 쌍발 엔진에 300명이 탑승할 수 있어 경쟁력이 높았다.

불운이 겹쳐 판매가 부진하였던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는 사실 기술적으로 볼 때 매우 우수한 기종이다. 기체중량을 줄이고자 리벳을 대신해 접착공법을 사용한 점이나 일체형 수평미익, 자동비행조종장치 등은 시대를 앞서는 기술이었다. 이러한 점은 실제 운항실적에서 나타나는데 운항 초기에 화물실 도어 문제로 추락사고가 발생한 DC-10과 달리 L-1011은 악기상이나 조종사의 실수를 제외하고 기체의 결함에 의한 사고발생이 매우 낮은 안전한 기종으로 유명하다.



군용기 사업에 집중했던 록히드는 L-1011 사업을 진행하면서 경쟁사인 더글러스와 비교할 때 민간 여객기 시장의 상황에 미숙했다. 그 결과 L-1011 트라이스타는 1972년에 출고된 이래 249대만 판매되는데 그쳤다. 주요 고객은 이스턴항공을 시작으로 트랜스월드항공(TWA), 팬암항공, 에어 캐나다, 델타항공, 전일본공수(ANA), 캐세이퍼시픽항공, 영국항공 등이었다.

판매부진을 겪은 록히드는 1981년 12월 7일에 L-1011 트라이스타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민간 여객기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최대이륙중량이 제한되는 기술적인 한계로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는 여객기에서 화물기로 개조되는 사례도 드물었다. 아직까지 화물기가 많이 남아있는 더글러스 DC-10과 달리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는 운항 중인 기체가 드물다. 다만 영국 공군이 구형 공중급유기를 대체하고자 영국항공과 팬암항공에서 사용하던 9대의 중고기를 구입해 공중급유기 겸 수송기로 사용했다.

햇살이 뜨거운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록히드 L-1011 트리아스타(팜데일 공장)와 더글러스 DC-10(롱비치 공장) 여객기는 개발단계에서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완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요구에 응답한 더글러스 DC-10 여객기가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보다 2배 가까이 판매됐음이 결과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