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0) Boeing 737(Part 2)

제트 여객기의 계보(29)
BOEING 737(Pt.2)

 

대표적인 장거리 노선용 국제선 주력 기종인 B707 여객기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항공기 여행에는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국제선 노선을 이용해 유럽에서 출발한 여행객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 공항에 도착한 다음 자신이 거주하는 지방 도시로 가기 위해 중거리 노선용 B727 여객기로 자연스럽게 환승했다. 이처럼 보잉은 장거리와 중거리 노선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간 황금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성공의 이면에 보잉은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B707과 B727을 연속으로 투자해 개발한데다가 B720이 실패하면서 큰 부채를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보잉은 당분간 2가지 기종의 판매에 집중하면서 자금관리에 주력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보잉은 지방 소도시를 연결하는 단거리 노선 제트여객기 개발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당분간 신형 여객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더글러스에서 DC-9라는 획기적인 90인승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선두를 차지하자 보잉으로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부족한 단거리 노선용 신형 여객기 시장에 영국제 BAC 1-11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점점 보잉은 뒤처지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결국 보잉은 어려운 자금사정에도 불구하고 지방 노선에 남아있는 더글러스 DC-4, 콘베어(Convair), CV-440, 록히드 L-188 엘렉트라와 같은 구형 기종을 대체하는 100인승 소형 단거리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보잉이 그러한 결정을 할 무렵에는 이미 DC-9와 BAC 1-11에 선두자리를 내준 상황이었다. 당시 미국의 4대 대형 항공사 중 아메리칸항공은 BAC 1-11을 구입했고, 델타항공은 DC-9를 구입했다. 그리고 유나이티드항공과 이스턴 항공도 DC-9를 구입하기로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잉의 영업팀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루프트한자항공에 21대를 판매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유나이티드항공의 문을 두들겼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나이티드항공은 원래 보잉과 한 가족이었다. 1916년, 윌리엄 보잉은 시애틀에서 창업할 무렵 보잉항공기(Boeing Airplane Company), 프랫 & 휘트니 엔진, 퍼시픽항공수송(Pacific Air Transport), 해밀턴프로펠러(Hamilton Aero Manufacturing Company), 챈스보우트(Chance Vought Corporation), 시코르스키항공, 스티어맨항공기(Stearman Aircraft Company)를 차례로 통합하면서 종합 항공회사인 UATC(United Aircraft and Transport Corporation)을 설립했다. 그러나 독점금지법이 시행되면서 1931년, 항공운송사업부문을 유나이티드항공으로 분리했다. 분리 이후에도 유나이티드항공은 보잉과 인연을 계속 유지했고 보잉에서 새로운 기종을 내놓을 때 우선적으로 구입했다. 이러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유나이티드항공은 보잉에서 단거리 노선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새로운 기종을 개발하는 노력을 하지 않자 전례를 깨고 DC-9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잉은 지금까지의 인연을 바탕으로 납품할 때까지 B727을 거의 무상으로 임대해준다는 파격적인 부대조건을 제시하면서 B737 구입을 설득했고 마침내 미국 항공사로서는 처음으로 유나이티드항공이 B737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100인승, 3+3 여객기 설계 결정
보잉에서 B737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발팀의 구상은 매우 단순했다. 최대 155명이 탑승할 수 있는 B727여객기가 3발 엔진(JT8D 터보팬 엔진)이므로 엔진을 쌍발로 줄이면 100인승 여객기가 된다는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DC-9 기종이 단거리 소형 여객기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보잉의 영업팀은 시장조사 결과 50~60명이 탑승하는 항속거리 1,600km급 소형 여객기가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B737 개발은 1964년 5월부터 시작됐는데 경쟁상대인 DC-9를 너무 강하게 의식했고 B727 설계 자료를 많이 사용한 결과 개발팀은 B727처럼 T자형 꼬리날개를 가진 쌍발 엔진 여객기를 설계했다. 더구나 60인승에 맞추고자 B727의 객실을 줄여 3+3 좌석을 2+3 배치로 변경했고, 가장 중요한 엔진의 위치를 B727과 같이 후방동체의 옆쪽에 설치한 결과 경쟁기종인 DC-9와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초기 설계안을 접한 엔지니어 조 서터는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점을 곧바로 인식했다. 그는 B737에 이어 B747 점보 여객기의 개발을 주도한 인물로서 나중에 B737이 점차 발전하려면 2+3 좌석이 아닌 3+3 배치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B737은 B707, B727과 같은 동체를 사용하게 됐고 문제가 됐던 엔진의 위치는 후방동체에서 주익 아랫면으로 변경됐다. 다만 소형 여객기이고 탑재하려는 JT8D 터보팬 엔진의 지름이 작은 편이라서 엔진 지지대를 생략하고 엔진을 주익 아랫면에 직접 부착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방공항의 짧은 활주로에서 쉽게 이착륙할 수 있도록 주익에는 대형 플랩을 설치했다.




마침내 보잉의 이사회는 1억 5천만 달러(약 1626억 원)의 개발예산을 승인했으며, 1965년 2월 1일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됐다. 이어서 보잉의 영업팀은 같은 해 2월 19일에 루프트한자항공과 6,700만 달러(약 726억 원)에 21대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다만 루프트한자항공은 유럽지역의 항공시장 수요를 감안할 때 60인승이 아닌 100인승 여객기를 요구했고 자연스럽게 B737의 개발 방향은 100인승 여객기로 변경됐다. 결과적으로 이는 초기 100인승 여객기 검토안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었고 조 서터가 검토한 3+3 좌석배치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다.

1965년 4월 5일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유나이티드항공과 납품계약을 체결해 미국 시장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유나이티드항공은 40대를 구입하면서 루프트한자항공보다 더 큰 여객기를 요구했기에 보잉의 개발팀은 원래의 설계안에서 동체를 주익 앞에 약 1m, 주익 뒤에 약 1m를 연장했다. 루프트한자항공이 주문한 기종은 B737-100, 유나이티드항공이 주문한 기종은 B737-200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B737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B737-100과 -200은 일반적으로 B737 오리지널이라고 불리며 다른 기종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엔진 배치로 유명하다. 비록 경쟁기종인 DC-9, BAC 1-11, 포커(Fokker) F.27이 먼저 형식인증을 받았지만 B737은 B727과 같은 동체 단면을 사용해 개발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넓은 동체를 가지게 돼 계속적인 여객 수요의 증가에 대처가 가능했다. 이는 결국 좁은 객실을 가졌던 경쟁기종들이 모두 사라진 후 그 빈자리를 B737이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제작과 양산 시작
개발을 마친 B737은 시애틀에 위치한 보잉필드에서 생산됐는데 이는 보잉의 주력 공장인 렌튼공장이 B707, B727이 대량 생산 중이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B737은 보잉필드에서 1970년대 말까지 271대가 생산됐고 B707의 생산이 점차 마무리되면서 마침내 렌튼공장으로 생산거점을 이전했다. B737은 렌튼공장에서 지금까지 50년째 계속 생산 중이다.

보잉 렌튼공장은 원래 동체와 주익, 그리고 최종 조립까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B737을 생산할 무렵 B707, B727과 같이 생산 중인 관계로 여유 공간이 부족했다. 따라서 B737의 동체는 시애틀에 자리 잡기 이전 보잉의 생산거점이었던 캔자스의 위치타공장에서 생산하도록 했다. 위치타공장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B737의 동체를 독점 생산하고 있는데, 2005년 기체구조물 생산 전문업체인 스피리트에어로시스템즈(Spirit AeroSystems)로 분사, 독립했다.

독일에 납품하는 B737-100은 1966년 12월에 롤아웃했으며, 지상시험을 거쳐 1967년 4월 9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비행시험은 순조롭게 진행돼 1967년 12월 15일 미 연방항공청(FAA)로부터 형식인증을 받았다. 이어서 곧바로 1967년 12월 28일에 루프트한자에 1호기를 납품했는데 이 -100은 오직 30대만 생산돼 루프트한자항공과 말레이시아-싱가포르항공에 납품됐다.

B737 시리즈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종은 -200으로 1967년 8월 8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하고 같은 해 12월 21일에 미 연방항공청의 형식인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8년 4월 28일에는 유나이티드항공에서 시카고~그랜드래피즈 노선에서 최초비행을 실시했다. -100보다 동체를 약 2m 연장한 -200은 탑승객 수에서도 10% 증가된 최대 115명으로 항공사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기종이었다.



B737 시리즈는 1967년 4대 납품을 시작으로 1968년 105대, 1969년 114대를 납품했으나, 1970년 37대, 1971년 29대, 1972년 22대로 판매량이 급감했다. B737은 경쟁기종인 DC-9를 강하게 의식하고 개발한 관계로 기상정비사 없이 2명의 조종사만으로 운항하게 했는데, 이는 당시 미 조종사노조(ALPA)의 거센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100기종의 탑승능력 및 비행성능 부족도 판매부진에 한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동체를 연장한 -200부터는 판매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점차 승객들의 반응도 좋아졌다.
 

B737의 개량 모델들
B737-200은 기본형 외에도 B737-200C라고 불리는 콤비 모델이 있다. 이 기종은 전방동체의 좌측에 화물적재용 도어를 추가하고 좌석을 쉽게 분리할 수 있도록 개량한 화물기 겸 여객기 모델이다. -200C 기종은 승객이 많지 않은 지방노선에서 승객과 화물을 동시에 수송하도록 개발된 모델로 캐나디언노스항공, 놀리너항공이 처음 도입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B737-200은 DC-9 대비 항공사들의 평가가 그리 높지 못했다. 이에 보잉은 1971년 이착륙성능을 높이고 기내 인테리어 디자인을 고급화한 -200 개량형(Advanced)을 내놓았다. B737 시리즈는 -200 개량형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판매율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인기를 얻어 1988년까지 생산이 계속됐다. 미 공군은 이 기종을 T-43 항법사 훈련기로 19대 구입해 1973년 7월부터 1년에 걸쳐 인수했는데 후에 일부 기종은 항법사 훈련 장비를 철거하고 CT-43으로 개조해 기지 간 인원수송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공군은 B737-2X9 서베일러(Surveiller) 해상초계기를 구입해 현재까지 장기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종은 B737에 SLAMMAR(Side-looking Multi-mission Airbone Radar)라고 불리는 특수한 레이더를 장착, 비행경로의 측면으로 전파를 발사해 각종 선박을 탐지, 식별할 수 있는 기종으로 일반적인 대잠초계기와는 다른 기종이다. 인도네시아 공군은 1982년 5월부터 1983년 10월까지 3대의 B737-2X9 해상초계기를 인수했다.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