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6) Douglas DC-10 (Pt.2)

제트 여객기의 계보(36)
Douglas DC-10 (Pt.2)

 
대부분의 여객기 사업은 항공기 제작업체에서 먼저 시장을 조사한 다음 개략적인 개발방안을 작성해 항공운항사에 제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공운항사는 현재 운항하는 기종과 새로 개발하는 기종을 세심하게 비교한 다음 구매 계약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언가 부족하거나 추가 요구사항이 있을 경우 항공기 제작업체에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DC-10 여객기의 경우에는 항공기 제작업체 더글러스(Douglas)가 아닌 항공운항사에서 먼저 요구해 개발이 시작된 드문 사례에 속한다.
 
항공사의 제안과 대형 항공기 개발 착수
1966년에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엔진 공장을 방문한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 관계자는 당시 미 공군의 초대형 수송기 프로젝트인 CX-HLS에 탑재하기 위해 개발 중인 TF39 터보팬 엔진(turbofan engine)을 직접 보고 그 잠재성을 바로 알아보았다. 당시 주력 운항기종이었던 보잉 707, 더글러스 DC-8 여객기는 JT3D 엔진과 같은 작은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나중에 미 공군 C-5A 갤럭시(Galaxy) 수송기에 탑재된 TF39 엔진은 당시 어느 엔진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초대형 엔진이었다. 200명이 탑승하기에도 벅찬 보잉 707, 더글러스 DC-8 기종으로 항상 좌석 공급 부족에 시달렸던 아메리칸항공의 관계자가 보기에 TF39 엔진은 아주 좋은 해답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내선 항공사인 아메리칸항공은 TF39 엔진을 민간 여객기에 사용한다면 250명이 탑승하고 미국 대륙을 횡단할 수 있는 여객기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신형 여객기가 취항한다면 같은 운항편수를 유지하면서도 무려 25% 이상이나 좌석을 더 공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아메리칸항공은 1966년 3월 25일 새로운 쌍발 대형 여객기를 개발해 줄 것을 항공기 제작업체에 요구했다.

이러한 아메리칸항공의 요구에 대해 더글러스는 즉각 개발이 가능하다고 회답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매할 의사가 확실하다면 곧바로 개발을 시작할 것을 약속했다. 사실 미 공군의 신형 수송기 개발 프로젝트인 CX-HLS 사업에서 탈락한 이후 더글러스 기술팀은 기본적인 수송기 설계안을 바탕으로 2층 구조로 이뤄진 대형 여객기 개발을 검토하고 있었다. 기왕에 대형 수송기를 개발할 계획이었으므로 그대로 대형 여객기 개발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만일 더글러스가 2층 구조의 대형 여객기 개발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면 아마도 보잉 747 점보(Jumbo) 여객기보다 더 먼저 세상에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트 여객기 시대가 개막된 이래 보잉 707 여객기에 선두를 빼앗긴 더글러스는 판매경쟁에서 밀려나 경영난에 시달렸다. 그 결과 수요가 불확실한 대형 여객기 개발에 투입할 자금력이 부족했다. 더글러스는 이때 2층 구조의 대형 여객기를 제때 개발하지 못하고 보잉 747 기종에 선두를 내줬다는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인지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로 인수 합병된 이후에도 MD-12라는 명칭으로 초대형 여객기 개발을 계속 검토했다. 만일 MD-12 여객기가 실현이 됐더라면 지금의 에어버스(Airbus) A380 기종보다 먼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금력이 부족한 더글러스는 이 모든 프로젝트를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3발 엔진으로 결정된 신형 항공기
새로운 여객기 개발 프로젝트가 절실했던 더글러스의 입장에서 아메리칸항공이 요구한 신형 쌍발 여객기는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아메리칸항공이 요구하자마자 더글러스는 곧바로 개발을 결정했다. 문제는 엔진이었는데 1966년 시점에서 아직 미 공군 C-5A 수송기에 탑재할 TF39 엔진의 개발이 끝나지 않았고 성능과 신뢰성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더글러스 기술팀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형 엔진을 쌍발로 탑재하면 만약에 한쪽 엔진이 멈출 경우 안전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더글러스 기술팀은 아메리칸항공을 찾아가서 이러한 위험성을 설명하고 쌍발 대신 3발 엔진으로 개발할 것으로 설득했다. 그리고 아메리칸항공의 관계자를 설득하자 유나이티드항공(United Airlines)에도 찾아가 설명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의 대형 항공사를 2곳이나 확보한 더글러스는 신형 3발 여객기의 개발을 시작했다. 3발 여객기는 보잉 727 여객기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항공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낯선 기종은 아니었다. 더글러스 기술팀은 폭이 넓은 동체(wide body) 여객기의 기본형을 설계한 다음 3발 엔진의 중거리 기종을 먼저 개발해 아메리칸항공, 유나이티드항공에 납품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동체를 연장하고 4발 엔진을 탑재한 장거리 여객기를 새로 내놓으면 보잉에게 빼앗긴 여객기 시장을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3발 여객기와 달리 4발 대형 여객기는 의외로 항공사 관계자의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국책사업으로 개발하던 콩코드(Concorde) 초음속 여객기는 장거리를 단숨에 비행할 수 있는 속도성능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첨단 기술이 주는 이미지 덕분에 콩코드 여객기는 큰 기대를 모았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유명한 팬암(Pan Am) 항공의 후안 트립(Juan Trippe) 회장도 한때 콩코드 여객기 구매를 시도할 정도로 1960년대 후반에 콩코드 여객기의 인기는 높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미국도 이에 뒤질세라 보잉 2707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항공사 관계자는 앞으로 미국 대륙횡단, 대서양 횡단과 같은 장거리 노선은 초음속 여객기가 주력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더글러스에서 개발하는 신형 여객기는 중거리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장거리 노선용 4발 여객기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더글러스가 제안한 신형 3발 여객기는 미국 대형 항공사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순조롭게 개발이 진행됐다. 당시 급증하는 미국 국내선 여객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국내선의 주요 공항은 혼잡이 계속됐는데, 특히 뉴욕에 위치한 라과디아(LaGuardia) 공항이 유명했다. 당시 주력 기종인 보잉 707, 더글러스 DC-8 여객기에 맞도록 공항시설을 설치한 라과디아 공항에 새로운 대형 여객기가 취항할 경우 시설 보수 문제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메리칸항공과 더글러스는 라과디아 공항에 그대로 취항할 수 있는 크기로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경쟁자의 등장과 성공적인 데뷔
그러나 이러한 중거리 노선용 신형 여객기에 주목한 항공기 제작업체는 더글러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찌감치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과 같은 대형 여객기를 선보였던 록히드 캘리포니아 사업부(Lockheed California)는 P-3 해상초계기, F-104 전투기 생산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공장에 여유 인력이 발생하자 새로운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수송기 분야에서 C-130, C-141, C-5 기종까지 석권한 록히드는 여세를 몰아 대형 여객기 사업에 뛰어들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을 기대했다. 특히 아메리칸항공이 새로운 여객기 개발을 요구하자 록히드 역시 신형 3발 여객기 개발을 시작했다. 결국 미국 내에서 2개의 경쟁 기종이 동시에 개발을 시작하게 됐다.

록히드는 1967년 9월 L-1011 트라이스타(Tristar) 여객기의 개발을 공식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자 물밑에서 기본설계를 진행하던 더글러스의 입장에서는 선수를 빼앗긴 셈이 됐다. 사실 더글러스가 먼저 신형 3발 여객기 사업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록히드가 먼저 개발을 발표하자 다급해진 더글러스는 같은 해 11월 신형 여객기 개발을 발표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이미 아메리칸항공과 충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에 힘입어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1968년 2월 19일 옵션 포함 50대의 주문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5일에는 유나이티드항공에서 옵션 포함 60대의 주문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더글러스는 개발을 서두르는 한편으로 생산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더글러스 생산 공장은 DC-8, DC-9 기종의 생산이 한창이었는데, 판매에 호조를 보이는 DC-9 기종과 달리 DC-8 기종은 인기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DC-10 여객기가 생산에 지장을 받자 1972년에 DC-8 기종의 생산 중단을 발표하고 DC-10 여객기 생산에 집중했다.


 

사고로 잃은 신뢰성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보잉 747 점보 여객기의 영향으로 더글러스 DC-10 여객기는 중거리 국내선용 기종으로 인식됐고 인기도 그리 높지 않았다. 더구나 한정된 미국 내 시장을 놓고 더글러스와 록히드가 서로 경쟁하면서 사업의 수익성도 악화됐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DC-10 기종을 괴롭힌 것은 뜻하지 않은 사고였다.

1970년 7월 29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고 1971년 7월 29일에는 아메리칸항공에 DC-10-10 1호기를 인도했다. 그러나 순조로운 출발과 달리 DC-10 여객기는 서둘러 개발한 탓에 기술적인 문제점이 많았다. 특히 1974년 3월 3일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터키항공 DC-10 사고는 화물칸 문이 완전히 잠기지 않은 상태로 이륙해 추락했다. 이로 인해 미국 연방항공청(FAA)은 DC-10 기종에 대해 비행금지명령을 내렸다. 사고원인 조사를 마치고 2달 후에 비행금지는 해제됐지만 더글러스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엇다.

 

연장형, 공중급유기 버전도 개발돼
객실 내부에 2개의 통로를 가진 DC-10 여객기는 보잉 747 여객기에 이어 이중통로기 시대를 개척한 기종으로 유명하다. 미국 대륙횡단이 가능한 항속거리를 가진 DC-10-10 기종을 시작으로 항속거리를 연장한 DC-10-30 기종은 대서양 횡단이 가능한 장거리 기종으로 좌석이 많은 보잉 747 기종보다 탑승률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DC-10-30 기종으로 자리를 잡은 더글러스 DC-10 시리즈는 스위스항공의 요청으로 항속거리를 더 연장한 DC-10-30ER, 원래 탑재하던 GE CF6 엔진을 고객의 요구에 맞춰 프랫 & 휘트니(Pratt & Whitney) JT9D 터보팬 엔진으로 바꾼 DC-10-40 기종으로 계속 발전했다. DC-10-40 기종은 노스웨스트항공(Northwest Airlines)에서 장거리 대양횡단노선에 투입하려고 특별히 주문한 기종이다. 처음에는 DC-10-10 기종에 이어서 개발돼 DC-10-20 기종이 될 예정이었으나, 새로운 기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도록 DC-10-40 기종을 고집한 노스웨스트항공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더글러스 DC-10 기종은 1976년 미 공군의 차기 공중급유기 사업에 도전해 경쟁 상대인 보잉 기종을 물리치고 KC-10 익스텐더(Extender)라는 명칭으로 채택됐다. 더글러스의 입장에서는 보잉 707 여객기, KC-135 공중급유기에 빼앗긴 명성을 다시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미 수립된 보잉 707 여객기 1,000대, KC-135 공중급유기 800대의 기록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더글러스 DC-10 여객기는 446대, KC-10 공중급유기는 60대만 겨우 판매되는데 그쳤다.

잦은 사고와 3번 엔진의 위치로 인해 항공사의 불만이 많았던 더글러스 DC-10 여객기는 경쟁 기종인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 기종과의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기종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1967년에 맥도넬항공이 더글러스항공을 인수하면서 더글러스의 화려한 여객기 시리즈인 DC(Douglas Commercial) 시리즈도 DC-10 여객기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