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16) Boeing 707(Part.1)

제트 여객기의 계보 (16)
Boeing 707(Part.1)

 

 
보잉 377 실패 딛고 재도전
영국에서 D.H. 코메트 여객기를 먼저 개발하면서 제트 여객기 경쟁에서 한 발 뒤쳐진 보잉은 냉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후반에 미 공군 전략폭격기 사업에 주력하면서 제트기 기술을 하나씩 익히면서 실력을 축적했다. 보잉 역시 조급한 마음에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서둘러 제트여객기를 개발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냉전의 상황에서 미 공군이 추진하던 신형 폭격기 개발의 규모가 워낙 크고 중요한 사업이었기에 보잉의 경영진은 일단 우선순위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보잉의 입장에서는 과거 B-17, B-29 전략폭격기 사업이 회사의 주력 사업일 뿐 아니라 폭격기 기술을 응용해 여객기로 개조한 기종이 모두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형 여객기의 개발이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보잉은 B-29 폭격기 기체를 여객기로 개조해 개발한 보잉 377 여객기 사업의 실패로 1,5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던 상처가 컸기에 제트여객기를 개발에 쉽사리 손을 델 수 없었다. 다만 보잉의 엔지니어는 B-47 폭격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독일에서 입수한 후퇴익 기술을 적용한 결과 제트전투기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는 놀라운 비행성능을 확인하고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세계 2차 대전이 막 끝난 시점인 1945년 9월 1일에 보잉의 사장으로 부임한 윌리엄 맥퍼슨 알렌은 몬태나에서 출생했으며, 1925년에 하버드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이후 보잉의 법률고문을 맡았고 1944년에 필립 구스타프 존슨 사장이 뇌출혈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면서 후임자로 선출됐다. 항공기 전문가도 아니고 특별하게 눈에 띄는 특징이 없지만 빌 알렌 사장은 B-47 폭격기사업으로 조성된 상승세를 이어나가면서 제트여객기로 승부수를 날려 회사를 크게 성장하도록 기여했다.
 
막상 제트여객기 사업을 시작하려고 해도 가장 먼저 상업운항을 시작한 영국의 코메트 제트여객기가 연쇄적으로 의문의 추락 사고를 일으키자 위험을 부담하고 싶지 않았던 민간 항공사는 기존에 사용하던 왕복 엔진 여객기를 계속 사용하거나 왕복 엔진을 터보프롭 엔진으로 바꾸는 정도에서 적당히 타협하고자 했다. 실제로 코메트 제트여객기가 설계결함으로 추락 사고를 일으키자 영국의 다른 항공기 제작업체는 보다 안전한 대형 터보프롭 여객기 개발에 집중했다.
 
그러나 코메트 여객기의 실패를 지켜보던 보잉의 엔지니어는 후발주자의 입장에서 코메트 여객기에서 발생한 문제점이 사소한 설계결함이었고 미 공군에 납품하는 B-47 제트 폭격기 개발과정에서 축적한 기술을 활용한다면 보다 안전한 제트 여객기를 개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빌 알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1,600만 달러라는 거액을 투입해 사내 자체개발 프로젝트로 시작한 보잉 367-80 시제기는 예상대로 놀라운 성능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지켜보던 미 공군이 속도가 느려 B-47 제트폭격기와 함께 행동하는데 지장이 많았던 KC-97 공중급유기를 대신하는 신형 공중급유기로 무려 800여 대를 구매해 보잉 367-80 기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냉전의 상황에서 장거리 전략폭격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미 공군은 전략폭격기와 공중급유기가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모두 제트엔진을 탑재하는데 열심이었지만 민간 항공사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에서 개발비용을 대출받아 제트기 개발에 승부수를 건 빌 알렌은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빌 알렌 사장은 1955년 8월 7일에 시애틀에서 민간항공사 대표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컨퍼런스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당시 보잉의 수석 시험비행 조종사인 텍스 존스턴에게 회의장 상공을 비행하도록 했다. 좀 특별한 인물이었던 텍스 존스턴은 돌출행동을 하는 특별한 인물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의장 상공을 비행하면서 기체를 약간 상승시키더니 옆을 한 바퀴 회전을 하는 곡예비행을 선보였고 하강하면서 다시 한 번 옆으로 회전하는 특별한 비행을 선보였다.

당연히 회의장에 있던 항공회사 대표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 중에서도 빌 알렌 사장 본인이 가장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빌 알렌 사장은 텍스 존스턴으로 해금 비행을 하라고 했지 곡예비행을 하라고 지시한 것을 아니었다. 만약에 그 때 묘기비행으로 추락사고가 발생했다면 보잉의 운명이 어찌됐을지 모르지만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던 후안 트립 회장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다.
 
유명한 미국의 국제선 항공사인 팬아메리칸항공의 창업주인 후안 트립은 미 해군 조종사 출신으로 1927년에 팬암을 설립하고 미국의 민간항공사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쿠바 노선을 개척하면서 회사를 발전시킨 신화적인 인물이다.
 
 
팬암, 최초의 707 고객
1950년대 초반에는 구형 여객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기에 항속거리가 부족해 중간에 급유를 위해 2~3번 착륙해야 했고 낮은 고도로 비행했기에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결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요금이 매우 비싼 편이라서 부유한 여행객이 주로 이용했고 최고의 기내 서비스를 제공했다. 반면에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일반 여행객들은 비싼 항공편을 대신해 속도는 느리지만 저렴한 요금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을 많이 이용했다.

그러나 미래를 볼 줄 아는 후안 트립 회장은 조만간 여객선을 대신해 항공여행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다만 뉴욕을 출발해 런던이나 파리까지 단번에 이어줄 수 있는 장거리 여객기가 없어 고민이었다. 보잉 367-80 제트기가 비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성능을 반신반의했던 후안 트립 회장은 다른 항공사와 차별화되는 경쟁우위를 가지고 싶은 욕심에 다른 민간 항공사들이 주저하는 와중에 1955년 10월에 20대의 보잉 707 제트여객기를 주문하면서 최초의 무착륙 대서양 횡단노선을 개척했다. 팬암 항공에서 보잉 707 제트여객기를 주문하자 다른 항공사도 뒤를 이어 주문을 이어갔다.
 
항공업계에서 경험이 많은 후안 트립 회장은 제트여객기 시대를 개척하면서 리스크를 줄이고자 보잉 707 여객기를 주문한 다음 더글러스 DC-8 여객기도 병행해 주문했는데 다만 DC-8 여객기의 좁은 실내에 불만이 많았던 후안 트립 회장은 보잉에게 동체의 폭을 넓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보잉의 엔지니어는 원래 2+3열 배치로 개발했던 동체 폭 144인치의 KC-135 공중급유기와 보잉 707 여객기를 같은 동체로 개발하려던 계획을 수정해 동체의 폭을 148인치로 확대했다. 동체 폭이 넓어짐에 따라 이코노미석은 3+3배치가 가능하게 됐고 일등석은 2+2배치가 가능하게 됐다.
이미 보잉 367-80 시제기로 기본적인 개발을 마친 보잉 707 여객기는 최초의 양산기체인 보잉 707-120 모델이 짧은 기간에 완성돼 1957년 12월 20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했으며, 다음해 9월 18일에는 FAA 감사관을 태우고 FAA 인증비행에 성공하면서 성공적인 개발을 마무리했다.
 


최초의 모델인 보잉 707-120 모델은 제트 전투기에 사용하는 엔진을 민간용으로 개조한 JT3C 엔진을 탑재했으며 다른 어떤 왕복엔진 여객기보다 진동이 적고 조용한 비행을 즐길 수 있는 정숙성을 자랑했다. 팬암 항공은 1958년 10월 26일에 뉴욕 아이들와일드 공항과 파리 르부르제 공항을 잇는 노선에 보잉 707-121 기종을 투입해 취항했는데 당시 보잉 707 초기 모델은 항속거리가 아직 부족해 캐나다 갠더 공항에서 한 번 착륙해 급유를 해야만 했다.

195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요즘과 달리 항공여객의 수요가 적었기 때문에 호주 콴타스항공의 경우에는 보잉 707 기종에 승객을 채울 자신이 없어서 동체를 짧게 줄인 보잉 707-138 기종을 특별히 주문하기도 했다. 보잉 707-138 기종은 동체는 짧아졌지만 엔진은 그대로 유지해 항속거리가 길어져 장거리 노선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브라니프 항공(Braniff International Airways)은 엔진을 개량해 출력이 높아진 JT4A 엔진을 탑재한 보잉 707-220 기종을 주문했으며 이 모델은 좀 더 개량을 거쳐 보잉 707 시리즈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보잉 707-320 모델로 발전했다.
 
코메트 추락사고 이후 영국제 제트여객기를 채택하기에 부담을 느낀 영국의 민간 항공사들은 장거리 노선용으로 보잉 707 여객기를 주문하고자 했는데 다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보잉 707-320 기체에 영국제 콘웨이 터보팬 엔진을 탑재한 보잉 707-420 기종으로 개량해 구입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