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2) 보잉 307 Stratoliner


 PHOTO Wikipedia

보잉 247의 성공으로 민간 여객기 분야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보잉사는 미 육군의 장거리 폭격기를 개발하면서 얻게 된 기술을 활용한 모델 307 스트라토라이너(Stratoliner)를 발표하였으며,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중간 시기인 1938년에 보잉 스트라토라이너는 같은 시기의 경쟁기종과 차별되는 성능을 보유한 기술적인 면에서 정점에 위치한 우수한 기종이었다. 다만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민간항공기로서의 활약은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지만, 보잉사는 모델 307의 개발하여 혁신적인 민간항공기 메이커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게 되었으며,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걸작 기종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모델 307은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B-17폭격기와 신형 수송기의 구상

미 육군 항공대의 신형 폭격기로 1935년에 보잉사가 제작한 모델 299 B-17 플라잉 포트레스(Flying Fortress) 폭격기의 생산을 시작할 무렵, 당시 보잉사의 클레어 엑트베트(Claire Egtvedt) 사장은 주임 엔지니어인 에드 웰즈(Ed Wells)와 기상조건의 영향을 적게 받는 고공을 비행할 수 있는 여압형 수송기의 개발 가능성에 대하여 새로운 모델의 개발을 구상하였다, 웰즈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당시 보잉사가 개발한 모델 299 시작기와 공통의 기본설계를 적용한 민간형 기체인 모델 300을 병행하여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처음에는 보잉 B-17폭격기의 군용 장비를 철거하고 여압장치를 설치하여 수송기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내가 좁은 관계로 채택하지는 못하였으며, 별도의 수송기 모델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항공기는 B-17C폭격기의 주익, 미익, 엔진을 같이 사용하고 민간형은 원형 단면을 가진 폭이 넓은 신형 동체를 결합한 신형 여객기로 제작되었으며, 이 신형수송기는 여압객실을 갖춘 여객기로서 당시의 기술로 볼 때 획기적인 기체였다.
 
먼저 개발한 보잉 247은 성공적인 출발을 한 여객기로서 가치가 높았지만, 뒤이어 등장한 더글러스 DC-2와 비교할 때 몇 가지 단점이 지적되었다. 우선 양호한 비행성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매끈한 유선형으로 동체를 설계한 결과 승객이 탑승하는 객실의 폭이 너무 좁았고, 쾌적한 여행을 위하여 밀폐식 구조로 기체를 설계하였지만 기내의 압력을 조절할 수 있는 본격적인 여압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은 관계로 비행고도의 한계가 있어 기상조건의 영향을 받지않는 비구름 위로 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보잉사는 경쟁사인 더글러스사 및 록히드사가 계획 중인 신형 항공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여압장치를 갖추고 고공을 마음대로 비행할 수 있는 고성능 여객기의 개발에 적극적이었으며 웰즈에게 본격적으로 기체의 개발작업을 실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모델 300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설계안을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S-307이라는 사내명칭으로 개발이 시작된 기체는, 고고도를 비행할 수 있는 여객기라는 의미에서 스트라토라이너(Stratoliner)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고유의 상표등록까지 하였다. 모델 307은 난기류가 발생하는 고도를 넘는 고도 6,059m의 상공에서 승객을 태우고 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937년에 팬 아메리칸 항공(Pan American Airways)의 사장인 후안 트리페(Juan Trippe)는 개발중인 신형 여객기의 설계도만 보고 4대의 보잉 S-307을 초도 발주를 하였으며, 보잉사는 본격적으로 시작기(Prototype)의 제작을 착수하게 되었다. 웰즈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검토를 하여 시작기에 비행선과 같은 모양을 가진 직경 약 3.6m(12ft)의 원형 동체를 채택하였으며, 스트라토라이너는 최초로 실용화된 와이드 바디 여객기였다.

고고도 비행 성능을 위하여 6,096m(20,000ft)의 고도로 비행하면서 기내의 압력차이를 조절하여 고도 2,438m(8,000ft)의 압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성능을 보유한 보잉 307은 객실 내부에 탑승한 승객이 악천후를 피해서 흔들리지 않고 쾌적한 항공여행을 즐길 수 있어 당시의 경쟁기종과는 차별되는 기종이었다. 또한 개발비용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동체 이외의 주익, 터보장치를 부착한 라이트 래디얼 피스톤 엔진, 수직미익, 수평미익은 B-17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며, 동체가 B-17폭격기보다 대형인 관계로 비행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익의 폭을 1.06m 연장하고 대형 엔진 카울링을 부착하였다. 동체는 모두 금속으로 제작한 모노코크구조로 되어있으며 주익에는 4대의 출력 900마력의 라이트(Wright) GR-1820-G102A 2단 터보장치를 부착한 래디얼 엔진을 장착하였고, 기내에 6,435리터(1,700 갤론)의 연료를 탑재하여 3,600km이상을 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잉 247과 같이 결빙 방지장치와 함께 방음 및 냉난방이 가능한 객실과 자동조종장치를 기본사양으로 채택하였다. 객실 내부에는 33명의 승객이 탑승하며, 가운데의 복도 오른쪽으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9개의 안락의자를 갖춘 4개의 객실이 커튼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복도의 왼쪽 창가에는 일렬로 좌석이 설치되어있었다. 여객기형의 승무원은 최대 6명이며 미국 상용항공기로서는 처음으로 기상정비사를 포함하였다. 객실의 인테리어는 야간비행 전용으로 16명이 탑승하는 침대 칸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대륙횡단 특급열차와 경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성승객을 위한 전용 미용실을 기체의 앞과 뒤에 설치하였으며, 뜨거운 기내식의 제공을 위한 주방도 설치하였으며, 1938년 당시 스트라토라이너의 판매가격은 31만 5천 달러였다.

모델 307은 모두 10대가 제작되었으며, 프로토타입(Prototype)인 1호기(NX19901)가 1938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테스트 파일로트인 에디 알렌(Eddie Allen)과 쥴리어스 바(Julius Barr)의 조종으로 초도 비행이 실시되고, 다음해 1월에는 고고도에서의 시험비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도 비행 후 불과 11주가 지난 1939년 3월 18일에 예상하지 못한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조종사인 쥴리어스 바 이외에 스트라토라이너의 주임 엔지니어인 잭 카일스트라(Jack Kylstra), 프로젝트 엔지니어 N.D. 쇼우워터(Showalter)를 비롯하여 보잉사의 직원 8명과 네덜란드 항공사인 KLM의 평가단 2명을 태우고 시험비행을 위하여 시애틀의 비행장을 이륙한 S-307은 케스케이드 산맥의 상공을 1,525m(5,000ft)의 고도로 비행하다가 스핀에 빠져들었고, 회복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인 조종사가 무리한 조작을 시도하는 바람에 기체가 비행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주익과 미익이 부러지면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10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다. 에디 알렌은 이때 탑승하지않아 사고를 모면하였으며 1938년 7월에 2호기의 조종간을 잡고 여압 객실의 테스트 비행을 담당하였다.
 

사연이 많은 백만장자의 자가용기

사고가 발생한 후, 모델 307의 주임 엔지니어인 잭 카일스트라의 후임으로 선정된 웰우드 E. 벨(Welwood E. Beall)는 사고의 원인을 조사한 후 개발비의 절약을 위하여 B-17C보다 휠씬 큰 동체를 가진 S-307에 B-17C의 꼬리날개를 그대로 사용하였음에 주목하였으며, 안정된 비행성능을 얻기 위한 비행 안정면의 유효면적이 부족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완대책으로 수직 안정판과 방향타의 면적을 확대하고, 동체의 윗면에 대형 스트레이크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B-17E를 비롯하여 B-17의 후속 모델에도 채택되었으며 2차 대전에 실전 투입한 B-17폭격기가 유럽의 하늘에서 우수한 비행성능을 발휘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모델 307의 개발은 추락사고에도 불구하고 보잉사 경영진의 강력한 추진의지에 힘입어 개발작업의 지연 없이 진행되어 1940년 3월 13일에 형식증명을 취득하였다. 팬 아메리칸 항공(PAA : Pan American Airways)은 추락한 1대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PAA-307 3대를 인수하여 Clipper Flying Cloud, Clipper Comet, Clipper Rainbow라는 이름을 붙여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거점으로 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장거리  항공노선에 취항하였으며, 앞서 등장한 보잉 247보다 안락하고 한단계 높은 항공여행의 시대를 개막하였다.


PHOTO Wikipedia

보잉 스트라토라이너의 두 번째 고객회사는 트랜스콘티넨탈 & 웨스턴항공(TWA : Transcontinental & Western Air)로서 6대를 주문하였으나 5대만 인도 받았다. TWA에 인도하는 기체는 팬암에 인도한 기체와 비교할 때 대폭 개량한 기체로서, 새로운 형식명인 SA-307B를 붙였으며, 1940년 5월 4일에 형식증명을 취득하였다. 이 기체는 길이가 짧아진 엔진 카울링과 돌출형 플랩 힌지가 가장 큰 특징이다.

TWA은 신형기인 SA-307의 취항 전에 스트라토라이너 2호기(NX19906)를 사용하여 NX1940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1940년대의 여객기’라는 문구를 크게 그려넣고 미국 각지를 방문 비행하면서 탑승객을 모집하는 광고를 하였다. TWA는 1940년 7월 8일부터 보잉 307 스트라토라이너를 미국 대륙 횡단노선에 투입하여 로스 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11시간 45분에 주파하는 신기록을 세웠으며, 반대로 뉴욕에서 로스 앤젤레스로 비행할 때에는 강한 서풍의 영향으로 12시간 18분이 걸렸다. 이로서 여압식 항공기를 사용한 미국 대륙 횡단비행노선이 개설되는 새로운 항공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보잉사에서 제작한 스트라토라이너 중에서 1대(NX19904)는 당초 TWA가 발주한 6대 중에서 1호기였으나, 특이한 경로를 거쳐 당시 백만장자인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판매되었다. 휴즈는 1938년에 자신이 사용할 전용 자가용기로 보잉사로부터 스트라토라이너를 직접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생산중인 항공기는 항공회사에 판매예약이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산중인 기체가 팬암과 TWA으로 납입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휴즈는 아예 TWA의 경영권을 인수한 후 TWA가 인수할 예정인 한대의 스트라토라이너를 사들여서 자신의 전용기로 사용하였다. 휴즈는 구입한 스트라토라이너를 사용하여 1938년 7월에 자신이 직접 록히드 14를 조종하여 수립한 3일 18시간의 세계일주 비행기록에 다시 도전하려고 계획하였다.

휴즈의 스트라토라이너는 TWA의 여객기와는 달리 비행기록에 도전하기 위하여 기체를 개조하여 프로토타입과 같은 B-17C타입의 소형 수직 안정판, 방향타를 부착하였으며, 출력이 향상된 4대의 라이트 GR-2600 트윈 사이클론 래디얼 피스톤 엔진(출력 1,600마력)을 대형 카울링 안에 정착하여 있어 겉 모습만으로는 팬암의 여객기형과 비슷하였다. 휴즈는 기체의 내부장식을 철거하고 내부에 8개의 보조 연료탱크를 설치하여 연료탑재량을 표준형의 6,435리터(1,700갤론)에서 15,103리터(3,990갤론)으로 늘렸으며, 세계일주 비행 중 4군데에서만 기착하여 연료를 보급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개조 작업이 끝난 후, 휴즈는 세계일주 비행에 앞서 뉴욕에서 베를린까지 최초로 논스톱 비행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대전의 발발하자 계획은 좌절되었고, 휴즈는 세계일주 비행의 도전을 포기하고 25만 달러를 들여 기체를 호화로운 내부장식의 자가용기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개조된 호화 전용기(Flying Penthouse)는 6명의 승객이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객실과 대형 칵테일 바, 주방, 2개의 화장실, 숙녀용 분장실, 기내 오락용 음향시설, 간접조명을 설치한 벽면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표준형의 수직 안정판과 방향타를 설치하였다. 이 전용기는 1939년 9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실제 비행을 하지 않고 지상의 격납고에 보관하였으며, 팬암사의 기술진이 대형의 더블 사이클론 엔진을 떼어내고 표준형인 라이트 래디얼 엔진을 장착하였다. 휴즈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전용기를 텍사스의 백만장자인 글렌 맥카시(Glen McCarthy)에게 팔았으며, 맥카시는 의외로 전용기를 많이 이용하지 않았으며 1963년에 다시 매각할 때까지 불과 500시간정도만 이용하였다. 이 기체는 태풍에 의하여 부서진 후 플로리다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나 동체를 수리하여 특이하게도 ‘The Londonaire’라는 이름의 해상 유람선으로 개조되었으며, 현재는 ‘Cosmic Muffin’이라는 이름의 전세 유람선으로 사용중이다.
 

2차대전과 보잉 307

제2차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팬암과 TWA 두 항공회사는 성능이 우수한 스트라토라이너를 운항하면서 별다른 사고 없이 장거리 노선에서 높은 실적을 달성하였으며, 총 720만km(450만 마일)의 무사고 운항을 기록하였다. 보잉사는 장거리 대서양횡단비행이 가능한 보잉 307을 유럽의 항공사에 판매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단념해야 했고, 보잉사는 민간여객기의 생산보다 미 육군의 폭격기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체제로 변모하여 보잉 307은 단지 10대만 제작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1942년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TWA가 사용중인 보잉 307은 미 육군 항공대에 징발되었으며, 기체를 국방색과 회색의 위장무늬로 색칠하고 C-75라는 군용기 명칭이 붙여졌다. 승무원 5명과 승객 33명을 태울 수 있는 장거리 수송기인 C-75는 주로 조종사 훈련과 VIP수송에 사용되었으며, 운항업무는 미 육군 항공대의 항공수송사령부와 계약을 체결한 TWA의 민간 승무원이 탑승하여, 미 육군의 조종사에게 4발 항공기의 장거리 비행기술을 교육하고 또한 대서양 횡단노선의 인원 및 화물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2년 반 동안 5대의 C-75 수송기는 대서양 횡단노선에 투입되어 약 3,000번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실시하면서 인원과 물자를 수송하였으며, 약 45,000시간의 비행시간과 1,200만km의 비행거리를 기록하였다. C-75의 활동기간 중 완벽한 무사고 비행기록의 달성에는 실패하였는데, 대서양 횡단비행 중에 연합군의 구축함 승무원이 C-75 수송기를 독일 공군의 폭격기로 착각하여 대공사격을 하는 바람에 20mm 포탄이 꼬리날개를 파손하였으나 추락사고는 겨우 면하였다. C-75 수송기에 탑승한 VIP로는 조지 C. 마셜(George C. Marshall) 미 육군 참모총장,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H.H. ‘하프’ 아놀드(Henry Harley ‘Hap’ Arnold)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을 비롯하여 J.H. 타워즈 해군대장 등을 들 수 있다.

1944년에 군무에서 해제된 C-75 수송기는 보잉사로 옮겨져 성능 향상형으로 개조 작업을 한 후, TWA에 반환되어 민간 항공운송에 투입하였으며, 주익과 엔진 나셀, 수평미익을 B-17G의 부품으로 교체하고, 꼬리부분을 B-17G의 것으로 바꾸어 전체 길이가 0.9m(3ft) 길어졌다. 한편 900마력의 사이클론 엔진을 1,200마력의 라이트 GR-1829-G666 엔진으로 교체하여 비행성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한편 전기시스템은 B-29와 같은 형식으로 교환하고, 여압장치를 제거하고 객실 내부를 확장하여 좌석 수를 33석에서 38석으로 늘렸으며, 최대이륙중량은 20,412kg(45,000파운드)으로 증가하였다. 개조한 기체는 SA-307B-1이라는 새로운 형식명이 붙여졌으며 전쟁 전의 민간기 등록기호로 복구하여  TWA의 코치 클래스로 운항을 재개하여 1951년까지 취항하였다. TWA사는 1951년에 보유중인 4대의 스트라토라이너를 프랑스의 에글 아쥬르(Aigle Azur)항공과 에르노티크(Airnautic)항공에 매각하였으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주로 운항하였다. 그 중 3대는 1960년대에 라오스 항공(Air Laos)으로 매각되어 베트남 전쟁의 초기에 남 베트남의 사이공 외곽을 거점으로 운항을 하였다. 그러나 그 중 1대는 미국 전투기의 오인 사격으로 격추되었고, 나머지 2대는 지상에서의 정비작업 중에 공격을 받아 회복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다.

한편 팬암이 사용한 기체 중 1대(Clipper Flying Cloud, NC19903)는 남아프리카에 매각된 후 사용되다가, 다시 아이티에 매각되어 아이티의 대통령 전용기로 사용되었다. 그 후 아이티에서 미국으로 다시 매각된 보잉 307의 마지막 기체(N19903)는 애리조나주 턱슨에 위치한 피마 내셔널 항공 우주 박물관(Pima County Museum, National Air & Space Museum)에서 전시하였으며, 초창기의 여압식 여객기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체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보잉 307 여객기로서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영구 보존을 위하여 보잉사에서 6년에 걸쳐 기체 복원작업을 하여 2001년 6월 23일 롤 아웃하여 2002년에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002년 3월 28일에 보잉 필드를 이륙하여 이착륙 시험비행에 나선 보잉 307은 비행중 3번 엔진이 고장을 일으키면서 연료압력의 급격한 강하로 착륙에 실패하여 엘이어트만(Elliott Bay)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착수 후 승무원은 무사히 구조되었으며 기체는 다시 회수하여 수리하였다. 1940년에 팬암에서 사용하던 상태로 복원작업을 마친 보잉 307은 스미소니언 내셔널 항공 우주 박물관(Smithsonian's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의 신관으로 버지니아주의 덜레스 공항외곽에 최근 개관한 스티븐 F. 우드바-헤이지 센터(Steven F. Udvar-Hazy Center)에 전시하기 위하여 마지막 대륙횡단을 한 후 현재 박물관에서 전시 보관되고 있다.
 

PHOTO Wikipedia
 
[제원]
보잉 : 모델 SA-307B 스트라토라이너
형식 : 장거리수송기(승무원 5명)
폭 : 32.61m
길이 : 22.66m
높이 : 6.34m
주익면적 : 138.05㎡
엔진 : 라이트 GR-1820 사이클론 래디얼 피스톤 엔진 (정규출력 900마력) ×4
무부하중량 : 13,608kg
최대이륙중량 : 19,050kg
페이로드 : 승객 최대 33명
최대속도 : 396km/h(고도 17,300ft)
순항고도 : 354km/h(고도 15,700ft)
실용상승한도 : 7,985m
항속거리 : 3,846km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