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기의 역사(33) Tupolev Tu-144 Charger

제트 여객기의 계보(32)
Tupolev Tu-144 "Charger"

 

제트전투기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1950년대는 특히 제트여객기가 역동적으로 태동하는 황금기였다. 1949년에 D.H.88 코메트(Comet) 제트여객기가 처음 선보인 이후 B707, 카라벨(Caravelle), Tu-104, DC-8, 콘베어(Convair) 880, B720 기종이 연달아 등장한 시기가 1950년대다. 더구나 냉전의 시기이니만큼 서방 국가와 동구권 국가의 치열한 기술경쟁에 힘입어 미흡한 기술 수준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D.H.88 코메트 여객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성층권을 비행하는 항공기의 창문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적당한 금속재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설계했다. 그 결과 금속의 피로현상으로 인해 창문틀이 부서지면서 비극적인 추락사고가 연달아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엔지니어가 노력한 결과, 미비한 점을 보완해가며 B707, DC-8 여객기와 같은 걸작 기종이 탄생했고 이러한 제트여객기의 발전은 1960년대로 계속 이어졌다.

1950년대에 서방 국가도 그렇지만 동구권 국가도 마찬가지로, 제트엔진을 사용하는 항공기가 추구하는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속도 성능이었다. 당시는 국제 원유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연료소비나 경제성과 같은 개념이 아직 미약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비용이 들더라도 속도가 빠른 항공기를 개발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속도가 빨라야 단시간 내에 적기를 추격하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으며 빠르게 상승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전투기가 아닌 여객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즉 속도가 빠르면 먼저 도착해서 승객을 내려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미국의 콘베어에서는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880 여객기를 선보였다. 880이라는 숫자는 1초에 880피트(약 970km/h)를 비행할 수 있는 속도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거의 마하 1에 근접하는 고속비행이 가능했다. 이러한 성능을 내고자 콘베어 880 여객기는 F-4 전투기, B-58 폭격기에 적용하는 고성능 J79 터보팬 엔진을 무려 4대나 탑재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속도 성능을 추구한 나머지 콘베어 880 여객기는 고객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제트엔진을 설계하는 기술이 점차 향상되면서 과도한 연료소비를 줄이면서도 속도 성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연료가 적게 들고 크기가 작아진 제트엔진을 적용하면 이전보다 작은 크기로 제트여객기를 개발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인 배경에서 등장한 2세대 제트여객기가 바로 H.S(Hawker Siddeley) 트라이던트(Trident), B727/737, BAC 1-11, 더글러스(Douglas) DC-9, 포커(Fokker) F.28 기종이다. 1세대의 혈통을 이어받은 2세대 제트여객기는 안정된 비행성능과 더불어 경제성, 편의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 많은 여행객들의 환영을 받았다. 2세대 제트여객기의 선두 주자인 B737 기종의 경우에는 꾸준한 개량을 거쳐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을 정도다.
 

“속도가 곧 힘”, 초고속 여객기에의 경주
이처럼 1960년대에 등장한 2세대 제트여객기는 기술적으로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공기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시각에서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냉전 시기에는 "속도가 곧 힘"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경제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더욱 빠른 속도로 비행할 수 있는 여객기는 모든 엔지니어의 꿈이자 숙제였다.

이러한 초고속 제트여객기의 개발은 서방 국가나 동구권 국가의 엔지니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초고속이란 이전의 900~1,000km/h 수준의 비행속도가 아니라 소리의 속도보다 빠른 성능 즉 초음속을 의미한다.

1960년대 제트전투기를 비롯한 고성능 군용기의 개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초고속 제트여객기의 개발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처럼 대서양 횡단과 같은 장거리 노선을 고속으로 비행한다면 더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고 보유한 항공기의 수량을 줄일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미래를 구상했다.

가장 먼저 태동한 초고속 여객기 개발은 콩코드(Concorde) 여객기다. 콩코드 여객기를 개발하려는 구상은 이미 1950년대 초에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 RAE(Royal Aircraft Establishment) 총재인 아놀드 홀이 초음속 여객기(SuperSonic Transport, SST)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면서 콩코드 여객기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 구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협력하면서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69년 3월 2일에 1호기가 처음 비행에 성공했다. 1956년부터 SST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거의 15년에 걸쳐 개발이 진행됐다. 따라서 개발에 필요한 핵심기술은 노출되지 않더라도 개발을 진행하는 상황은 언론보도를 통해 계속 노출됐고 이러한 소식은 소련에도 전해졌다.

 


소련, 과시 위해 초음속 여객기 제작
1950년대 말, 1세대 제트여객기가 항공운송의 주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서방국가와 달리 소련의 경우 초음속 여객기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서방 국가의 경우 개인의 이동이 자유롭고 마음대로 여행을 다닐 수 있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개별적인 이동을 제한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을 감안할 때 장거리를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고성능 여객기의 필요성은 낮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냉전의 시기에 대외적으로 첨단 과학기술을 과시하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선전에 중요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에서 콩코드 여객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자 소련도 곧바로 개발을 시작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한 자부심이 초음속 여객기로 이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첨단 항공기술을 상징하는 초음속 전투기의 개발이 미국보다 뒤쳐진 상황에서 초음속 여객기를 먼저 개발한다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초음속 여객기의 운항에 따른 소음문제나 오존층 파괴 같은 문제도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을 업고 개발이 시작된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는 소련 총리 흐루시초프의 후원에 힘입어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 그러나 실제로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는 기술은 쉽지 않으며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소련 정부는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을 빨리 공개해 과시하려고 했다. 그 결과 본격적으로 개발되기에 앞서 1962년 1월, 소련의 항공 전문지 Technology of the Air Transport는 1962년 1월호에 Tu-144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 개념을 게재했다. 실제로 Tu-144 여객기가 정부의 승인을 받아 개발되기 시작한 시점은 1963년 7월 26일이다. Tu-144 계획은 개발을 시작해 5대의 시제기를 1966년까지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소련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은 투폴레프(Tupolev), 일류신(Ilyushin), 야코블레프(Yakovlev) 설계국 중에서 여객기와 폭격기 분야에서 실적을 쌓은 투폴레프 설계국(OKB)이 선정됐다. 특히 투폴레프 설계국이 소련 최초의 제트여객기인 Tu-194 여객기를 개발한 실적도 감안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소련은 이미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해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음속 전투기와 여객기를 개발하는 기술에는 차이점이 많았고 투폴레프 설계국의 엔지니어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투기의 경우에는 아음속으로 비행하다가 필요할 때만 잠시 초음속을 돌파한다. 그러나 여객기의 경우 이륙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초음속으로 비행해야 하기 때문에 개발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 F-22 전투기에나 볼 수 있는 초음속 순항 기술 슈퍼크루징(Super Cruising)도 이미 1960년대에 등장하고 있었다.

투폴레프 설계국은 이러한 기술적인 난이도를 확인하기 위해 미코얀(Mikoyan) MiG-21 전투기를 개조해 새로운 주익을 부착한 MiG-21I 아날로그 기술시범기를 제작했다. MiG-21 전투기는 삼각형 주익과 미익을 가지고 있지만 MiG-21I 기술시범기는 미익이 없고 초음속 순항에 적합한 새로운 주익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주익은 콩코드 여객기의 주익과 비슷한데 초음속으로 비행할 때 공기의 저항을 줄이고 양력을 유지하도록 부드러운 곡선으로 설계됐다. MiG-21I 기술시범기로 수집한 데이터와 풍동시험 결과는 Tu-144 여객기 개발에 소중하게 활용됐다.

Tu-144 여객기를 개발하는 동안 소련 정부는 투폴레프 설계국의 엔지니어를 재촉했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은 쉽지 않은 과제다. 결국 1966년까지 완성한다는 계획은 지연돼 1968년 12월 31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매섭게 추운 소련에서 12월 마지막 날에 초도비행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개발일정의 지연에 따른 독촉이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소련 정부가 Tu-144 여객기의 초도비행 날짜를 독촉한 이유는 경쟁 상대인 콩코드 여객기의 초도비행이 1969년 초에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의 입장에서는 F-100 전투기에게 빼앗긴 최초의 초음속 제트전투기라는 이름을 Tu-144 초음속 여객기에서 되찾고 싶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Tu-144 여객기는 1968년 말에 초도비행을 성공했고 결국 콩코드 여객기보다 빨리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라는 기록을 차지하게 됐다. 콩코드 여객기는 1969년 3월 2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두른 성과, 절반의 성공 남겨
그러나 이러한 성과 뒤에 투폴레프 설계국은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만 했다. 사실 소련 정부가 독촉해 시제 1호기의 초도비행을 실시했지만 기술적으로는 미완성이었다. 특히 초음속 순항에 적합한 주익의 설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실제로 비행시험에서 불안정한 특성을 확인했다. 이후 투폴레프 설계국은 Tu-144 시제 1호기의 문제점을 반영해 재설계한 Tu-144S 여객기를 완성했다. 시제 1호기를 보완한 Tu-144S 1호기는 1971년 7월 1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양산형이라고 할 수 있는 Tu-144S 여객기는 콩코드 여객기와 다른 형태의 주익을 가지고 있다. 콩코드 여객기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주익을 가지며, Tu-144S 여객기는 사브 J25 드라켄(SAAB J35 Draken) 전투기와 비슷한 2중 델타익을 채택해 직선이 강하고 제작하기도 쉽다. 그리고 이착륙할 때 불안정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기수에 카나드를 장착했다. 미익이 없는 경우 삼각형 주익에 커다란 뒷전 플랩을 설치하면 기수가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한다. 원래 저속에서 플랩을 내리면 주익에 양력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는데 미익이 없는 상태에서 플랩을 내리면 플랩 자체가 수평미익의 역할을 하며서 기수를 내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Tu-144 여객기는 기수에 카나드를 설치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했다. 콩코드 여객기의 경우 주익의 형태가 다르고 주익의 위치가 Tu-144 여객기보다 앞쪽에 있어 이러한 문제점이 덜 발생한다.

Tu-144 여객기는 콩코드 여객기와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주익이 다르고 동체 역시 크기를 확대해 객실에 2+3 좌석 배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엔진도 콩코드의 경우 중앙선에 더욱 가깝게 부착하고 있다. 원래 Tu-144 개발 초기에는 미국 XB-70 폭격기처럼 중앙에 모든 엔진을 집중해 배치했으나 진동과 엔진과열 문제가 있어 좌우 엔진을 분리했다. 실제로 Tu-144 여객기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콩코드 여객기보다는 XB-70 폭격기에 가깝다. Tu-144S 여객기는 이륙한 다음 애프터버너(After Burner)로 마하 2로 가속하고 애프터버너를 끄고 마하 1.6으로 순항할 수 있다. 이러한 성능은 애프터버너를 끄고 마하 2로 비행할 수 있는 콩코드 여객기보다 낮은 것으로 후속작 Tu-144D 개량형은 엔진의 추력을 높이고 연비를 개선한 RD-36-51 엔진을 사용해 애프터버너를 끄고 마하 2로 비행할 수 있다.



Tu-144 여객기는 급하게 개발됐고 소련의 여객수요를 감안할 때 사치스러운 기종이었으며 연비도 좋지 않았다. 이에 따라 Tu-144 여객기는 시제기 1대, Tu-144S 10대, Tu-144D 5대 등 모두 16대만 생산됐고 국영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Aeroflot)에서만 취항했다. 실제로 연료가 많이 드는 Tu-144 여객기는 단기간 동안 불과 102편만 운항하고 중단됐다. Tu-144 여객기는 상업운항 중에는 큰 사고가 없었으나 1973년 6월 3일, 파리 에어쇼에서 시범비행 도중 인근 마을로 추락해 승무원 6명과 주민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운항중지 이후 Tu-144 여객기는 투폴레프 공장에 보관돼 있으며 일부는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특이하게도 1996년에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Tu-144D 여객기 1대를 임차해 연구용으로 비행시험을 실시한 바 있다.
 
 
[제원 : Tu-144D]
 
승무원 : 3명
승객 : 140명 (퍼스트 11, 이코노미 129)
전폭 : 28.80 m
전장 : 65.70 m
전고 : 12.55 m
주익면적 : 506.35 ㎡
자체중량 : 99,200 kg
최대이륙중량 : 207,000 kg
최대속도 : 마하 2.15 (2,300 km/h)
순항속도 : 마하 2.0 (2,125 km/h)
항속거리 : 6,500 km
상승고도 : 20,000 m
엔진 : Kolesov RD-36-51 터보팬 엔진 (추력 20,000 kg) × 4


글/ 이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