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 보잉 314 Clipper



전설적인 이름인 클리퍼(Clipper)’는 보잉사가 개발한 대형비행정으로 모델 314의 애칭인 동시에 팬 아메리칸 항공의 무선 콜 사인이기도 하다. 1930년대 당시 여객선을 타고 열흘이상 걸려 대서양을 횡단하여야 하는 시대에 등장한 대형 비행정은 승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여객기로, 빠르고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인식되어 전성기를 누렸다. 팬 아메리칸 항공의 클리퍼는 주력 노선인 대서양 횡단을 비롯하여 태평양 노선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비행정이 장거리 여객기로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여객선보다 빠르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객선 못 지 않게 호화로운 실내장식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배 멀미로 여객선의 이용을 꺼리는 승객들이 선호하였다. 또한 비행정의 특성상 대서양을 횡단하는 장거리 노선 운항 시 엔진이 고장을 일으켜도 안전하게 바다에 내려앉을 수 있다는 신뢰감도 작용하였다.
 
보잉 모델 314는 캘리포니아주 오크랜드의 보잉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였던 웰우드 E. 빌 (Wellwood E. Beall) 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개발된 항공기이다. 빌은 엔지니어 겸 비행교관을 시작으로 나중에 워싱턴주 시애틀의 보잉 본사의 영업팀까지 담당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생각한 기본구상은 마틴사와 시코르스키사의 비행정과 경쟁할 수 있도록 대서양을 논스톱으로 비행할 수 있는 비행능력을 가진 항공기였다. 빌은 당시 제작 중에 있었던 연구용 기체인 보잉 XB-15 폭격기(나중에 B-17 플라잉 포트레스로 발전)의 주익, 엔진 및 수평미익을 이용하여 개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거대한 모노코크식의 동체와 결합한 모델 314의 설계안은 주간 비행 시에는 74명이 탑승할 수 있고, 해양비행을 위한 리클라이닝 시트(침대 겸용)를 장착할 경우에는 34명이 탑승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클리퍼의 탄생

1935년 1월에 팬 아메리칸 항공사(Pan American Airways)는 미항공상무국에 대서양횡단노선의 개설 계획을 제시하였으며, 마틴 M-130 및 시코르스키 S-42와 같은 대형비행정을 보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노선에 투입할 새로운 기종이 필요하다는 점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1936년 2월에 팬 아메리칸 항공사가 발표한 요구사양서에 따라 보잉사는 신형기의 설계안을 제출하였으며, 6월 21일에 팬암은 6대의 기체를 제작하는 300만 달러 이상의 발주를 하였고, 6대는 옵션 계약을 체결하였다. 보잉사가 제출한 설계안은 XB-15 중폭격기의 기술적 특징을 이어받고 최대이륙중량 37,442kg에 4구획으로 분할한 객실에 최대 74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대형비행정으로 XB-15의 주익과 수평미익을 유용하여 설계하였다. 다만 기체가 대형화됨에 따라 엔진을 대폭 변경하여 XB-15의 프래트&휘트니제 R-1830 트윈 래디얼 피스톤 엔진 대신에 라이트제 GR-2600 더블 사이클론 래디얼 피스톤 엔진을 4대 탑재하였다. 설계상으로 모델 314는 최대속도 311km/h, 항속거리 5,633km를 발휘하는 기체로서 경쟁사인 마틴사와 시코르스키사의 비행정보다 항속거리가 600마일 이나 길어 대서양을 논스톱으로 횡단할 수 있었다.

1938년 5월에 완성한 모델 314의 초도기(NX18601)는 같은 달 31일에 보잉사의 테스트 파일로트인 에디 알렌(Eddie Allen)의 조종으로 초도 비행에 나서 두와미슈(Duwamish)강에서 퓨지트 사운드(Puget Sound)를 향하여 내려앉았으나, 점화플러그의 불량으로 엔진의 출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 떠오르는데 실패하였다. 모델 314는 다음달인 6월 7일에 38분간의 완벽한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워싱턴(Washington) 호수에 착수한 후 알렌은 빌에게 비행중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최대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기체의 방향 조종성이 불충분하다는 점으로, 조종 중에 엔진의 출력차이로부터 발생하는 방향불안정 현상을 수직미익이 충분히 잡아주지 못하였다.
알렌의 지적에 대하여 수직미익의 면적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을 파악한 기술진은 키가 낮은 단수직미익을 키가 큰 쌍수직미익으로 변경하기로 하였으나, 검토한 결과 이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원인은 모델 314의 기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웬만한 면적의 수직미익으로는 충분한 요잉 안정성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산형 기체에는 3개의 수직미익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1939년 1월, 모델 314 클리퍼(Clipper)는 민간항공국(CAA)의 형식증명을 취득하였으며, 초도기를 ‘호놀룰루 클리퍼(Honolulu Clipper)’라고 명명하여 팬암에 인도하였다. 상업운항은 1939년 5월 20일부터 대서양 횡단 우편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최초의 발주분 중 나머지 5대도 계속 인도하여 6월 16일까지 인도를 마쳤다. 팬암 항공은 모델 314의 장거리 비행성능을 살려 2대는 샌프란시스코와 홍콩을 연결하는 태평양 노선에 취항하고, 나머지 4대는 미국 동해안에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에 도착하는 노선에 취항하였다. 우편업무에 이어 여객수송업무는 1939년 6월 21일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모델 314는 정기여객수송업무에 사용하는 사상최대의 항공기로 기록되었다.

태평양 및 대서양 횡단노선에서 운항을 한 결과 모델 314사의 장거리 운항성능에 만족한 팬암사는 옵션으로 발주한 6대분을 확정발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성능개량을 보잉사에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보잉사는 추가 발주한 6대의 클리퍼에는 대형 프로펠러를 부착하고 엔진을 1,600마력으로 출력이 향상된 라이트 GR-2600 더블 사이클론 엔진으로 변경하며, 항속거리 연장을 위한 추가연료탱크를 설치하여 연료탑재량을 4,542ℓ늘렸다. 또한 객실의 내장도 변경하고 좌석을 3자리 추가한 개량형은 모델 314A라고 불리며 최초에 제작한 6대의 비행정중 5대도 나중에 개량형인 모델 314A로 개조되었다. 모델 314A의 초도기는 1941년 3월 20일에 초도 비행을 하였으며, 1942년 1월 20일까지 6대의 기체가 완납되었다.


314의 내부를 보여주는 단면도

 

대서양노선에 취항

1939년 3월 3일에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인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가 탑승한 ‘양키 클리퍼(Yankee Clipper)’는 유럽노선 취항을 위하여 볼티모어를 이륙하여 아조레즈 군도에 도착하였다가 버뮤다를 경유하여 돌아오는 테스트 비행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5월 20일에는 아더 라 포르테(Arthur La Porte) 기장의 조종으로 팬암항공의 뉴욕~리스본~마르세이유 노선에 취항하여 유럽을 향한 최초의 정기 우편물 서비스를 시작하였으며, 이 노선에는 ‘양키 클리퍼’가 활약하였다. 한편 같은 날에 조셉 체이스(Joseph Chase) 기장이 조종하는 ‘호놀룰루 클리퍼’가 팬암의 임원과 기자들을 태우고 하와이까지 운항하였다. 최초의 유료 승객 탑승은 R.O.D 설리번(Sullivan) 기장이 조종하는 ‘딕시 클리퍼(Dixie Clipper)로서 6월 28일에 뉴욕~리스본간의 대서양 횡단노선을 비행하였다. 또한 7월 28일에는 ‘양키 클리퍼’가 팬암항공의 뉴욕~사우샘프톤을 연결하는 북대서양 노선에 취항하였다.
 

팬아메리칸항공의 조종석 내부


전쟁중의 클리퍼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대륙에서 2차대전이 시작되자, 팬암항공은 대서양 노선의 편수를 감축하였으나, 태평양 노선의 클리퍼는 변동 없이 정상적인 운항을 계속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 7일(현지 시각기준)에 ‘안자크 클리퍼(Anzac Clipper)’는 하와이를 향하여 비행 중이었으나, 공격을 피하여 하와이의 힐로(Hilo)섬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한편 로버트 포드(Robert Ford) 기장이 조종하는 ‘퍼시픽 클리퍼(Pacific Clipper)’는 뉴질랜드의 오크랜드(Auckland)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포드 기장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역이 전쟁 위험 구역인 관계로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여 샌프란시스코 직항노선으로 귀국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고, 결국 서쪽으로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뉴욕으로 귀국하는 항로를 선택하였다. 귀국항로는 호주, 네덜란드령 인도,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를 거쳐 남대서양을 건너, 무려 55,520km를 비행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팬암사가 보유한 9대의 모델 314와 모델314A중에서 4대는 미 육군항공대에서 징발하여 C-98이라는 군용기 명칭을 부여하여 사용하였으며, 1942년 11월에는 1대가 팬암사로 반환되었다. 그리고 3대는 미 해군이 팬암사로부터 구입하여 B-314라는 명칭으로 사용하였으며, 운항승무원을 팬암사의 승무원이 담당하였다. 기체는 부분적으로 미채도장을 하고 민간등록기호를 부여하여 사용하였다.

한편 팬암사가 발주한 6대의 모델314A중에서 실제로 인도받은 항공기는 3대이며, 나머지 3대는 영국정부에 조달하기로 결정하여 1941년 영국해외항공(BOAC :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에 인도하였다. 이들 항공기는 민간항공기 등록번호를 부여하여 ‘G-AGBZ 브리스톨(Bristol)’, ‘G-AGCA 버위크(Berwick)’, ‘G-AGCB 뱅고어(Bangor)’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영국과 미국간의 중요한 대서양 연락노선을 유지하는데 투입되어, 포이네스~라고스 구간을 주로 운항하였다. 전쟁기간중의 모델314A는 모든 항공기가 대활약을 하였으며, 그 중에서 ‘딕시 클리퍼’는 1943년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수상의 긴급회의에 참석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태우기도 하였다.(이것은 미국대통령이 항공기에 탑승한 최초의 기록이다.)
 

보잉 314는 세계2차대전에서 수송기로 활약하기도 했다.
 

유일한 사고

우수한 비행성능을 보유한 모델 314는 1942년 2월 22일에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하였다. 240회의 대서양횡단비행을 완료하고 100만 마일 이상의 비행거리를 달성한 ‘양키 클리퍼’가 포르투갈 리스본(Lisbon) 근교의 태거스(Tagus)강에 착수하면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39명의 승객과 승무원 중 24명이 사망하였다. 7년간의 취항기간 중 1대가 18,000시간을 초과하는 비행시간을 달성하였고, 합계 3,650회의 대서양 및 태평양 횡단비행과 1,280만km를 넘는 비행거리를 기록하였으며, 팬암사의 클리퍼 9대중 ‘양키 클리퍼’만이 유일한 사망 사고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대양을 횡단하는 대형비행정의 활약시대도 더글러스 DC-4 스카이마스터 및 록히드 콘스텔레이션과 같은 항속거리가 긴 우수한 신형 육상기가 등장하면서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비행정의 영업환경은 급속하게 위축되었다. 팬암사가 보유한 5대의 모델 314도 1946년까지 모두 퇴역하였으며, 그 중 3대는 건도크에 보관하고, 다른 2대(퍼시픽 클리퍼, 호놀룰루 클리퍼)는 유니버설 항공사에 매각하였는데 결국 5대의 항공기는 모두 사고나 스크랩 처리되어 등록이 말소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BOAC가 소유한 3대의 모델 314A도 1947년에 미국으로 반환되었으며, 이들 기체는 팬암사의 항공기와 같이 소규모의 챠터항공회사에 매각되어 상업운항을 하다가, 2대는 비행 중 사고로 손실되었으며 나머지 1대는 주기 상태에서 태풍으로 파괴되어, 불행히도 현재 남아있는 모델 314는 1대도 없는 실정이다.

 

포인즈 비행정 박물관(Foynes Flying Boat Museum)에 전시된 보잉 314



보잉 314 클리퍼 제원

승무원 : 10명
전폭 : 46.33m
전장 32.31m
전고 : 8.41m
주익면적 : 266.34㎡
엔진 : 라이트 R-2600 더블 사이클론 래디얼 피스톤 엔진 ×4대 (정규출력 1,500마력)
공허중량 : 22,801kg
최대이륙중량 : 37,422kg
페이로드 : 승객 최대 74명
최대속도 : 3111km/h(고도 10,000ft)
순항속도 : 295km/h(최적고도)
초기상승률 : 172m/min
실용상승한도 : 4.085m
항속거리 : 5.663km


글 /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