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여객기의 계보(53) Boeing 737 Classic(Pt.2)

제트여객기의 계보(53)
Boeing 737 Classic(Pt.2)

 


글/ 이장호

1970년대 후반에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하고자 했던 보잉(Boeing)의 가장 큰 고민 거리는 연비와  소음공해 문제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2가지 문제점은 민간 여객기를 운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숙명적인 숙제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 등장한 대부분의 여객기는 군용기 엔진을 개조해 탑재하고 있었다. 당시 냉전이 치열했던 시기라는 배경에서 항공산업에서 군용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았고 탑재 엔진 역시 군용기 위주로 개발됐다. 다시 말하자면 민간 여객기 전용으로 신형 엔진을 개발한다는 것은 개발비용이나 경제성 측면에서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때에 보잉에서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신형 엔진을 구하려는 노력에 동참할 엔진 전문업체가 있었다는 점은 보잉에 큰 행운이었다. 민간 여객기용 엔진 사업에서 실적이 부진했던 프랑스 스네크마(SNECMA)는 1960년대 말부터 차세대 민항기에 필요한 추력 10톤급 고성능 엔진 개발을 검토했다. 

다만, 당시 프랑스의 민간 여객기 사업은 미국과 비교할 때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개발을 추진할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영국의 롤스로이스(Rolls-Royce),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 프랫 앤 휘트니(Pratt & Whithney, P&W)와 같은 엔진 전문업체와 공동개발을 모색하게 됐다.


스네크마-GE, 손잡다
당시 민간 여객기용 엔진 시장은 P&W가 상당량을 점유하고 있었다. P&W는 군용기 엔진 사업으로 기반을 다진 다음 이를 개조해 민간 여객기용 엔진 시장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보잉에서 처음 개발한 제트여객기 707 기종에 탑재된 엔진은 B-52 폭격기 탑재용으로 개발된 JT3 엔진이었다. 

반면 경쟁업체였던 GE는 시장에서 1등을 차지하기 위해 역전의 구원투수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GE는 시장을 역전시킬 신형 엔진을 개발할 기술력은 충분했지만 많은 비용을 투자해 독자적으로 신형 엔진을 개발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컸다.

GE가 10톤급 신형 엔진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민간 여객기가 아닌 군용기 사업이었다. 1972년, 미 공군은 점차 노후화되고 있는 C-130 전술 수송기의 대체 기종을 개발하는 AMST(Advanced Medium STOL Transport) 사업을 시작했다. AMST 사업에 큰 기대를 걸었던 미 공군은 매우 높은 수준의 성능을 요구했다. C-130 대비 2배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고 12톤의 화물을 적재하면 610m 길이의 짧은 활주로에서 이착륙이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미 공군은 C-141 스타리프터(Starlifter) 수송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제트수송기의 시대를 개척했고 이어 초대형 수송기 C-5 갤럭시(Galaxy)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추세를 이어 미 공군은 터보프롭 엔진이 아닌 터보팬 엔진을 탑재한 신형 수송기를 개발학자 했다.

미국의 보잉,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 벨(Bell), 페어차일드(Fairchild), 록히드(Lockheed)-노스 아메리칸(North American) 등 5개 팀이 경쟁에 참여한 결과 보잉, 맥도넬 더글러스 등 2개 업체가 개발업체로 선정됐다. 개발에 나선 보잉은 YC-14, 맥도넬 더글러스는 YC-15 시제기를 제작해 비행시험을 시작했다.

쌍발 엔진을 채택한 보잉과 달리 맥도넬 더글러스는 4발 엔진으로 설계했는데 문제는 적절한 엔진이 없다는 점이었다. 맥도넬 더글러스 YC-15 기종에는 10톤급 4발 엔진이 필요했는데 적절한 제품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맥도넬 더글러스 개발팀은 임시방편으로 추력 8톤급인 민간 여객기용 JT8D 엔진을 탑재해 비행시험을 진행하고 정식으로 채택되면 이어서 신형 엔진으로 교체할 계획이었다.

 
<좌부터 Boeing YC-14, McDonnell Douglas YC-15>

이러한 차에 스네크마에서 제안한 공동개발은 큰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신형 엔진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개발비 부담은 P&W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간 여객기용 엔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시장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신형 엔진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P&W 입장에서는 충분한 시장 규모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당장에 신형 엔진을 개발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한편 1970년대에 영국 경제가 내리막길을 걸으며 경영난에 처한 롤스로이스는 이미 계약한 RB.211 엔진을 제 때 개발하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록히드에서 야심차게 개발한 L-1011 트라이스타(Tristar) 여객기 개발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스네크마 입장에서 민간 여객기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10톤급 신형 엔진을 공동개발할 수 있는 믿음직한 파트너는 GE가 가장 알맞았다. 두 회사는 실무적인 협상을 거친 다음 1971년 파리에어쇼에서 공동개발을 발표했다.


CFM56의 탄생
기본적으로 10톤급 신형 엔진은 미 공군의 AMST 수송기 사업을 기반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신형 엔진의 개발에 도전한 GE는 당시 최신예 초음속 폭격기인 B-1 폭격기에 탑재되는 F101 엔진을 개발하고 있었다. GE의 엔진 개발팀은 우수한 성능을 가진 F101 엔진을 개조하면 민간 여객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10톤급 터보팬 엔진을 개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GE와 스네크마가 협력해 공동개발하려면 당시 최첨단이었던 F101 엔진의 핵심기술을 프랑스에 이전해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협력체계에서 탈퇴해 독자적인 군사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안보 측면에서 미국과 원만하지 못했다.

미 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엔진기술 수출을 거절했지만 GE의 부단한 노력으로 1973년 승인을 내줬다. GE가 이처럼 스네크마와 공동개발하고자 한 이유는 GE 단독으로는 거대한 개발비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한 사정이 있었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GE와 스네크마는 공동출자해 CFM 인터내셔널(CFM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CFM이라는 명칭은 GE에서 개발한 CF6 엔진, 스네크마에서 개발한 M56 엔진에서 유래했다.


<GE CF6>

우여곡절을 거쳐 개발된 CFM56 엔진은 1974년 6월 20일에 GE 공장에서 테스트가 시작됐다. 한편 맥도넬 더글러스는 YC-15 수송기에 CFM56 엔진을 탑재해 비행시험을 시작했다. 비행시험 결과 CFM56 엔진의 연비는 만족스러웠고 소음도 매우 낮았다.

지금은 CFM56 엔진이 보잉 737 시리즈의 탑재 엔진으로 유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CFM56 엔진은 민간 항공기가 아닌 YC-15 군용 수송기 탑재 엔진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YC-15 수송기 비행시험 결과 CFM56 엔진의 탁월한 성능을 확인한 맥도넬 더글러스 기술팀은 연비가 낮아 고민이 많았던 유나이티드항공(United Airlines)과 델타항공(Delta Airlines)의 DC-8 여객기에 신형 엔진을 탑재하도록 개조했다.


<CFM International CFM56>


737에 탑재된 CFM56
간절하게 기다렸던 10톤급 CFM56 엔진이 개발되면서 보잉 737 여객기의 차세대 모델 개발도 본격화됐다. 종전에 8톤급에 불과했던 JT8D 엔진의 경우 쌍발 형식이라면 100인승 737, 3발 형식이라면 150인승 727 여객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력이 높아진 신형 CFM56 엔진이라면 쌍발 형식으로도 150인승 여객기를 개발하는데 충분했다. 이러한 점은 민간 여객기 시장의 판도를 바꿀만한 획기적인 기술발전이었다.

보잉은 1980년대 초부터 신형 737 여객기 개발을 시작했다. 737-100/200에 이어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737-300 기종은 개발 과정에서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지름이 작은 JT8D 엔진을 탑재한 737-100 여객기는 개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매우 간단한 구조의 착륙장치를 갖고 있었다. 당초 의도는 착륙장치 길이를 줄여서 여행객이 계단을 통해 탑승하기에 편리하도록 했지만 신형 엔진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큰 난제는 연비 향상을 위해 엔진 지름이 매우 커졌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종전의 짧은 착륙 장치를 그대로 두고 신형 엔진을 탑재할 경우 엔진이 지면과 맞닿을 정도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잉과 GE 기술팀은 머리를 맞대고 여러 방법을 검토했다. 다각적인 검토 결과 CFM56 엔진의 압축기 블레이드 지름을 줄이면 엔진과 지면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압축기의 크기를 줄이면 엔진 추력도 줄어드는 단점이 발생하지만 착륙장치 사정을 감안할 때 최선의 결론이었다.

GE는 최대 고객인 보잉의 요구에 맞춰 엔진 지름을 줄인 CFM56-3 엔진을 개발했고 보잉은 신형 엔진을 둘러싼 덮개를 납작하게 설계하고 최대한 주익에 가깝게 부착하는 등 최선의 설계안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엔진의 덮개(Cowling)는 공기저항을 감안해 원형으로 설계하지만 2세대 737 기종의 경우 정면에서 볼 때 3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설계된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독특한 형태의 CFM56-3 엔진 탑재방식으로 인해 "쌀알(rice ball)" 형식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CFM International CFM56-3>


신기술 적용된 737-300
엔진 변경 이외에도 2세대 737 여객기는 많은 신기술이 적용됐다. 동체 단면은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주익이 확대되면서 동체 길이가 2.64m 연장됐다. 한편 주익의 앞전과 뒷전에 고성능 플랫이 추가돼 이착륙 성능이 향상됐다. 주익 폭 역시 날개 끝에서 22cm가 연장됐으며 주익의 공기역학적인 설계도 개량됐다. 한편 엔진 성능이 높아지면서 비행속도도 증가됐기 때문에 비행 중 방향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수직미익이 전면적으로 재설계됐다.

2세대 737에 적용된 신기술 중 가장 두드러진 점은 디지털 기술을 적용한 조종실이다. 항법사와 항공기관사 없이 2명의 조종사만으로도 운항이 가능한 맥도넬 더글러스 DC-9 여객기가 등장할 무렵에도 보잉은 국내선 기종인 727 여객기에 3인승 운항을 고집하고 있었다.

아직 1960년대만 해도 컴퓨터를 활용한 자동화 기술이 초보적인 단계였기 때문에 운항 중에는 항공기관사가 탑승해 기체의 각종 정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과감하게도 2인승 운항이 가능한 DC-9 여객기가 등장하면서 항공운항사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보잉도 2인승 운항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디지털 기술이 부족했던 터라 737-100 여객기를 개발할 때에는 기계식으로 설계해 실제로 운항할 때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러한 점을 반영해 737-300 여객기를 개발할 때 보잉 기술팀은 적극적으로 디지털 전자기술을 도입했다. 보잉 기술팀은 이미 757, 767을 개발하면서 디지털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개념의 조종실(Glass Cockpit)을 선보인 바 있다. 이어 개발된 737-300 기종에는 757 여객기의 디지털 조종실을 개량해 4개의 CRT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한 신형 조종실이 적용됐다.


<Boeing 757 Glass Cockpit>


가장 효율적으로 개발
신형 엔진 개발이 진행되면서 1981년 3월 보잉은 737-300 여객기의 본격적인 개발을 발표했다. 보잉 계획으로는 설계 작업을 거쳐 이듬해 2월부터 시제 1호기 제작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게 CFM56-3 엔진 개발이 지연돼 1982년 3월에 이르러서야 테스트가 시작됐다.

보잉은 1983년 2월에 707 여객기에 CFM56-3 엔진을 탑재해 비행시험을 시작했다. 예정보다는 지연됐지만 제작을 마친 737-300 시제 1호기는 1984년 2월 24일에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이어 같은해 3월 2일부터는 시제 2호기가 비행시험에 합류했다.


<Boeing 737-300 Roll out>

국내선 기종인 737-300 여객기의 첫 고객은 저비용항공사(Low Cost Carrier)의 선도업체인 사우스웨스트항공(Southwest Airlines)이다. 737-300 여객기의 잠재력을 인정한 사우스웨스트항공은 대량의 기체를 주문했고 빠른 시일 내에 납품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보잉은 737-300 개발을 빠르게 진행했는데 1984년 초 초도비행에 성공하자마자 모든 비행 시험을 빠르게 마치고 같은 해 11월 14일 형식증명을 취득했다. 이어 12월 7일부터는 사우스웨스트항공에서 상업운항을 시작할 정도로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빠르게 진행됐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개발될 수 있었던 비결은 새롭게 개발하는 기종이 아니라 기존 737-200 기체를 기반으로 새로운 엔진과 전자장비를 적용해 개량한다는 개념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보잉 기술팀은 최대한 문제점을 피해가면서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737-300 여객기는 기존 DC-9 대비 많은 승객이 탑승할 수 있었고 연비와 소음발생이 낮은 기종으로 인기가 높았다. 1984년 첫 선을 보인 이후 2000년까지 무려 2,000대가 판매될 정도로 항공운항사의 인기를 모은 비결 역시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경제적인 기종을 선보였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