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 여객기의 계보 (46) Boeing 767 (Pt.1)

제트 여객기의 계보 (46)
Boeing 767 (Pt.1)


 

글/ 이장호



더글러스(Douglas) DC 시리즈 여객기의 아성에 눌려 발전이 어려웠던 보잉(Boeing)에 있어 1960년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을 계기로 장거리 대형 폭격기 전문업체로 자리잡은 보잉은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B-47, B-52 전략폭격기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보잉 247 여객기 이후 시장에 선을 보인 민간 여객기의 판매 실적은 더글러스에 한참 뒤지는 초라한 성적에 불과했다.


제트 여객기 시대의 출범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보잉의 최고경영자에 오른 빌 앨런(William M. Allen) 회장은 B-47 제트 폭격기의 기술을 그대로 응용한 제트 여객기의 개발을 결심했다. 보잉의 100년 역사에서 "신의 한수"라고 할 수 있는 보이 707 여객기의 개발은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 1952년 취항한 영국의 D.H.106 코메트(Comet) 제트 여객기가 1954년 의문의 추락사고를 연속으로 당하면서 항공사 관계자들과 여행객 모두 제트 여객기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트 여객기의 개발 사업을 결심한 빌 앨런 회장의 결정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 보잉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한 팬암항공(Pan American World Airways)의 후안 트립(Juan Trippe) 회장의 사업적인 야망도 큰 동력을 제공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발된 보잉 367-80 여객기는 1957년 12월 20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20대를 주문한 팬암항공을 제외한 다른 항공사들은 선뜻 구입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후안 트입 회장 자신도 경쟁사에서 개발하는 더글러스 DC-8 제트 여객기 25대를 병행해 구입했다. 혹시나 어느 한 쪽이 개발에 실패하더라도 미국 최초로 제트 여객기를 운항하는 항공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공군의 구형 KC-97 공중급유기가 속도가 빨라진 B-52 제트 폭격기에 공중급유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지자 보잉은 미 공군의 요구에 따라 367-80 시제기를 개조해 KC-135 공중급유기를 개발했고 더불어 보잉 707 여객기도 판매에 호조를 보이면서 1,000대라는 판매 실적을 거두게 된다.


<Boeing 767>

여객기 전문업체로의 발돋움
그러나 국제선 기종인 보잉 707 여객기의 항속거리를 줄여 중단거리 노선용으로 선보인 보잉 720은 항공사들의 외면을 받으며 사실상 실패를 경험했다. 보잉은 보잉 720 여객기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중단거리 노선에 필요한 제트 여객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미국의 국내선 중단거리 노선에 적합한 보잉 727 여객기를 내놓았다. 사실상 보잉 707 여객기의 동체를 그대로 사용하고 엔진을 3발 형식으로 변경해 140인승 국내선 기종으로 등장한 보잉 727 여객기는 언뜻 보기에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원시설이 부족한 중소도시의 지방공항에도 취항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편의장치를 추가했기 때문에, 727 여객기는 등장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발돋움했다. 1,832대라는 판매실적을 기록한 727 여객기는 폭격기 전문업체라는 인상을 갖고 있던 보잉이 여객기 전문업체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727 여객기 매출이 호조를 보이면서 기반을 다진 보잉은 1960년대 말 초대형 기종인 보잉 747 점보 여객기를 내놓으면서 완전히 더글러스, 록히드(Lockheed)를 제치고 미국 최고의 여객기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1968년까지 회장을 역임한 빌 앨런은 DC-3, DC-4 여객기로 미국의 여객기 시장을 독점했던 더글러스의 아성을 물리치고 보잉이 여객기 전문업체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Boeing 727>

장거리 기종인 707, 중단거리 기종인 727에 이어 등장한 단거리 노선용으로 1964년에 취항한 100인승 기종 보잉 737 여객기는 사실 보잉이 원해서 개발한 기종은 아니었다. 경쟁사인 더글러스에서 미국의 국내선에 적합하게 개발하던 DC-9 여객기에 대응하고자 서둘러 개발한 기종이었다. 더군다나 미국의 주요 항공사에서 외면을 당한 737 여객기는 오히려 독일의 루프트한자(Lufthansa)에서 먼저 구매하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보잉 727 여객기가 거둔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여객기 시장을 완전하게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던 보잉은 1970년대 초부터 다각적으로 신형 여객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737​·747 등 포트폴리오 확대
1960년대에 유럽에서 등장한 콩코드(Concorde) 초음속 여객기에 대항하고자 미국 정부가 시작한 초음속 여객기(Supersonic Transport, SST) 사업은 초기의 큰 기대와 달리 기술적인 한계, 개발비의 증가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예산확보 문제가 겹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미국 정부가 1971년 SST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개발을 담당했던 보잉은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다행히 보잉 727 여객기의 판매가 호조를 보였기 때문에 보잉의 경영진은 SST 사업의 일환이었던 보잉 2707 초음속 여객기의 개발 중단으로 인해 공백이 발생한 개발 인력을 새로운 여객기 개발에 투입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1970년부터 취항하기 시작한 747 여객기의 개발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기 때문에 보잉으로서는 새로운 개발 사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 초반, 보잉의 여객기는 경쟁사 대비 폭 넓은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다. 보잉은 2클래스 기준 350인승 장거리 국제선 기종인 747, 150인승 장거리 국제선 기종인 707, 140인승 중단거리 국내선 기종인 727, 100인승 단거리 국내선 기종인 737 등 대형에서 소형에 이르는 다양한 기종을 보유했었다. 747 점보 여객기와 707 기종의 중간에 공백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잉의 제트 여객기 라인업은 경쟁사 더글러스, 록히드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유럽에서 새로운 움직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웰메이드" A300의 미국 안착
1950년대 초 세계 최초로 D.H. 106 코메트 제트 여객기의 상용화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럽의 항공업체는 미국의 707 여객기에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후에도 유럽의 항공업체는 슈드 카라벨(Sud Caravelle),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Hawker Siddely Trident), 빅커스 VC-10, BAC 1-11, 포커(Fokker) F.28, BAC/아에로스파시알(Aerospatiale) 콩코드, 닷소 메르큐르(Dassault Mercure) VFW 614 등 수많은 기종을 내놨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유럽의 항공업체들은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에 공감했다. 콩코드 여객기와 재규어(Jaguar) 전투기를 공동개발하면서 이뤄진 영국과 프랑스의 항공산업 협력관계는 마침내 유럽 합작회사인 에어버스(Airbus)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정부의 긴밀한 협력으로 설립된 에어버스에서 처음 개발한 A300 여객기는 250인승 중단거리 기종으로 1974년부터 운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의 국적항공사도 선뜻 구매하지 않았고 다른 항공사들 역시 조금 더 지켜보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넓고 쾌적한 기내 공간과 함께 소음이 적은 에어버스 A300 여객기는 1974년 10월 대한항공에서 6대를 구매하면서 처음으로 수출에 성공했다.

특히 1977년에는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 유나이티드항공(United Airlines), 델타항공(Delta Airlines)과 더불어 미국의 4대 항공사인 이스턴항공(Eastern Air Lines)에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턴항공은 1977년 12월부터 뉴욕~마이애미 노선에서 A300 기종의 운항을 시작했는데, 이스턴항공은 A300 여객기에 대해 지금까지 기재 중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내렸고 승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특히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바로 경제성이었다. 당시 미국 국내선에서 많이 사용되던 보잉 727, 더글러스 DC-10, 록히드 L-1011 기종은 모두 3발 엔진 기종이었으나 에어버스 A300은 쌍발 기종으로 경제성에서 고객 항공사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미국의 보잉과 더글러스는 유럽에서 여객기를 제작한다는 사실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장에서의 판매력이나 자금력 측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미국의 항공산업은 경쟁력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초 판매시장에서 고전하던 A300은 1977년 40대를 수출하는 데에 성공하고 더구나 이스턴항공에 판매하면서 미국시장까지 진출하게 됐다. 특히 1973년 발생한 4차 중동전쟁의 영향으로 발생한 석유값 폭등위기를 거치면서 민간 여객기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성을 내세운 A300 여객기는 판매량을 점차 늘려가면서 마침내 미국까지 상륙했고 보잉과 더글러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Airbus A300>


목표는 쌍발 중거리 노선 항공기
보잉은 747 개발을 마무리하고 1970년부터 차세대 여객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에 발생한 석유값 폭등 위기에도 불구하고 747 점보 여객기는 많은 승객이 탑승할 수 있었고 무착륙으로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제선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반면 1950년대 이후 등장한 707, 727, DC-8 기종은 1980년대 이후 노후화로 인해 새로운 기종으로 대체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됐다.

석유값 폭등 위기를 거치면서 항공사들은 200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는 경제성이 높은 중거리용 여객기를 선호하게 됐다. 경제성이 높다는 점은 단순한 연비 향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료비용 절감과 더불어 기체와 엔진 정비 및 부대비용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 특히 1970년대 대부분의 여객기는 3발 엔진을 탑재했는데, 이에 비해 에어버스 A300 여객기는 관계자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쌍발 엔진으로도 충분한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경제성이 높았다. 에어버스는 1970년 후반, 새로운 기종을 희망하는 고객사들의 요구를 반영해 250인승 A300 여객기의 동체를 단축한 200인승 여객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A310으로 명명되는 신형 여객기는 미국의 국내선에서 주로 활약하는 727, DC-8 기종을 직접적인 교체 대상으로 삼고 있었ㄷ. 더군다나 에어버스 A310 여객기는 항공기 관제사가 없는 2인승 조종실로 항공사의 인건비 절감에도 크게 도움이 되는 기종이 될 예정이었다.

보잉이 1970년부터 1980년대 이후를 목표로 하는 신형 여객기도 에어버스 A310 여객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잉은 차세대 여객기를 연구하면서 이탈리아의 국영 항공업체인 아에리탈리아(Aeritalia)와 공동으로 QSH(Quiet Short Haul) 여객기를 검토했다. QSH 여객기는 명칭 그대로 소음이 적고 단거리에서 이착륙할 수 있는 기종으로 대량 707 기종과 규모가 비슷한 4발 엔진을 탑재한 기종이었다. QSH 여객기는 소음 민원이 많은 유럽의 중소공항에 취항할 것을 목표로 했으면 영국 H.S. 146 여객기와 비슷한 성격의 기종이었다. 그러나 보잉의 입장에서는 국토가 넓은 미국에서 QSH 여객기 출시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했다. 대신 200석 급으로 약 3,300~4,600km) 정도의 항속거리를 가진 중거리 노선용 여객기가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개발 중인 에어버스 A30 기종과도 비슷한 개념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Boeing-Aeritalia Q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