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40) Airbus A300 (Pt. 2)

제트 여객기의 계보 (39)
Airbus A300 (Pt. 1)



 

2차 대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유럽의 경제가 성장하던 195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제트 여객기는 여행객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폭을 넓혀 주었다. 이러한 항공 교통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가 국경을 접한 유럽은 철도가 더 대중적인 교통수단이었다.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공항에 일찍 도착해 탑승수속을 하는 수고보다는 도심에 있는 철도역에서 바로 열차에 탑승하는 편이 여행객에게는 훨씬 편리하다. 더구나 유럽은 철도망이 잘 발달했고 모든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비행시간이 비교적 짧은 유럽 대륙은 항공교통이 발달하기 힘든 조건에 놓여있었다.

 

영국, 유럽 항공산업을 개척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 교통의 발전에 앞장을 선 국가가 바로 영국이다.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 D H. 106 코메트(Comet)를 개발한 영국은 일찌감치 유럽 대륙과 영국을 이어주는 항공편 개설에 적극적이었다. 지금은 도버 해협에 철도 터널이 개통돼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다. 그러나 해저 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에는 철도를 이용해 유럽으로 가려고 해도 도버 해협 구간에서는 여객선을 이용해야만 했다. 마음대로 철도를 이용할 수 있는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은 철도를 이용하는데 한계가 분명하게 있었다.

이러한 여건은 영국으로 하여금 제트 여객기의 대중화를 노력하도록 했다. 한편 영국은 본국과 영연방 국가를 연결하는 장거리 교통수단으로도 제트 여객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은 1949DH. 106 코메트를 시작으로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Hawker Siddeley Trident, 1964), VC-10(1964), BAC 1-11(1965)과 같은 제트 여객기를 잇달아 개발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다음 영국 경제는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정부는 재정지출을 대폭 줄여야만 했다. 이에 따라 군수사업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던 영국의 항공업계는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이러한 사정으로 1950년대 말 영국 정부는 항공업체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4개의 항공업체(Avro, Blackburn, de Havilland, Folland)가 호커 시들리 (Hawker Siddeley)로 통합됐고, 4개의 항공업체(Bristol, English Electric, Hunting, Vickers-Armstrongs)BAC(British Aircraft Corporation)로 통합됐다. 이렇게 1960년대 초에 새로 출범한 영국의 양대 항공업체는 사업을 재편하면서 경영정상화에 노력했다. 1960년대가 냉전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정지출에 압박을 받던 영국 정부는 신형 군용기의 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새로 출범한 양대 항공업체는 당시 크게 성장하던 민간 여객기 사업에 주목하게 됐다.

호커 시들리는 통합 이전에 DH.(de Havilland)에서 개발하던 DH.121 제트 여객기를 이어받아 1962H.S 121 트라이던트 여객기를 선보였다. 한편 BAC는 헌팅(Hunting)에서 개발하던 소형 여객기 계획을 이어받아 1965년에 BAC 1-11 여객기를 내놓았다. 그리고 BAC는 빅커스(Vickers)에서 개발한 VC.10 장거리 여객기 사업도 계속 진행했다. 양대 업체 중에서도 호커 시들리가 민간 여객기 시장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D,H. 106 코메트(Comet)>

미국제 보잉의 강공

한편 1963년에 선보인 보잉(Boeing) 727 여객기는 미국 국내선 노선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잡으면서 제트 여객기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먼저 등장한 707 여객기는 미국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주로 장거리 국제노선에 투입됐다. 따라서 미국 국내선 노선의 제트화는 727 여객기가 등장할 때까지 다소 늦춰졌다.

1963년에 개발된 727 여객기는 1964년부터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한편 727 여객기의 경쟁 기종으로 개발된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여객기도 같은 해에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두 기종 모두 100인승 여객기였고 엔진도 3기의 JT8D 터보팬 엔진을 탑재했다. 그러나 727 여객기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1,800대 이상 판매된 반면,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여객기는 불과 117대만 판매됐다.

1960년대에 항공여객 시장이 크게 성장하던 유럽에서도 727 여객기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영국 항공업체 입장에서는 자국산 여객기 판매에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영국의 대표적인 항공사 BEA항공(British European Airways)을 비롯해 많은 항공사들은 자국산 트라이던트를 대신해 727 여객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에어프랑스(Air France), 루프트한자(Lufthansa), 알리탈리아(Alitalia), 이베리아(Iberia)와 같은 유럽의 대형 항공사들도 트라이던트 대신 727 여객기를 선택했다. 한편 1959년에 상업운항을 시작한 프랑스의 슈드 카라벨(Sud Aviation Caravelle)도 영국의 트라이던트보다 비교적 판매가 순조로운 편이었지만 280여 대 판매에 그쳐 727 여객기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727 여객기는 미국 국내선 노선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기종이다. 그러나 국내선이라고 해도 미국 대륙이 워낙 넓기 때문에 유럽 대륙 기준에서는 국제선 노선 취항에 충분했다. 실제로 727 여객기의 항속거리가 4,200km인 반면 트라이던트 여객기의 항속거리는 절반 수준인 2,100km 정도에 불과했다. 이러한 항속거리의 차이는 곧바로 판매실적으로 이어졌고, 유럽의 항공사조차 미국제 727 기종을 선호했다.

항속거리에 여유가 있으면 연료를 줄이고 승객과 짐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항속거리가 짧으면 기착하는 공항에서 재급유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항속거리와 연료 탑재량에 여유가 있으면 운항지원을 덜 받아도 되고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유럽 항공여객 시장의 주역은 유럽 기종이 아닌 미국제 727 여객기였다.

영국은 물론이고 항공산업의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 역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한편 독일의 경우 전후 경제복구와 항공산업 금지조치를 거치면서 경쟁력이 크게 약화돼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이러한 사정으로 독일은 1960년대 네덜란드와 40인승 소형 여객기 공동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다.

막 성장하기 시작한 유럽 항공여객 시장에 미국제 여객기가 활약하는 상황에서 유럽의 항공업체가 새로운 제트 여객기 개발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형 여객기의 개발은 비용이 많이 필요하고 실패의 위험도 생각해야만 했다.

 

                                                                                                                                                                          <보잉 727>

간편하게 탑승
에어버스개념 탄생

당시 유럽의 항공업체는 미국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어느 한 업체가 단독으로 신형 여객기를 추진하기에는 부담이 매우 컸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럽의 항공업체가 서로 협력해 공동으로 새로운 제트 여객기를 개발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영국이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 제조업 기반이 약해진 영국은 항공산업을 통해 산업발전을 이룩하려고 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항공산업은 고급 인력의 고용을 늘리는 견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더구나 영국과 유럽 대륙을 이어주는 항공노선의 잠재 수요도 충분했다. 특히 유럽에서 가장 높은 기술력으로 제트 엔진을 공급하는 롤스로이스(Rolls-Royce)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더욱 기대가 컸다.

1964년 영국 국립항공연구소(Royal Aircraft Establishment, RAE)는 유럽의 항공운송 성장에 대응할 수 있는 단거리 여객기 개발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적 항공사인 에어프랑스도 카라벨의 후속 기종으로 신형 단거리 여객기의 개발을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후 경제복구를 마친 독일이 합류했고 네덜란드와 스페인도 동참했다. 유럽을 여행하는 여행객에게 버스, 철도와 같이 간편하게 탑승할 수 있는 단거리 노선의 제트 여객기라는 의미에서 에어버스(Airbus)"라는 아이디어가 점차 구체화됐다. 새로운 유럽형 제트 여객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미국제 제트 여객기와 달리 많은 사람을 태우고 단거리를 비행하는 대형 여객기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요구조건은 기존의 727, 737 여객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종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을 의미했다.

이러한 유럽형 신형 여객기의 구상은 점차 구체화돼 1965년 파리 에어쇼에서 유럽 항공업체의 협상이 시작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영국의 중단거리 국내선 항공사 BEA 항공 주관으로 에어버스 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유럽의 항공운항사와 항공업체가 토론을 벌인 결과 200~250석급 신형 쌍발 여객기 개발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구체적인 협상을 시작했고, 마침내 196511월에 유럽에서 개발하는 에어버스의 기본 성능을 확정했다. 19667월 영국 정부는 호커 시들리, 프랑스 정부는 슈드를 개발업체로 선정했다.

 

747 개발로 흔들리는 A300

에어버스 개발에 모인 항공사는 당시 운항하던 727-100 여객기보다 운항비용이 30% 저렴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300명의 승객이 한 번에 탑승할 수 있는 에어버스(Airbus) A300 개발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최대한 많은 승객을 태워 운항비용을 낮춘다는 개념에 집중했다. 이에 따라 동체의 단면도 매우 크게 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667월 미국의 보잉 747 여객기 개발이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대부분의 항공사들은 747 여객기보다 더 큰 동체에 부담이 컸으며, 실제로 운항이 시작될 경우 초대형 엔진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걱정하게 됐다. 이에 따라 항공사는 747 여객기 수준의 동체 크기 정도면 충분하고 엔진도 747 여객기에서 사용하는 제너럴 일렉트릭(GE) CF6 또는 프랫 & 휘트니(P&W) JT9D 엔진을 그대로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비용 문제에 근거한 항공사의 강력한 요구는 에어버스 개발 계획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항공사의 요구에 대응하는 에어버스 A300 구상을 변경해 250인승으로 크기를 줄인 A250 기종의 개발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다시 검토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앞으로 일어날 험난한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